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설화 및 역사] ….김씨(가락, 신라) 이야기…

  • #101201
    sd.seoul 66.***.118.78 8552


    짤방은 흉노족와 싸우기 위해 출정하는 한족 “뮬란”입니다.

    그저께 kbsworld에서 방송한 <역사추적>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본 후 적어봅니다.
    전문가의 눈이 아니고, 키보드워리어가 삼사일 인터넷을 뒤져서 쓰는 글임을 미리
    감안하시고 제 글을 읽으셔야 합니다. (틀린 부분이 많을 거라는 이야기이지요)
    _________________

    1. (설화에 의한) 김씨의 한반도 출현.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한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단일성씨는
    남한인의 약 10% (4백10만/4천6백만)를 차지하는 가락김씨(김해김씨)입니다.
    그리고 신라김씨 (경주김씨) 는 남한에서 네번째로 많으며 약 4% (1백7십만)를 차지합니다.
    http://www.surname.info/surname_bon.html

    설화에 따르면 가락김씨는 42 CE 에 황금알에서 나온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며,
    아내인 허황후의 성을 따르는 허씨와 인천이씨도 같은 혈족으로 하나의 종친회를 구성합니다.
    한편, 신라김씨는 60 CE 에 황금궤에서 나온 김알지를 시조로 합니다.
    두 김씨가 모두 금으로 된 알과 궤에서 나왔군요.

    김해김씨의 가락국은 562 년에 마지막 왕인 구형왕때에 신라의 진흥왕에 병합되며,
    그 후 구형왕의 증손자인 가락김씨 김유신은,
    신라김씨인 김춘추(태종무열왕) 와 혈연관계를 맺습니다.
    김유신의 여동생이 김춘추의 아내가 되어 문무왕을 낳고,
    김춘추의 딸이 김유신의 아내가 됩니다.

    문무왕은 660년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키고, 676년 당나라를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이룹니다.
    그 후 가락김씨와 신라김씨의 직계후손은 8대를 통해 120년간 신라를 다스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

    2. 한국고대사korean history.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31) 에 따르면,
    처음으로 한민족이 세운 국가는 조선Joseon 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Samjoseon

    조선은 삼위일체사상을 기반으로 탄생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조선은 하나의 나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진한, 번한, 그리고 마한으로 나뉘어져 통치되었고,
    그중에 으뜸은 진한이었습니다.
    이들 진한/번한/마한은 후대에 이르러, 진한의 힘이 약해지자
    각자의 왕국으로 발전하게 되며,
    각각 진조선/번조선/마조선 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삼한체제를 우리의 시조로 보는 시각은
    훗날 고종황제에 의해 삼한을 아우르는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1) 진한 (2333 BCE – 239 BCE)
    진한은 현재의 하얼빈harbin 근처에 그 수도가 있었으며, 단군이 직접 통치했고,
    그후 진한은 “해모수”에 의해 부여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진한시대를 마감합니다.

    (1.2) 해모수解慕漱의부여(239 BCE – 494 CE) 와 (북)부여 (239 BCE – 36 BCE).
    해모수는 (북)부여를 239 BCE 에 창건하였고,
    그의 4대 후손인 고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하여,
    37 BCE에 졸본을 도읍으로 하는 고구려를 창건합니다.
    한평, 부여는 계속 존재하여 494 CE까지 이어집니다.

    (1.3) 소서노의 백제 건국 (18 BCE).
    소서노는 고주몽의 장자인 유리명왕이 나타나자,
    이전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18 BCE 에 백제를 건국합니다.

    (1.4) 고구려-백제
    부여夫餘(239 BCE-)의 시조인 해모수는 성으로써 해(解)를 사용했으며,
    고구려高句麗(37 BCE-)의 시조인 고주몽은 원래 성인 해(解)에서 고(高)씨로 바꿉니다.
    백제百濟(18 BCE-)의 시조인 온조왕은 원래 성(姓)인 해(解)에서 후에 부여(扶餘)로 바꿉니다.

    (2) 번한 (2333 BCE – 108 BCE) / 마한 (2333 BCE – ?)
    번한은 서쪽에, 마한은 남쪽에 위치했으며
    두 부vice-단군이 각각 통치했습니다.

