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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news_read.php?oldid=2004032400001437122)
한국도 곧 인도한테 경제면에서 곧 뒤질 것이 뻔할것 같네요.요새 한국 이공계
돌아가는 것 보면….
“인더스 문명이여, 부활하라!” 인도 IT 전사들 ‘사이버 총진군’
[속보, IT, 주간지] 2004년 03월 24일 (수) 18:43
"임금 싸고 기술 좋고 영어 우수" 미국 시장 장악…
‘실리콘밸리 네트워크’ 구축해 창업 지원
‘선 마이크로시스템 창업’코슬라,’TIE설립 레크히 등 거물들
"인도 기술력 키우자" 총력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라는 14살 인도 소년은 한 잡지에서 반도체회사 인텔의 탄생 기사를 읽고 자신도 이런 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다. 인텔 창업자 밥 노이스, 고든 무어와 맞먹는 야망을 가진 소년이 인도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은 인도공과대학(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도공대를 나온 그는 1976년 21살에 카네기멜론대학원 입학허가서 한 장을 달랑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2년 후 다시 서부로 가 스탠퍼드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 자신의 원대한 플랜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MBA(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뒤 200곳이 넘는 곳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우연히 그는 스탠퍼드 대학원생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안드레아 벡톨샤임이 동네 가게를 돌며 구한 부품으로 만든 워크스테이션 컴퓨터를 보게 된다. 남들이 그 기계의 파워에 감탄할 때 코슬라는 그 박스의 상업성에 주목했다.
코슬라는 클래스메이트인 스콧 맥닐리와 버클리대학원생 빌 조이를 끌어들여 벡톨샤임과 함께 1982년, 나중에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기업 중의 하나가 되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을 설립한다. 네 사람 모두 27세였다. 당연히 코슬라가 CEO가 되었다.
최근 부시 대통령의 경제자문회의 의장인 그레고리 맨큐가 “아웃소싱은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발언이 큰 파장을 일으키면서 미국인은 물론 세계의 시선이 인도와 인도인에게 모아지고 있다. 미국의 아웃소싱 일감을 가져가는 나라가 주로 인도이기 때문이다.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인도에 R&D(연구ㆍ개발) 센터를 갖지 않은 기업을 찾기 힘들다고 한다.
자기가 만든 회사서 2년 만에 쫓겨나
그러나 IT만이 아니다. 그 영역이 콜센터에서 금융자료 분석까지 서비스 부문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협력이 가능하게 미국과 인도의 연결고리를 만든 사람들이 바로 코슬라 같은 미국의 인도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그들이 걸어온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코슬라라는 한 인물의 인생역정에서 그 정도를 엿보게 된다.
창업자들의 저돌적인 승부정신으로 선 ‘마이크로시스템’은 당시 시장의 선두주자를 쓰러뜨리면서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코슬라는 돌연 낙마한다. 그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것인지 코슬라는 이사회에서 축출당하는 것이다. 인텔과 맞먹는 기업을 세우겠다며 야심만만했던 인도 청년이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2년도 안돼 쫓겨나야 하는 심정이 상상된다.
그는 포도밭을 가꾸거나 여행을 하면서 울분을 삭혀야 하는 나날을 보냈다. 운명의 장난인가. 이사회에서 자신을 쫓아내는 데 앞장선 벤처투자가 존 도어가 벤처투자사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일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초기 투자는 어느 것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 중 3건은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가장 참담한 실패로 기록될 정도다.
하늘에서의 독서와 생각은 그를 새롭게 눈뜨게 했다. 아직 인터넷이 불붙기 전인 1990년대 초에 그는 그 잠재적 폭발력을 감지했다. 다른 벤처투자가들이 쌍방향TV 같은 곳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그는 인터넷 교통량이 곧 폭증할 것이며 광대역(廣帶域)에 대한 거대한 수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존 전화회사의 네트워크를 갖고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에 대한
솔루션을 갖고 있는 회사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17년 만에 성공한 화려한 재기
바로 그 때 제록스 연구소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던 인도인 프라딥 신두가 그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당시 팔리고 있던 시스코 시스템사의 라우터(네트워크의 데이터를 교통정리해주는 장치)보다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정교한 알고리즘이 들려 있었다. 코슬라는 이렇게 제안했다. 기업 내부의 네트워크에 사용되는 단순한 라우터 대신 ‘인터넷 라우터’를 개발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이 가고 있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27만5000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 줬다. 주니퍼 네트웍스, 네트워크 장비업계의 다크호스라고 불리는 이 인도인 기업은 이렇게 탄생했다.
1999년 8월 26일 코슬라는 ‘실리콘밸리의 왕’으로 되돌아온다. 그날 세런트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신생회사가 시스코 시스템사에 무려 80억달러에 팔렸다. 광네트워크 장비를 만드는 총수입이 5000만달러도 안 되는 이 회사가 그런 거금에 팔리자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이 거래에서 진짜 웃은 사람은 코슬라이다. 그가 물을 주면서 키운 회사이기 때문이다. 3년 전 가능성을 보고 800만달러를 투자해 이 회사의 지분 30%를 획득했다. 이 돈이 하루아침에 24억달러로 불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그가 투자한 인터넷회사 익사이트는 67억달러에, 시아라 시스템스는 43억달러에 팔렸다. 코슬라는 수백만달러를 수십억달러로 만드는 경이적인 기록행진을 계속했다. 또 그가 미국에 사는 20여년 동안 그가 탄생을 도운 회사들을 일자리로 환산하면 하루에 여섯 개 꼴로 만든 셈이다. 어느 잡지는 그런 그에게 ‘실리콘밸리의 왕’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다.
