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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래 살아가던 그 환경에 다시 돌아온 것이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게 당연하고, 그 자체 너무 당연하니까 굳이 하나하나 따져보지도 않게 되죠.
그래도 아래 제 글에 리플로 요청하신 분들이 계셔서 한번 써보겠습니다.1. 병원가기가 두렵지 않다.
미국에서도 꽤 괜찮은 보험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미국 의료보험은 급여가 되는지 여부를 일단 치료받고 청구해보기 전엔 잘 모를 때가 많아서 뭔가 큰 청구서가 오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병원 원무과가 뻘짓도 많이 해서 잘못된 청구서를 보내거나 보험사에 엉터리로 청구해서 거절된 비용을 저한테 청구했다가 제가 항의하니까 다시 보험사에 제대로 청구하기로 해놓고는 그걸 까먹고 다시 저한테 돈 안내면 채권추심으로 보낸다는 협박장을 보내기도 하는 등 정말 고비용 저효율의 한심한 병원 서비스가 뭔지를 보여준 경험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 의료 서비스는 미국보다 신속하고 보험이 되는지 여부도 아주 확실해서 신경 쓰일 일이 없습니다.
2. 저렴한 외식
미국은 식품가격의 양극화가 확실하죠. 수퍼에서 파는 것도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조리된 식품은 비싸고 기계화로 제조 가능한 건 싸고. 하물며 식당에서 외식하는 건 정말 비싸죠. 오늘 퇴근길에 용두동 쭈꾸미집에서 만원 주고 양념 쭈꾸미를 사왔는데 이걸 조금씩 후라이팬에 조려 먹으면 저희 부부 일주일 반찬거리로 충분하거든요. 그리고, 제맛 나는 중화요리를 싸게 배달시켜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미국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일이죠.
3. 직장내 구내식당
미국 직장에선 구내식당 개념이 없었습니다. 한국은 한끼 2000원에 매일 반찬이 바뀌는 밥을 먹습니다. 미국에서 제 자리에 식빵 사다놓고 직장 냉장고에 잼, 햄 넣어놓고 매일 같은 샌드위치 만들어 먹다가 토할 뻔한 생각하면 너무 고마운 점심식사죠. 나가서 사먹어도 하루이틀이지… 미국에선 정말 점심시간이 너무 고역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들구요. 미국에서 한국 음식점에 간다해도 한국 직장에서 주는 2000원 식사처럼 ‘집밥’ 같은 식사를 할 수는 없죠(돈은 매번 12-15불씩 들거고). 한인들 많은 지역은 같은 미국이라도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경우 점심식사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4. 밤길을 걸어도 별로 안무섭다
제가 미국에서 살던 지역은 중소도시였고 치안이 대단히 좋은 곳이었지만 밤늦게 일하다 인적드문 밤길을 걸을 때는 남자인 저도 상당히 무서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서울 같은 대도시도 밤늦은 시간에도 대단히 안전하죠. 실제 안전도의 차이 외에 심리적 안정감도 있긴 하겠지만 체감하는 차이는 매우 큽니다.
5. 자동차 고치러 가서 스트레스 받는 게 적다
미국처럼 자동차의 공인수리점이 딜러십이 아니라 현대자동차 직영의 서비스센터들이 있으니까 독점기업의 횡포가 있긴 해도 미국처럼 딜러십의 미캐닉한테 바가지 쓰는 일은 별로 걱정을 안하죠. 그리고, 딜러십 아니라도 다른 업소에가서도 그나마 영어도 아직 서툰 사람이 교육수준 낮은 미캐닉들의 난잡한 영어발음 알아듣느라 스트레스 받던 입장이다보니 어수룩한 동양인을 등치려는 애들도 많았던 것 같구요.
6. 팁의 공포로부터 해방
팁을 줘야 하니 돈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팁 자체가 성가시다는 게 은근히 스트레스인 것 같습니다. 의외로 미국인들도 이거 계산하는 걸 꽤 성가셔하더군요. 카드 긁고 계산서에 사인하기 전에 그 놈의 15% 혹은 20% 계산을 안해도 되니 좋네요. 또 팁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확실하지 않을 때의 찜찜한 기분도 느낄 이유가 없구요.
7. 살인적 집세로부터 해방
서울에서 제 집에 사니 집세가 매달 안나가는 게 정말 큰 짐을 벗은 기분입니다. 제 집 없는 사람들도 전세 들어가면 매달 집세는 안내니까 미국보다는 훨 낫다고 느끼겠죠. 물론 전세 들어갈 목돈이 없는 사람은 한국이 더 불편할 수도 있겠지요.
8. 고압적 / 불성실 / 부정확한 행정 서비스로부터 탈출
미국 관공서, 학교의 행정 서비스는 직원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에 비해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착오로 월급을 안줘놓고 거의 매일 난리를 쳐도 빨리 해결도 안해주던 건 정말 이해가 안가는 일이죠. 한국에선 월급 나가야 하는데 고용인이 통장 사본 제출 안한 경우 해당 부서에서 그거 내라고 계속 연락이 와서 어떻게든 월급일에는 돈이 나가도록 만들어놓죠. 미국에서 저는 학교측 착오로 처음 두달 월급을 못받았고, 그 다음 달에 세달 월급을 한꺼번에 받았는데 이번엔 제 월급을 잘못 계산해서 주는 바람에 네번째 달에 다시 계산된 돈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예상하지 못하던 돈을 한국에서 환전송금하느라 수수료에 환차손에… 제 와이프는 운전면허 신청하러가서 사진찍은 날 임시면허에 찍힌 생일이 틀린 걸 보고 그 다음날 가서 바로 신고하고 사진 다시 찍었는데 일주일 후 하루 간격으로 생일이 다른 운전면허증 두개가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한국도 가끔 행정서비스의 오류로 불편을 겪긴 하지만 미국에서 제가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네요. 그 짧은 동안 어떻게 그렇게 많은 행정 오류를 겪을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9. 단지 내가 동양인/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길에서 모욕적인 소리를 들을 일이 없음
짧은 기간이었지만 길에서 백인, 흑인으로부터 finger flicking을 두번이나 당했습니다. 한국에서야 내 나라고 여기 사는 사람들이 다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니 나의 인종 때문에 모욕을 당할 일은 없죠.
10. 미국에서 느끼던 ‘허탈감’이 사라짐
어차피 ‘내 나라’가 아니라고는 해도 현재는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인데도 이 사회에서 나는 그저 주변인이고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 있다보니 나에게 직접 이해관계가 없으면 뭐든 직접 나서지 않게 되고 사회에 대해 좀 소극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니 내가 이 사회의 주인이란 의식이 확고해지네요. 따라서 미국에서 느끼던 모호한 박탈감 같은 게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