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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운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약력에 일본군 간부후보생 전력이 포함된 것 때문에 요새 난리군요. 그래서 오랫만에 잠시 부상도 할 겸 관련 포스팅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일단, 당시 사회는 지금과 달리 교육수준이 지금보다 매우 낮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겁니다. 즉 고학력자의 수가 매우 적었지요.
때 문에 일본은 1943년까지 대학생들의 입영을 유예해 주었습니다. 병역법에도 이게 명문화되어 있었어요. 1927년에 개정된 구일본의 병역법 41조를 보면 전문학교 및 대학교급 재학생 및 졸업자에 대해서는 입영을 연기해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분이 없었고, 이 혜택을 이용하려는 일본인의 수도 많았습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주요 대학의 입시 경쟁률이 폭증한 것만으로도 이를 입증하는데는 충분할 거에요. 10~20대 1은 기본이고, 50대 1에 달한 학교도 있었다고 합니다.
와세다 대학 고등학원 전문부 63,000명
게이오 대학 15,000명
메이지 대학 25,000명
니혼 대학 예과 24,000명
릿쿄 대학 40,000명
주오 대학 22,000명 등
(1943년 응시자 수)하 지만 전황이 악화되고 병력자원의 부족이 심각해지자 칙령 755호 <재학생 징집연기 임시특례법>이 공포되면서 1943년 10월 1일자로 이 특혜는 취소됩니다. 그리고 10월 20일자로 <육군특별지원병 임시 채용규칙(육군성령 제48호)>이 선포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전문학교-대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도 소집을 받게 되지요. 이게 바로 “학도출진”입니다.
물 론 사전 정지를 위한 작업도 있었습니다. 10월 12일자로 내각에서 의결한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 방책>에서는 이공과 계통의 학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영을 연기해 주었지만 법문계 대학이나 전문학교 학생의 경우에는 교육을 정지한다는 방침을 내려놓고 있었거든요. 바로 다음날인 10월 13일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담화를 통해 국가적 방침을 알릴 정도였습니다. 참, 사범학교 학생도 예외였습니다.
10월 25일에는 적령자 및 적령을 넘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1회 임시 징병검사가 행해집니다. 이후 졸업생들도 이 제한을 적용받게 되었고, 11월 20일까지 지원서를 제출하면 44년 1월 20일자로 입영하기로 수배가 되었습니다.
이 를 위해 총독부에서는 10월 25일자로 각 지구 대학 및 전문학교 교장회의를 열어 “솔선수범해서 몸을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전시 비상조치 방책 지도요강>을 만들어 “신체적 상황으로 입영치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생산요원으로 징용할 것을 천명했고, 10월 30일에는 <전 조선 대학/전문학도 임전 결의대회>를 개최하여 “대임(大任)에 봉답(奉答)”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극히 차가왔습니다. 그래도 조선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 학생들 중에는 미국과 영국의 실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전쟁의 결과 일본이 패망할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측도 이런 사상적 동향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원운동을 벌였는데, 4주의 지원기간 중 3주가 지났을 때(11.12 현재) 지원율은 37.8%에 불과했습니다.
학교명/적격자 수(名)/지원자 수(名)/백분비(%)
법학전문학교/40/40/100
고등상업학교/32/32/100
부산고등수산학교/22/22/100
경성제대/92/51/55.4
경성제대 예과/15/8/53.3
보성전문학교/268/43/16.0
연희전문학교/293/102/34.8
명륜전문학교/73/23/31.5
혜화전문학교/985/372/34.0총계/985/372/37.8 – 매일신보 11월 12일자.
한편 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서는 11월 4일자로 이런 결의를 해 놓고 있었습니다.
“20일까지 지원하지 않는 학생에 대해서는 휴학처분을 하고, 휴학처분을 받은 자는 이미 학도가 아니므로 공장, 광산 기타 긴요한 방면에 징용할 것”
이 외에도 총독부에서는 지원자를 늘리기 위하여 교장에 대한 압력, 강연회 실시 등 갖은 수단을 다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11월 12일에서 20일까지의 남은 1주일 동안 “조선 반도 내의 적격자 1000명 중 겨우 41명을 남긴 959명”이, 일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은 “1,529명의 적격자 중 1,431명”이, 일본에 잔류한 유학생도 “과반수인 791명”이 등록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9월로 졸업날짜가 당겨진 그 해의 졸업자 “1,547명 중 941명”이 지원했으며, 취직자 또한 “47%가 좀 넘는 335명”이 지원했습니다.
그래도 안 한 사람도 많다고 하시겠죠? 등록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총독부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오노(大野) 총독부 학무국장 : “미지원자에 대하여 속히 황국신민으로서의 엄격한 재연성을 가하여 전시 생산력 증강상 필요한 방면에 징용하기로 결정하였다.”(1943.11.21 기자회견)
뭐, 간단하게 하기로 했으니 이상으로 끝.
참고자료 :
일본근대스펙트럼 vol.03 – 일본의 군대 : 병사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 요시다 유타카, 논형, 2005
현대한국사 vol.5 – 광복을 찾아서(1919~1945), 편집부, 신구문화사,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