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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기자의 경제 바로 보기
정부는 한미 FTA를 체결하면 대미 수출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조업 제품의 수입은 별로 늘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일부 공무원들이 자신의 감이나 소신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이에 대해 국책연구소는 이미 2001년 아주 정교한 분석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정부가 좋아하는 이른바 일반균형모형(CGE) 사용해 분석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분석결과를 단 한 번도 공표한 적이 없다. 왜 그럴까?
국책연구소인 대외경제정책연구소(KIEP)의 분석 결과 매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우리가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 자동차, 전기전자 등 우리나라의 주력 상품의 생산량이 모두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지금 정부가 한미 FTA로 큰 이익을 볼 것이라는 수출 산업의 생산이 모두 크게 줄어든다는 게 국책 연구소의 연구 결과였다.
전기전자 제품의 경우에도 생산량 하락폭이 매우 커서 무려 2.94%나 생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미 FTA를 체결할 경우 농업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국책연구소의 같은 보고서에서 농업 생산량이 줄어드는 정도는 4.78%로 추정돼 있다.
즉 가장 타격이 크다는 농업이 4.78% 줄어드는데 그 3분의 2수준으로 전기전자 산업도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황당하지 않은가? 이 분석은 다른 곳도 아니고 정부의 국책연구소가 연구한 결과다. 국책연구소의 실증분석 결과 전기 전자 제품의 생산 역시 크게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국책연구소의 보고서에는 산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기계 장비 산업의 경우 2.55%나 생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추정됐다. 철강의 생산은 3.36%나 줄어든다. 자동차 생산은 0.88% 줄어들고 기타 교통수단은 7.12%나 생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미 FTA 결과 생산이 늘어나는 것은 섬유와 피혁, 의류 산업 뿐이다. 물론 이들 산업의 생산량은 매우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국책연구소의 정밀한 연구 결과 한미 FTA로 섬유 산업만 큰 이익을 보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물론 섬유류 수출을 위해 다른 산업을 희생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일이라면 한미 FTA는 당장 체결해야 한다. 그러나, 정말 우리 국민이나 우리 경제가 원하는 것이 섬유 수출을 위해 전기전자나 기계산업 같은 중요한 산업들을 희생하는 것일까?
이렇게 정부 산하 기관에서 과학적인 분석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정홍보처가 내놓는 논리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현재 미국의 관세는 거의 기껏해야 2,3%대에 불과하다. 즉 우리 수출품에 붙는 관세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전기전자제품의 경우 ITA 협정 덕분에 대부분 품목의 세율이 0%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미국에 대해 8~1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즉 우리 쪽에서는 미국에 높은 관세를 물리고 있는 반면 미국의 관세는 매우 낮은 편이다. 이 때문에 국책연구소조차 주요 수출 품목에서 수출 증대효과보다 수입 증대 효과가 더 큰 것으로 분석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우리 국정홍보처는 미국의 시장이 13배 크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세율이 똑같이 1%인하되도 미국 시장이 13배나 크기 때문에 우리가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황당한 주장이다. 아마 국정홍보처에는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닐까?
경제학에는 탄력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시장이 크다고 무조건 13배나 더 큰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더구나 2001년 대부분 주요 수출 품목의 생산이 크게 줄어든다는 과학적인 실증 분석을 해놓고도 이를 애써 무시하고 시장 크기만을 운운하고 있는 것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FTA를 추진하고 있는 정부 관료들은 자신이 용역을 줘서 만들어진 연구 보고서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애써 무시하는 것인가?
물론 정부는 이 연구보고서를 옛 자료라고 무시해 버릴지도 모른다. 2001년에 만들어진 자료인 만큼 현실은 다르다고 억지를 부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이 같은 연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FTA를 추진하는 정부 관료야 말로 자신들의 장밋빛 청사진을 증명할 만한 구체적인 연구 보고서를 먼저 만들고 국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소수 고위 관료들만의 소신으로 조국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소신이나 ‘감’은 틀릴 위험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의 유일한 국책연구소의 실증분석을 무시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FTA를 추진하는 일부 고위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면 CGE 모형을 믿으라고 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CGE모형을 통한 과학적인 분석을 무시하는 것인가? 과학적인 분석보다 자신들의 감이 더 정확하다고 믿는 것인가?
경제학 교과서 앞부분에 보면 자유무역은 좋은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 가정하에서만 성립하는 얘기다. 경제학 교과서 뒷부분에 가면 자유무역이나 FTA에 따른 부작용과 문제점들이 많이 나와 있다. FTA에 대한 국책연구소의 과학적인 실증분석을 무시하고 한미 FTA를 맹신하는 경제 관료들에게 경제학 교과서의 뒷부분도 읽어보기를 충고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얘기가 있다. 치열한 국제 경쟁 사회에서 선무당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FTA는 상황에 따라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FTA를 추진하는 구체적인 전략이다.
누구와 언제 어떤 순서로 FTA를 체결하느냐에 따라 FTA는 한국 경제를 살리는 명약이 될 수도 있고 경제의 미래를 앗아가는 맹독이 될 수도 있다. 지금처럼 무조건 FTA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은 경제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