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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 이전
1945년 8월 15일 –
1948년 7월 20일 –
-이승만 정부(제1공화국)
1948년 8월 15일 –
1948년 9월 9일 –
1950년 6월 25일 –
1950년 6월 28일 –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사건
1950년 8월 3일 – 다부동 전투
1950년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28일 –
1950년 10월 18일 –
1950년 10월 25일 –
1951년 1월 4일 –
1952년 10월 6일 –
1953년 7월 27일 –
1960년 4월 19일 –
-장면/윤보선 정부(제2공화국)
1961년 5월 16일 – 5.16 군사혁명
-박정희 임시군정
1963년 10월 15일 –
-박정희 정부(제3공화국)
1966년 9월 22일 –
1968년 1월 21일 –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사건(김신조사건)
1971년 8월 23일 – 실미도사건-박정희 정부(유신/제4공화국)
1974년 8월 15일 –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1976년 8월 18일 –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최규하 정부/전두환 임시군정1979년 12월 12일 –
1980년 5월 15일 –
1980년 5월 17일 –
1980년 5월 18일 –-전두환 정부(제5공화국)
1983년 5월 5일 – 중국 민항기 불시착사건
1983년 10월 9일 – 아웅 산 묘역 테러사건
1987년 11월 29일 – 대한항공858편 폭파사건(KAL기 폭파사건)1987년 6월 29일 –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6.29선언)
1987년 10월 27일 – 대한민국 제9차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투표
1987년 12월 16일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 노태우 정부(제6공화국)
1988년 2월 25일 – 노태우 정부 출범
1988년 7월 7일 –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7.7선언)
1988년 9월 17일 – 서울올림픽 개최
1988년 11월 3일 – 제5공화국 청문회
1989년 2월 1일 – 대한민국-헝가리 수교
1990년 9월 30일 –
1991년 9월 18일 – 남북한 동시유엔(UN)가입
1991년 12월 31일 –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2년 8월 23일 –
1992년 8월 24일 –
1992년 12월 18일 –
-김영삼 정부(문민 정부)
1993년 2월 25일 –
1993년 3월 12일 – 제1차 북핵위기
1994년 7월 8일 – 김성주(김일성) 사망
1995년 10월 19일 – 노태우 前 대통령 비자금사건
1995년 12월 21일 –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법) 제정
1997년 2월 12일 –
1997년 2월 15일 –
1997년 12월 18일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1998년 2월 25일 – 김대중 정부 출범
1999년 6월 15일 – 제1차연평해전(제1차서해교전)
2000년 6월 15일 – 김대중-김정일 회담(2000년 남북정상회담)
2002년 6월 13일 –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
2002년 6월 29일 – 제2차연평해전(제2차서해교전)
2002년 12월 19일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노무현 정부(참여 정부)
2003년 2월 25일 – 노무현 정부 출범
2003년 8월 4일 –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자살
2004년 3월 12일 –
2005년 2월 10일 –
2007년 10월 4일 –
2007년 12월 19일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이명박 정부
2008년 2월 25일 – 이명박 정부 출범
2009년 5월 23일 – 노무현 前 대통령 자살
2009년 11월 10일 – 대청해전
2010년 3월 26일 – 천안함 피격사건
2010년 11월 23일 – 연평도 포격사건2011년 10월 26일 – 10.26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2011년 12월 17일 –
2012년 4월 11일 –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1편 :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
<하고 싶은 말>
본인이 최근에 작성하기 시작한 ‘5.18 광주사태 시리즈’는 대통령 선거 시리즈를 모두 마친 후에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도 빠른 시일 내에 완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으며 본인의 예상으로 최소 5편 최대 10편…(?) 정도면 끝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주요 사건 관계자>
<2011. 10. 26 –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이 문단은 http://www.ilbe.com/300894286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를 참고하십시오.
2011년 8월 26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장직에서 사퇴한다.
그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투표함을 개봉하지 못 한다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는데
2011년 8월 24일 시행된 주민투표의 투표율이 33.3%에 미치지 못해 투표함을 열어볼 수가 없었다.
이에 공석이 된 시장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한나라당은 나경원 의원을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하였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안철수 교수의 박원순 후보 지지선언이었다.
당시 박원순 후보는 여론조사 지지율 5.0%의 군소후보였고
여론조사에서는 안철수 교수가 36.7%의 지지율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안철수 교수는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 선언을 하고
박원순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과 단일화를 선언하였고
박원순 후보는 안철수 교수 지지층의 지지를 이어받아
결국 대한민국 제35대 서울특별시 시장에 당선된다.
