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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의 유태인 파워
유태계, 주로 영향력 있는 매체서 활동
2000여 년의 유랑생활 중 모든 박해를 감수하면서도 유태인은 단 한번도 좌절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한 때 찬란한 문명과 세력 판도를 자랑했던 이집트,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페르세폴리스,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결국은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태인만은 아직도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고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본지는 미국 국내외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 언론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의 유태인들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주>
현재 전 세계 유태인의 숫자는 약 1,500만~1,8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오늘날의 유태인들을 크게 ‘아쉬케나지’(Ashkenazim)와 ‘세파라딤’(Sepharadim), 그리고 이디오피아계인 ‘팔라샤’(Falasha) 등 세 부류로 나눈다.
이 가운데 순수 셈족으로 알려져 있는 세파라딤 유태인은 과거 유럽으로 이산한 유태인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거주했던 사람들과 그 자손들을 말한다.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한 세파라딤은 중세시대 전 세계 유태인의 절반을 차지했고 라디노어(유대스페인어)를 사용했다. 일례로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주 경기장이 위치한 몬주익(Montjuic) 일대는 과거 유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몬주익은 `유태인의 산`을 뜻한다.)
20세기 초 석유왕으로 불리던 록펠러(John D. Rockefeller) 그는 독일에서 이주한 유태인의 후손이다.
그러나 1492년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두 가톨릭 왕들이 마지막 남은 이슬람 지배 지역인 그라나다에 입성 합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아랍의 지배는 종식됐다. 유태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만약 개종하지 않으면 스페인에서 떠나야만 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는 약 50여만 명의 유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5만 명이 1500년 가까이 살아온 고장을 떠나기 싫어 부득이 스페인에 잔류했으며 나머지 유태인들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다.
아슈케나지 조상, 터키계 카자르인
반면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북동 유럽계 유대인으로 옛날 카자르(Khazar) 왕국을 세웠던 터키계 카자르인의 후손이다. 카자르 지방은 현재의 남러시아의 평원으로 8세기경 이 광대한 초원에서는 터키계의 사람들, 즉 카자르 족은 상인, 직인, 무사로 살았다. 이 무렵 카자르 왕국은 비잔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았다.
이에 740년경 불란(Bulan)왕은 양쪽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유태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이에 국민 대다수를 유태교로 집단 개종시켰다. 카자르 왕국은 9세기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 956년 우크라이나 왕국의 스비아토스라프 왕의 침략을 받고 몰락했다.
그 후 아시아로부터 온 몽골군이 유럽으로 원정을 오자 카자르인 들은 몽골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매부리코로 유명한 동부 유럽의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실제로는 터키계인 카자르 족의 후손인 셈이다. 현재 아쉬케나지는 미국, 이스라엘, 유럽, 남아공에 약 1,200만 명(전세계 유대 인구의 70%차지), 세파라딤은 이스라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 약 450만 명, 팔라샤는 이스라엘, 이디오피아, 예멘 지역을 합쳐 약 2만 명 정도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美 전체 인구 중 유태인 비율은 2.5%
현재 미국 내 유태인 숫자는 약 700백 만 명 정도(미국 전체 인구의 약 2.5%)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총인구 2억 8천 1백만 명 중 백인이 1억 9천4백만 명(69.1%), 히스패닉계가 3천5백만 명(12.5%), 흑인이 3천 3백만 명(12.1%), 아시아계가 1천 1만 명(3.6%)인 것에 비하면 매우 미미한 숫자이다. 그러나 미국 내 유태인의 영향력은 전혀 인구와는 비례하지 않는다.
유태인이 미국에 최초로 정착한 역사는 1654년 7월 8일 바르심슨(Jacob Barsimson)이라는 네덜란드계 아쉬케나지 유태인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본격적인 유태인의 미국 이민을 1840~1880년간 있었던 독일계 이민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 동구계 이민으로 본다면 약 150년 정도의 이민역사밖에 되지 않으며, 오래된 가계(家系)라 해도 많아야 평균 3~4대 정도의 뿌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의 유태인들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유태인의 선도적 역할은 괄목할 수준이다.
이 때문에 유태인이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막후에 숨어 세계경제를 맘대로 주무른다는 이른바 ‘유태인 음모설’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 때 일본에서도 유행했다. 그러나 유태인 전문가들은 미국 사회에서의 유태인 성공비결을 ▲미국 사회의 개방성 ▲낮은 이민 귀국률 ▲도시상공업 정착 ▲유태교의 기업 장려 ▲검소검약 ▲교육중시 ▲선민사상 ▲동포금융 ▲위험과 차별을 이겨낸 경쟁력 등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치 분야 :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 내 유태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며 부(富)를 축적한 반면 정계에는 많은 인물을 진출시키지 못했다. 이는 만약 유태계 인사들이 미국의 주요 정치적인 상*하의원이나 또는 주지사에 많이 진출하게 되면 일반인의 반감, 나아가서는 반(反)유태주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를 염두에 둔 신중한 자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같이 각자가 능력만 있으면 어떤 직종에나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유태인도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1970년대 이후부터는 유태인도 상*하원에 속속 진출하기 시작했다.