    서쪽에 위치한 번한은 최초의 부-단군으로서 치두남(치우천황의 후손)을 두었었고,
    위치가 중국과 맞닿아 있어서 왕래가 빈번했으며, 중국 역사책에 자주 기록이 되었고,
    한족과의 빈번한 군사적 마찰을 가집니다.
    323 BCE 에 번한(번조선) 은 중국의 “기자” 후손인 “기후”가 부-단군이 되어
    기자조선이라는 말로서 알려지게 되었고,
    194 BCE 에는 위만이라는 흉노복장과 상투를 튼 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피난가던 도중에 기자조선을 정복하고 그곳의 왕이 되어
    기자조산은 위만조선으로 바뀌고,
    108 BCE 에 한무제에게 망하기 전까지 다스립니다.
    The Shi-ji [사기] records that a Yan by the name of [Wei] Man [위만] became the king of Chosun
    sometime during 209-195 BC. The Ye section of Dongyi-zhuan [동이전] states that Wei-Man came
    “with a topknot wearing barbarian clothes.” The Han section states that this
    Yan person did wear Xiong-nu [흉노족] or Xianbei [선비족]clothes,
    suggesting the Mongolic Xianbei nature of the Yan.
    http://www.upkorea.net/news/photo/5263-2-4935.pdf

    한편, 위만에게 당한 기자조선의 마지막 부-단군은 한반도로 내려와 그곳에 위치한 삼한 중의 하나인 마한(마조선) 을 정복하고 (후) 마한을 세우고, 후에 백제에 흡수될 때까지 존재합니다.

    (3) 가락(駕洛) (42 CE – )
    삼국유사에 의하면, 6개의 알이 깨어서, 5개의 가야와 하나의 가락국(금관가야)이 되었고,
    가락국은 김수로왕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가락국(금관가야, 본가야)은 42 CE 김수로왕부터에서 532 CE 구형왕까지 존재하며,
    다른 5가야 중의 하나인 대가야는 42 CE 에서 562 CE 까지 존재합니다.

    이들은 외부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한반도로 이주해온 이들로 추정됩니다.

    (4) 신라(新羅) (57 BCE – 935 CE)
    신라의 시조는 자줏빛의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입니다.
    박씨가 지배하던 신라에, 해解씨성을 쓰는 이가 북쪽(~산동성, 고구려의 후예?)에서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 등장합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탈해는 본시 다파나국의 출생으로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 1천 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열도의 “동북 1천 리”는 태평양으로 그곳에는 나라는커녕 육지조차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때의‘왜국’을 ≪산해경≫이 말한 산동 랑야로 보면, “왜국의 동북 1천 리였다”고 한 탈해의 고향은 산동성 동북방 해안지역에 엇비슷이 해당하게 됩니다.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J&qnum=5365751

    먼저 이 해解씨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에 찾아가서, 왕위를 뺏으려하나
    시합에 져서 쫓겨나고, 경주쪽에 발판을 마련합니다.
    경주에서 그는 해解씨성을 벗어던지고 (탈해脫解), 까치의 석昔을 새로운 성씨로 써서,
    “석탈해昔脫解”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됩니다.
    http://www.k-special.com/go2/10-4.htm

    한편, 이무렵의 경주는 상당한 혼란의 시기입니다.
    “혁거세는 재위 62년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그 나뉘어진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삼국유사)
    즉 박혁거세가 죽자,
    그 자체 세력들은 뿔뿌리 흩어졌고(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외부세력(커다란 뱀)이 나타나 신라를 간섭합니다.
    이러한 때에 박혁거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입니다.

    차차웅은 무당이라는 뜻이고 (삼국사기, 김대문),
    남해南解는 남쪽의 해解씨라는 뜻이니,
    아마도 큰 뱀은 고구려의 해解씨의 간섭을 의미하고,
    그로 인해 해씨에 우호적인,
    남해차차웅이 권력을 잡게 된것이 아니가도 생각됩니다.
    또한 남해차차웅은, (가락국을 정복하려 내려 왔으나 실패한) 고구려가 보낸 석탈해를 사위로 삼음으로써 해씨와의 관계를 탄탄히 하려 합니다.

