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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2030’ 빈털터리 세대
“오라는 데는 없고 쓸 데는 많고… 모르겠다, 일단 긁어!”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 일러스트레이션·박초희 기자
● ‘청년실업 대란’ 이끈 ‘고용 없는 성장’
● ‘취업 5종 세트’에 ‘능력있는 부모’ 더하면 최상의 ‘스펙’
● 학비 대출, 어학연수…대학 문 나서기 전 채무자 신세
● 광고로 문화적 정서 습득한 세대…“사고픈 게 너무 많아”
● “뉴욕서 먹던 크리스피크림 도넛 맛을 어떻게 잊어?”
● “삼성전자 다녀도 내 집 못 사요”프랑스에서 출간된 ‘프로실업자’ 자서전 ‘나는 24년간 배부른 백수’ 표지 이미지와 일러스트.
1998년 국내 중견기업 이사직을 끝으로 명예퇴직한 박모(59)씨는 올초 셋째딸(26)로부터 각서 한 장을 받았다. 내용인즉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최소 5년은 직장생활을 하겠다”는 것.
“대학 마칠 때까지 등록금에 용돈까지 대주고 동남아 영어연수도 보내줬는데, 취업한 지 겨우 2년 만에 불쑥 외국으로 떠난다니 선선히 보내줄 수 없죠. 실컷 돈 들여 공부하고 돌아와 곧장 시집가겠다고 하면 우리집 기둥뿌리 뽑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붕마저 내려앉을 테니까요.”
박씨는 딸 넷을 뒀다. 맏이가 대학생이고 나머지 셋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명예퇴직해 의류소매업으로 네 딸을 어렵게 공부시켰다. 지난해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마침내 무거운 짐을 좀 더나 싶었다. 그런데 졸업 직후 결혼한 맏이를 제외하곤 세 딸 모두 사실상 그의 울타리를 못 벗어나고 있다. 2001년 수도권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둘째딸은 1년 넘게 구직에 매달리다 포기한 뒤 그와 함께 옷가게를 운영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막내딸은 2년째 구직 중이다. 셋째딸이 유일하게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는데, 지난해 말 사표를 내고 영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박씨는 “요즘 매일 누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10년 전 퇴직금과 아파트 담보 대출금으로 사업을 시작할 땐 그래도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보다 젊었고, 10년만 고생하면 아이들도 제 밥벌이를 할 테니 그때까지만 뒷바라지 하고 그 뒤엔 우리 부부와 어머니 노후 생활비나 벌면 되리라 생각했죠. 노후자금은커녕 빚만 늘어서 아파트마저 팔고….”
지방의 가난한 집안 외아들로 태어난 박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남의 집 살림해서 번 돈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갔다. 홀어머니는 고생하며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킨 걸 자랑스러워했다. 1990년대 초 서울 강북의 50평형대 아파트로 이사할 때,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등록금 낼 돈이 부족해 죽은 남편의 형제들에게 손 벌려야 했던 마음고생을 다 보상받았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지난해 박씨 가족은 아파트를 팔고 평수를 줄여 빌라로 이사했다. 박씨는 그날 어머니가 눈물 훔치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지 애비 등골 다 빼먹고…”
“사업을 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어요. 아이들 교육비에 생활비를 감당하려니 대출금과 카드 빚만 불어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불안했어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를 팔아 되는 대로 빚을 정리했지요. 어머니가 지금도 속상해하세요. 저야 아이들이 더 좋은 대학에 못 간 게 꼭 제 무능력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지만, 어머니는 다르죠. 아이들과 어머니 사이에 골이 깊어졌어요.”
팔순을 넘긴 노모로선 대학까지 나온 말만한 손녀들이 밥값을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지 애비 등골 빼먹다 시집가면 그만이지.” 둘째딸(29)은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가슴을 후벼 판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아버지 고생하시는 게 마음 아파 그런다는 걸 알지만 속상하죠. 할머니가 아버지를 대학 보내셨을 땐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취업 허가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구직자 중에 4년제 대학 안 나온 사람 있나요? 대학 졸업장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데…. 저나 동생들이나 답답하죠. 고등학교만 졸업한 엄마는 제 나이에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전 아직 미혼에다 모아둔 돈도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