유태계, 공화당보다 민주당 선호
미국 유태인의 대다수는 매우 리버럴하다. 이로 인해 이들의 정치적 성향도 자연히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상대적으로 소수민족을 우대하며 리버럴한 성향을 띤 민주당 선호로 기울어져 있다. 과거 미국 유태인 중에는 사회주의자도 많았다. 더욱이 미국 내 정치색이 짙은 각종 사회활동(노동*여성운동)에는 유태인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단체와의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소련에 원자폭탄 비밀을 넘긴죄로 처형된 유대인 로젠버그
1886년 시가(담배) 제조 노동자들의 조합을 이끌던 유태인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가 창설한 미국노동총연맹(AFL)의 경우 1904년 1백75만 조합원을 거느린 미국의 대표적인 노동 조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이후 흑인 민권운동을 성원한 주축세력도 유태인이었으며, 월남전 이후 기승을 부리던 인권단체 등의 지도부 역시 거의 유태인 일색이었다.
적은 숫자의 유태인이 이처럼 다양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이들 활동이 필요로 하는 개방적 성향과 함께 자금과 언론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득면만 보더라도 유태인 한 사람의 연 평균 소득이 4~5만 달러인데 비해 일반 미국인은 3만 7천 달러 선이므로 미국사회 전반에 걸쳐 유태인은 대체로 안정된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태인 평균 투표율 80% 넘어
유태인은 실상 민주당 인사보다 더욱 리버럴하다. 특히 낙태문제, 정교분리 등 주요 사회문제에 대한 유태인의 성향은 민주당보다 더 개방적이다. 특히 각종 선거 때마다 미국 일반인의 평균 투표율은 53%인데 비해 유태인의 투표율은 80%를 넘는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있은 출구조사를 보면 유태인 78%가 클린턴(민주당)에게 투표하고 12%는 부시(공화당), 10%는 페로(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태인들은 지지하는 후보의 당락에 상관없이 평균 55~65%가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고, 약 10%선이 공화당후보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리버럴 혹은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Jewish Power’, 1997년 판) 특히 친(親)유태적 성향이 강했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4선 모두 유태인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반대로 유태계 혈통이지만 보수주의자 이었던 골드 워터(Barry Goldwater) 공화당 후보의 경우 1964년 대선서 약 10%의 유태인 득표에 그쳤다.
한편 부시 가문(家門)의 경우 유태인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現 부시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Jeb Bush)가 플로리다 주지사 출마했을 때 유태인들은 멕시코 인을 아내로 맞은 그를 낙선시키려고 했고,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 재검표 사건 때도 유태인들이 고어 편에 서서 부시를 낙선시키려고 법정투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美 대선직전 여론조사 기관인 ‘그린버그 리서치’가 유태인 유권자 8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5%가 민주당의 존 케리(체코계 유태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을 보면 이러한 현상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특히 세계적인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헝가리계 유태인)는 지난 대선에서 전례 없는 반(反)부시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반(反)부시 단체인 ‘함께 가는 미국’(America Coming Together)에 1000만 달러 기부를 약속한 뒤 500만 달러를 전달했으며, 부시 정책을 반대해온 인터넷 시민단체 `무브온`(Move On)에 25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 소로스가 기부를 약속한 돈은 드러난 것만 1550만 달러(한화 약 180억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화당의 조직이 부시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치고 동성연애자 결혼 허용 반대의 기치를 내걸면서 전체 유권자들의 3분의 1이나 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경제 분야 : 지난 2000년 10월 ‘포브스’誌가 발표한 미국의 4백대 자산가 가운데 유태인은 64명(16%). 유태인의 인구비율(2.5%)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미국의 헤드헌팅 회사인 스펜서 스튜어트의 토머스 네프가 지난 99년 발표한 미국 기업의 `리더 베스트 50인`에도 8명(16%)의 유태인이 포함됐다. 이 같은 유태인의 경제력은 지난 85년의 부호 순위 점유율 26%를 정점으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막강하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금융계의 거장으로 지난 18년간 FRB(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의 의장으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해온 앨런 그린스펀은 뉴욕 태생의 유태인이다. 뿐만 아니라 M&A의 ‘달인’인 시티그룹의 샌 포드 웨일,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AIG의 모린스 그린버그, 메트라이프의 로버트 벤 모세, 리만 브라더스의 리처드 풀스, 골드만 삭스의 헨리 폴슨 회장 등이 모두 성공한 월가(Wallstreet) 유태인들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직원 10~15% 유태인
빌 게이츠와 함께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MS)를 일군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도 유태인이다. 디트로이트출신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수학과 경제학 학위를 마친 그는 지난 2000년 빌 게이츠가 CEO자리를 물러나면서 그 뒤를 이은 실질적인 2인자다. 2백50억 달러가 넘는 재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유태인으로 꼽힌다. 스티브 발머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는 직원의 10~15%가 유태인이다.