    하지만, 석탈해는 (박씨 보다는) 그 즈음 경주에 터를 잡고 있던
    신라김씨와 손을 잡음으로써 (금궤안의 김알지를 발견한 이가 석탈해)
    신라의 왕권을 박씨에서 석씨로 바꿉니다.
    (탈해脫解 에서 보이듯이 석탈해는 해解씨에게 반감을 가진 듯?)

    그러나 석씨의 왕권은 얼마가지 못하고,
    김알지의 6대 후손인 미추에 이르러 신라김씨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내물왕 이후의 신라는 신라김씨 독재체체로 굳혀집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흉노(Xiong-nu).

    (1)
    흉노는 약 300 BCE 경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며, 동쪽으로는 부여와 고조선을,
    남으로는 진나라(221 BCE – 206 BCE)/한나라(206 BCE – 220 CE) 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한편 흉노는 4세기 CE 경 유럽으로 이동하며 닥치는 대로 정복해나가며 훈족Huns 라고 알려집니다.

    흉노는 121 BCE 경에 이루어진 한나라 Emperor Wu(무황제)가 보낸 Huo Qubing (?去病)의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Xinjian 에서 두 왕이 포로로 잡히게 되고,
    그 중에 한 왕인 Xiutu (休屠王)은 항복을 거부하다가 죽고,
    그의 아내와 두 아들 (Midi 와 Lun) 은 한무제의 노예로 끌려갑니다.


    [마답흉노석상(馬踏凶奴石像)]흉노를 짖밟고 있는 Huo Qubing 의 말.


    Huo Qubing 이 Xiutu(휴도왕)의 자식을 포로로 잡은 Xinjian.

    (2)
    Xiutu의 두 자식중의 Midi는 나중에 한무제의 마음에 들게되고,
    한무제는 친히 “김”씨를 하사하게 되고, 그는 김일제(金日?, Jin Midi) 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됩니다.
    김일제는 86 BCE 에 죽기 전날 “투후”라는 직책을 받게되고 한무제의 묘옆에 묻힙니다.
    http://en.wikipedia.org/wiki/Kim_Iljae


    김일제의 상. 뒤로 Huo Qubing이 타고 다닌 말이 제비를 밟고 있는
    [마답 비연(馬踏飛燕)]이 보입니다.


    김일제의 묘가 있는 우웨이.

    (3)
    김일제의 후손들은 한나라에서 높은 정치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김일제 – 건建, 김일제의 1대손 – 당當, 김일제의 3대손 – 성星, 김일제의 4대손 (마지막 투후)

    왕망(김당의 이모부)의 Xin Dynasty 시대(9 CE – 23 CE) 까지 좋은 세월을 보낸 것으로 보이나,
    왕망 후의 기록은 없는 것 같습니다.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Kim_Alji#Origin_of_Kim_Alji_in_Han_chin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비문에 나타나는 기록들.

    (1) 문무대왕릉 비문
    http://home.megapass.co.kr/~hsg1000/zz161.htm
    ?侯祭天之胤傳七葉(투후 의 7대 후손)
    十五代祖星漢王(15대조 성한왕)

    즉, 성한왕은 “투후”로부터 7번째 후손이며,
    문무왕은 “성한왕”의 15대 후손이다….

    (2) 광조사 진철대사비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3094
    …스님의 법위(法諱)는 이엄(利嚴)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의 선조는 계림(鷄林)사람이었다.
    스님의 모국(母國)과 조상을 상고해 보니 본래 성한(星漢)의 후손이었으나,

    즉, 신라김씨의 조상은 “성한”이라고 합니다.

    (3) 흥덕왕릉비문
    http://www.emuseum.go.kr/pages/portal/search/full.jsp?dbNoArr=3&docNo=00134182
    신라의 김씨 왕조가 성한(星漢)을 그들의 시조로 모셨음을 비편에 새겨진
    태조 성한(太祖星漢)이라는 비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흥덕왕은 성한왕의 24대손에 해당한다고 쓰여있습니다.