핸디캡 극복하고 인생 개척 성공
인도공대를 나온 후 미국에 와 처음 11년 동안은 대기업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그가 이젠 책임자급의 일을 달라고 요청하면 ‘당신은 유능한 기술자이다. 우리는 그런 당신의 능력을 사장시킬 수 없다’는 입에 발린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승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레크히는 1982년 인도인 친구 둘과 함께 네트워크 장비를 만드는 회사를 세우기로 하고 벤처캐피털회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당신 회사에는 비즈니스맨이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인도인은 기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경영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편견이 널리 퍼져 있을 때이다. 몇 번 문전박대당한 뒤 그들은 돈 빌리는 것을 포기했다.
세 번째는 자신이 만든 회사를 노벨사에 팔고 그곳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있을 때이다. 그는 CEO가 시장에서 다 죽어가는 PC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12억달러나 주고 사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가 물러나자 레크히는 진심으로 그 자리를 원했다. 이사회도 잠시 그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HP에서 온 사람을 낙점했다.
노벨의 주가는 추락하고 새 CEO 아래서 허우적거리는 회사를 지켜보다 레크히는 짐을 싼다. 퇴사한 후 그는 인도인들의 창업을 돕는 일에 앞장선다. 그들의 아이디어를 듣고 가능성 여부를 판정해 주고 필요한 사람과 연결시켜 줬다. 그는 미국에서 수많은 인도인 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레크히가 7명의 다른 인도인 기업가와 1992년 TiE(The Indus Entrepreneurs)를 만들기 전까지는 실리콘밸리엔 내세울 만한 인도인 네트워크가 없었으나 지금은 미국 이민사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들은 서로 투자해 주고 서로 이사회에 참여하며 서로 요직을 나눠 갖는다. 인도인이 설립했거나 경영하는 회사는
적어도 972개나 된다고 한다(2000년 조사). 바로 이들이 지금 핫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과 인도의 아웃소싱 관계 모델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인도 본토에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임금은 싸면서 기술력은 세계 일류인 인력이 넘쳐난다. 인도공대를 나온 일급 엔지니어가 연봉 1만달러를 받는다. 미국 엔지니어 초임의 5분의 1 수준이다. 미국의 IT 기업들이 인도에 자회사를 두고 일을 나눠 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다.
실리콘밸리에서 낮 동안 한 일을 퇴근하면서 광대역 네트워크를 통해 넘겨주면 인도에선 실리콘밸리가 잠들어 있을 때 그 일을 받아 수행한 뒤 다시 넘겨준다. 경비절감의 차원을 넘어서 기술 혁신의 속도를 높이고 회사 성장전략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서비스요금 내리는 데 기여할 것”
미국이 지금까지 지배해 오던 기술혁신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의 입장은 다르다. GE캐피털은 700가지 업무를 인도 자회사에 넘김으로써 매년 3억4000달러를 절감한다고 한다.
그 결과 서비스 비용을 크게 내릴 수 있게 됐다. 글로벌 경쟁을 벌이는 기업들이 이런 이점을 외면할 리가 없다. 지금 중국이 미국 백화점이나 월마트에 진열된 제품 가격을 내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면 앞으로 인도는 미국의 서비스 요금을 내리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컨설팅회사 A.T.커니는 2008년까지 미국의 금융서비스 부문의 일자리 50만개가 해외로 옮겨갈 것이라고 추정한다. 미국 정부는 회계에서 우편 서비스 일까지 인도에 일감을 많이 넘기고 있다. 다음 아웃소싱 분야는 자동차 엔지니어링과 제약연구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인도와 수백만 명의 일급 인력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방법으로 미국의 신경제에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9700㎞를 사이에 두고 이런 협업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신경제가 높이 날 때 미국인들이 개발한 인터넷 기술 때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아웃소싱에 힘입어 인도는 2008년까지 수출이 연간 570억달러로 5배 늘어나고 일자리 400만개가 거기서 나올 것이라고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내다봤다. 이런 성장은 최고의 인재들을 국내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다.
지금도 인도의 아웃소싱과 관련된 기업들은 엄청난 속도로 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인도 최고의 IT기업인 위프로(Wipro)는 지난해 매달 1000명 꼴로 사람을 증원했다고 한다. 또 오피스타이거(OfficeTiger)라는 비즈니스 업무 아웃소싱회사는 지난해 600명에서 1500명으로 사람을 늘렸다.
매달 1000명 꼴로 사람 늘려
한국의 환경이 우리 공학두뇌들을 의대 편입이나 고시 같은 곳에 기웃거리도록 내몰고 있을 때 인도의 공학두뇌들은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기술력을 갈고 닦는 데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5년 후, 10년 후 그 격차가 얼마나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인도 기업인의 대부 레크히는 인도에 갈 때마다 수상과 각료들을 만나 경제 개혁에 대해 역설했다. 인도 정부가 미국 스타일의 벤처 캐피털을 육성해 인도를 창업천국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그의 인도 프로젝트 중의 하나는 모교인 인도공과대학을 위해 기금을 모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레크히는 ‘포춘’지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돈도 있고 시간도 있다. 나는 조국 인도를 바꾸고 싶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인도가 무섭게 바뀌고 있다.
이종천 IT칼럼니스트(jclee17@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