경제학자중에선 마틴 펠드스타인 하바드대학교수, 폴 크루그만 프린스턴대학교수, 조셉 스티글리츠와 다니엘 카네만 등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도 유태인이다. 참고로 노벨 경제학상 수장자중 유태인 비율은 41%다. 폴 사무엘슨, 밀턴 프리드만, 로버트 소로우, 게리 베커 등이 모두 유태인 경제학자들이다.
美 연방은행(연준)의 전경. 연준은 사립은행의 집합체로 주요 소유자는 록펠러, 골드만 삭스, 로스차일드 등의 유태계 재벌이다
한편 ‘연준’(FRB)의 경우 실제로는 사립은행의 집합체로 현재 직접적으로 ‘연준’의 주요 소유자는 록펠러, 골드만 삭스, 로스차일드 등의 유태계 재벌이다. 실제로 미국의 ‘Yellow Page’(업종별 전화번호부)를 보면 ‘연준’은 정부기관란이 아닌 민간기업란에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영국의 중앙은행이다. 영국의 중앙은행은 원래 로스차일드 가문의 개인 소유 은행이었다가 1946년 노동당 정부가 국유화 했다. 공식적으로는 국가 소유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민간은행의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 5대 은행(시티, BOA, J.P.모간 체이스, 와코비아, 웰스파고)은 체이스 맨하탄과 J.P. 모건 등의 유태 재벌이 직영하고 있으며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유럽의 로스차일드와 제휴하여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한편 오는 2006년 초 임기가 끝나는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의 후임도 역시 유태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 인물이 하버드대의 마틴 펠드스타인 교수이다.
지난 82년 레이건 행정부 시절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낸 펠드스타인 교수는 現 부시 행정부의 경제정책을 이끌고 있는 로렌스 린지 백악관 경제보좌관, 글렌 허바드 대통령 경제자문위원, 로저 퍼거슨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부의장, 로렌스 서머스 前 재무장관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유태인, 주로 영향력 있는 매체서 활동
▲매스컴 : 유태인 파워는 美 언론계에서도 막강하다. 20세기 들어와 미디어의 위력은 날로 확대되고 정치도 여론에 의해 움직이며 이 여론도 결국은 언론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언론은 모든 국가권력을 압도 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특수기관으로 성장했다. 유태인은 리버럴한 데다 탈무드의 영향으로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및 경제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론*영화*정보 산업의 속성에 꼭 들어맞는 기본 훈련이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언론계의 유태인은 전체 종사자의 6%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 언론인이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거의 모두 주요매체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유태 언론인의 27%는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워싱턴 포스트(WP), 월스트리트 저널(WSJ), 뉴욕타임즈(NYT), 타임, 뉴스위크 및 CNN, CBS, NBC, ABC 등 TV 4사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 유태 언론인들은 여론을 만들고 확산하는 위치에 있는 주필, 정치평론가, TV 뉴스쇼 제작진 등의 요직에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소수 정예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뉴욕 타임즈(사주인 ‘아서 옥스 설즈버거’가 유대인), 월 스트리트 저널(사주인 ‘앤 드류 스타인’이 유대인)의 경우 대표적인 친(親)유태계 언론이다.
뉴욕타임즈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유태계 칼럼니스트는 닉슨 대통령의 연설집필을 한 적이 있는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phire)와 아브라함 로젠탈(Abraham Rosenthal), 프랭크 리치(Frank Rich)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새파이어의 경우 지난 1993년 12월 이스라엘에 비우호적인 바비 인맨(Bobby R. Inman) 전 CIA 부국장의 국장 임명을 반대하는 내용의 칼럼을 통해 그의 임명을 저지한 일도 있었다.
방송의 경우 윌리엄 페일리(前 CBS 사주), 앤드류 랙(前 NBC 사주, 現 소니뮤직 최고 경영자) 및 레오나드 해리 골덴슨(ABC 사주)등이 유태 언론의 중추로 볼 수 있다. 한편 부시 대통령이 매우 즐겨 읽는다는 보수성향의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Weekly Standard)의 편집인인 윌리엄 크리스톨도 유태인이며, 보수 월간지인 ‘코멘터리’(Commentary)의 전 편집인인 어빙 크리스톨과 노먼 포드호레츠도 유태인이다.
유태계 소유의 메이저 영화사
무려 35년(1960~1995년) 동안 코멘터리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네오콘(Neocon)의 이념을 전파한 노먼 포드호레츠의 경우 리버럴에서 신보수주의 우파로 사상전환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1960~1970년대 민주당 좌파에 몸담았던 수많은 유태인들이 베트남전 패배와 민주당 내 반전*평화주의에 실망한 나머지 노먼 포드호레츠 처럼 공화당의 반공*반소 노선 지지로 전향했다.
한편 할리우드 ‘7대 메이저 영화사’가운데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MGM, 워너 브러더스, 콜롬비아, 유니버설 사는 유태인이 설립한 기업이다. 영화감독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우디 앨런, 워쇼스키 형제 등이 할리우드의 대표적 유태인이다. 영화배우로는 커크 더글러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더스틴 호프만, 로빈 윌리엄스, 해리슨 포드가 유태인이다.
김필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