    (4) 신라의 족보.
    김알지 65 CE – 금궤에서 발견됨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 이사금 Michu 262-284 (김알지의 6번째 후손)
    내물 이사금/마립간 Naemul 356-402 (미추의 조카, 김알지의 7번째 후손)
    눌지 마립간 Nulji 417-458 (김알지의 8번째 후손)
    자비 마립간 Jabi 458-479 (김알지의 9번째 후손)
    지증왕 Jijeung 500-514 (김알지의 10번째 후손)
    법흥왕 Beopheung 514-540 (김알지의 11번째 후손)
    진흥왕 Jinheung 540-576 (김알지의 12번째 후손)
    진지왕 Jinji 576-579 (김알지의 13번째 후손)
    진평왕 Jinpyeong 579-632 (김알지의 14번째 후손)
    선덕여왕 Seondeok 632-647 (김알지의 15번째 후손)
    진덕영왕 Jindeok 647-654 (김알지의 15번째 후손)

    무열왕 Muyeol 654-661 (진지왕의 손자, 김알지의 15번째 후손)
    문무왕 Munmu 661-681 (무열왕의 아들, 김알지의 16번째 후손)
    신문왕 Sinmun 681-691 (문무왕의 아들, 김알지의 17번째 후손)
    효소왕 Hyoso 692-702 (신문왕의 아들, 김알지의 18번째 후손))
    성덕대왕 Seongdeok 702-737 (효소의 형제, 김알지의 18번째 후손)
    효성 Hyoseong 737-742 (성덕대왕 아들, 김알지의 19번째 후손)
    경덕 Gyeongdeok 742-765 (효성와의 형제, 김알지의 19번째 후손)
    혜공 Hyegong 765-780 (경덕왕의 아들, 김알지의 20번째 후손)
    ……….(혜공왕까지가 무열왕의 직계 = 신라김씨 + 김해김씨)…..

    선덕 Seondeok 780-785 (내물이사금의 11번째 후손, 김알지의 18번째 후손)
    원성 Wonseong 785-798 (내물이사금의 12번째 후손, 김알지의 19번째 후손)
    소성 Soseong 798-800 (원성왕의 손자, 김알지의 21번째 후손)
    헌덕 Heondeok 809-826 (소성왕의 형제, 김알지의 21번째 후손)
    흥덕 Heungdeok 826-836 (헌덕왕의 형제, 김알지의 21번째 후손)
    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종합해보면,
    삼조선-부여-고구려-백제는 단군을 시조로하는 解씨가 세운 나라입니다.
    또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2대왕인 남해南解차차웅은 고구려와 친하게 지냈고, 탈해脫解를 받아줍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가락국의 가락김씨 김수로왕과,
    신라의 신라김씨 김알지는 알에서 태어낳으며,
    그 시조가 숨겨져있습니다.

    kbs의 <역사추적>은 가락김씨와 신라김씨는 기마민족인 흉노의 후예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던져 주었으며,
    그 증거로 문무왕비문을 보여줍니다.
    즉, 문무왕은 성한왕의 15대 후손이며,
    성한왕은 김알지를 이르며,
    김알지는 투후로부터 7번째 후손이고,
    투후는 흉노인인 김일제를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가락김씨인 김수로왕은 김일제의 형제인 룬Lun(倫)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던집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7. 문제점,
    (1) 김성金星이 성한왕星漢王이고 또 김알지?
    김성은 투후의 (7대손이 아니고) 5대손이다.

    (2) 흥덕왕은 성한왕의 24대손?
    흥덕왕은 김알지의 (24대손이 아니고), 21대손이다.

    (3) 김씨는 중국에서도 김알지가 최초는 아니다.
    즉, 한무제의 기록을 보면, 한무제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김씨와 결혼한 걸로 나옵니다.
    Emperor Wu (漢武帝) was the tenth child of Emperor Jing, and was born to one of Emperor Jing’s favorite concubines, Consort Wang Zhi in 156 BC. His mother had initially been married once, to a commoner called Jin Wangsun (金王孫) and had a daughter from that marriage.
    http://en.wikipedia.org/wiki/Emperor_Wu_of_Ha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8. 마치며,
    며칠간동안, 수박겉ㅎㅏㅀ기 식이나마 한국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게 되어 재미있었습니다.

    신라 김씨에 관한 연구 및 발표는 kbs가 처음은 아니네요.
    이미 1999년에 신동아에서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신동아>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8/nd99080420.html
    ________________________

    9. 조갑제.
    글을 search 해가며 읽다가 보니,
    굴러굴러 조갑제의 글까지 갔습니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해 놓은 문단이 많이 보이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소개합니다.
    글쓰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말 잘하네요.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493&C_CC=BE
    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 김金수로왕의 아내이자, 허許씨의 시조가 되는 허황옥許黃玉.

    (10.1)
    한(Han Dynasty)나라 족보 (206 BCE – 220 CE).
    http://en.wikipedia.org/wiki/Han_dynasty

    한나라는 유방劉邦 (유방과 항우로 유명한)에 의해 206 CE 에 성립됩니다.
    한무제(Emperor Wu)는 7대황제이며 Huo Qubing을 보내 흉노를 제압합니다.
    한무제를 이을 왕세자였던 Liu Ju 가 자살함으로써,
    한무제는 죽기전에, 6살의 Liu Fuling 을 왕세자로 만들고, 섭정(regent)을 할 사람으로 (Huo Qubing 의 형제인) Huo Guang霍光을 선택합니다.
    Huo Guang은 그자리에서 김일제(Jin Midi) 와 또다른 장군인 Shangguang Jie 또한 함께 섭정의 계급을 하사하도록 추천하여 허락을 받습니다.
    Liu Fuling 은 한나라의 8대 황제(한소제, 漢昭帝, Emperor Zhao)가 되어 13년을 다스리고 주ㄱ습니다.
    한소제는 아들이 없이 주ㄱ었으므로, Huo Guang 은 Liu Ju의 손자인 Liu Bingyi 를 황제로 추천하고,
    Liu Bingyi 는 9번째 황제인 한선제漢宣帝, Emperor Xuan, 가 됩니다.
    http://en.wikipedia.org/wiki/Emperor_Xuan_of_Han

    한선제(91 BCE – 49 BCE) 는 황제가 되기 오르기 전에 결혼을 했는데,
    바로 허許씨인, 허황후(許皇后, Empress Xu)입니다.
    허황후가 낳은 아들은 그 후 한선제를 뒤를 이은
    한원제Han Yuandi (漢元帝)가 되어 한나라를 통치합니다.
    http://en.wikipedia.org/wiki/Empress_Xu_Pingjun

    (10.2)
    즉, 허씨 집안은 황제의 외손집안이 되어서,
    적어도 왕망의 Xin Dynasty (9 CE–23 CE) 까지는 잘 살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시기에 높은 관직에 있던 김알제(Jin Midi)의 김씨집안과, 황제의 외가인 허씨집안은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왕망의 Xin Dynasty 가 망한 후, 곤란한 처지에 있던 김씨집안과 허씨집안이 동반 탈출을 하여, 한반도의 가락국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가락김씨와 허씨의 시조인, 김수로왕(42 CE)과 허황옥(48 CE)의 설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http://www.heo.or.kr/jariosil/jario-goseo/jario-garakgukgy-haeseok.htm

    (10.3) 참고..
    삼국사기에 쓰여진 허황옥에서 황은 黃입니다.
    그러나, 옛날 한자에는 ‘黃’과 ‘皇’은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

    … 따라서 황조黃鳥를 황조皇鳥와 같은 의미로 씌여진 것이다. ‘黃帝’라는 말은 ‘皇帝’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3199&logId=2869807

    • 한국인 71.***.202.84

      요즘 같은 때는 역사책 한 줄이라도 더 읽는게 정체성 뿐 아니라 자주성도 확인하고 국난 대책에도 좋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과학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좋은 소견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DC 72.***.88.170

      sd.seoul님,

      정말 흥미진진한 글입니다.
      적절히 그림도 사용하셔서 보기 좋네요.
      인터넷 매체의 특성을 잘 활용하시는 듯..

      “”혁거세는 재위 62년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그 나뉘어진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삼국유사)

      즉 박혁거세가 죽자, 그 자체 세력이 흩어지고(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외부세력(커다란 뱀)이 신라를 간섭합니다.
      박혁거세의 뒤를 이은 이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입니다.
      차차웅은 무당이라는 뜻이고 (삼국사기, 김대문),
      남해南解는 남쪽의 해解씨라는 뜻이니,
      아마도 큰 뱀은 고구려의 해解씨가 보낸 것이 아니가도 생각됩니다.”

      – 이 부분에서, 신화와 그 해석이 자못 흥미로왔습니다. 참 그럴 듯합니다. 학설중 하나인가요?

      신화라는게 실제있었던 역사적 변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니벨룽겐의 이야기” 같은 설화(소설화되기전)를 보면 실제 있었던 훈족 (Huns)의 침입이 배경으로 되고 거기에 요정 같은 신화적 요소가 등장하지요. (같은 맥락으로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상황도 실제 있었던 유대민족사의 비극적 상황 (필레스테 인들의 침입?)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듯이)

      훈족이 흉노족의 일파였다는 것은 상당히 유력한 학설이라지요. 고대기록을 보면 훈족의 족장 아틸라와 그 일파 외모를 묘사한게 있는데, asian의 특징을 갖추었다고. 코커시안의 주류인 germanic tribes가 asian에게 유린을 당했다는게 못마땅했는지 인정에 소극적이라고는 하지만. Hungary가 Huns가 나중에 정착한 지역에서 이름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김춘추가 김유신의 사돈이자 장인이 되는 것 같은데,
      김유신 여동생이 후처로 들어갔나요?
      (언니가 산위에서 쉬야하는 꿈 꾼거 사서 시집갔다는게 이건지..)

      그리고,

      왜 하필 김/허/이씨 이야기로 출발하셨을까..
      생각하다가 혹시 본명이 그 성씨가 아니신가 하고 조심스레 추측을…

      저는 이런 글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sd.seoul 66.***.118.78

      한국인/님
      DC/님

      긴 글인데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재미있었다니 저도 기쁨니다.
      ~~~~굽신굽신~~~

    • PEs 75.***.153.163

      좋은 글입니다. 자신의 분야와는 전혀 다른 분야인데도 정성을 들이셔서, 역사를 느끼게 되네요.
      저도 요즘 역사에 점점 빠져 들어가는데 흥미있고 의미있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즐거운 연휴 되세요.

    • sd.seoul 66.***.118.78

      PEs/님도
      좋은 연휴(벌써 연말 인사를 드려야하는군요) 보내시길 바랍니다.

    • dj 72.***.250.228

      재미는 있는데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는 글이군요. 역사는 우기는 자의 것이라고 했나요? 하지만 추측이 너무 들어가면 오히려 자신의 역사와 조사에 대한 모독이 된다는게 제 지론입니다. 옛사람이 살아돌아와서 자신의 얘기가 희한하게 바뀌어 있으면 웃겠죠? ㅋㅋㅋ 하며…

      이병도가 지탄을 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문서에 의존한 역사학이죠. 당근 일본은 땅파봤자 하나도 안나오는 나라이고, 그러니 근거 희박해도 문서에 씌여있으면 고대의 만화책 내용도 사실로 몰고 가는 나라죠. 이병도가 그걸 한국에서 재현해 낸거구요. 한단고기의 추종자들도 문서만 (중국의 25사/27사) 파해친다는 성향에서는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른 입장이 같은 방법론을 택하냐구요? 그래서 역사는 때거지로 우기면 만들어 지는 것이죠.)

      가끔 선데이님의 글을 읽으면 좋은 점도 많은데 꼭 이렇게 잘 모르시는 것에 까지 열정을 두며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가 하는 의문점을 갖게됩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카더라 통신, 추측에 꼬리를 문 또 다른 추측… 이거 잘 되가는 건지 갑갑하기도 하구요.

      아는 얘기만, 논리있게 씁시다… 요…

      꼬리: 흉노가 훈족과 관련있다는 것도 썰입니다. 이론일 뿐이여요. 증거 절대 안나옵니다.
      신화는 특히 문서로 남겨진 설화는 추측을 가능하게하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나오기전에는 신화일 뿐입니다. 그이상도 그이하도 모두 썰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