-서울특별시 시장 재보궐 선거 결과-
박원순 53.4% 2,158,476표 당선
나경원 46.2% 1,867,880표 낙선
<2011. 10. 26 –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가 있었던 그날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비서인 공형민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DDos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한나라당은 국민들에게 온갖 비난을 받게 되었고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패배, 선관위 디도스 공격 등으로 인해
그 이미지가 바닥에 떨어졌으며 한나라당은 두번 다시 재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2011년 12월 9일
결국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한나라당 대표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이때가 아마 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튼 이렇게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에게도 구원투수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박근혜(朴槿惠)였다.
<選擧의 女王>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소추안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사태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국민들은
일제히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촛불시위를 시작하였으며
국민들의 정서는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만연해졌다.
탄핵 사건 이후 한달 뒤인 2004년 4월 15일,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당시 여론상으로 봤을 때는 열린우리당의 필승(必勝), 한나라당의 필패(必敗)가 예상된 상황이었다.
※노무현이 탄핵당한 이유는 국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열린우리당 지지를 호소하여 선거법을 위반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바로 박근혜였다.
박근혜는 이렇게 말하며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부패, 기득권 정당에서 벗어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2004년 4월 15일
박근혜의 진심이 국민들에게 통했던 것일까?
박근혜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얻는데 성공한다.
비록 열린우리당에 패배하여 원내 제2당의 위치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여론의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을 기사회생시킨 것이 바로 박근혜였다.
2006년 5월 20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지충호라는 사람이 휘두른 커터칼에 의해 얼굴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박근혜는 이 사건으로 2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으며 얼굴을 60바늘 꿰메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술 후에 제4회 지방선거에서 가장 판세를 예측할 수 없는 대전광역시 시장 선거를 떠올렸고
곁에 있는 참모진들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그 질문은 바로…
대전은요?
자신의 몸보다 대전광역시 시장 선거를 챙기는 박근혜 후보의 언행이 곧 대전광역시 시민들에게 전해졌고
박근혜 후보에게 감복한 대전광역시 시민들은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를 지지하게 되었으며
결국 2004년 5월 31일 치루어진 선거에서 박성효 후보는 231,489표(43.8%)로 당선된다.
2011년 12월 19일
이러한 경력으로 이른바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박근혜 의원이
다시 한번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원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철회 얘기는 선거 얘기가 아니라서 제외함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2012년 1월 25일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한 박근혜는 당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바꾸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대해 국민들의 뜻을 따르겠다고 발언, 새롭게 사용할 당명에 대한 응모를 시작하게 되었다.
2012년 2월 13일
이때 한나라당의 당명 변경 응모에 참여했었던 강누리 양이 제시한 당명이 한나라당의 새 당명으로 채택되었다.
그 당명은 바로 강누리 양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제시한 ‘새누리당’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누리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2012. 4. 11 –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하지만 당명을 바꾼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박근혜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써 4.11총선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야권은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의 구축과
무상급식 주민투표 승리/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승리/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 등으로
여당(새누리당)을 거칠게 공격하였으며 기세가 한창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통합당 노원갑 국회의원 후보 김용민의 막말 논란과
박근혜 의원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새누리당은 4.11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원내 제1당의 위치를 사수함과 동시에 152석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총선에서의 승리로 인해 박근혜는 명실상부 새누리당의 일인자가 되었으며
올해 예정되어 있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지게 된다.
<親李 이재오 / 非朴 정몽준>
박근혜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해서 새누리당의 모든 이들이 박근혜를 지지했을까?
답은 ‘아니다’
친박(親朴)계 의원들이 주를 이루는 새누리당 내에는
이 두 사람이 남아 반박(反朴)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재오는 친이(親李)계 인사이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특임장관으로 활동하였으며
(舊)한나라당 시절 주를 이루었던 친이계 의원들의 우두머리격이었다.
그러나 4.11총선 공천 중에 친이계 인사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자
이재오는 과거에 행사했었던 그 영향력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정몽준 또한 친이계 인사이다.
그는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 하여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에 일조했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16대 대선 : http://www.ilbe.com/371075495 참고
정몽준은 제13대~제19대의 임기, 즉 7선 의원인 점과
박근혜 비대위원장보다 정치경력이 많다는 점, 자신이 노무현을 당선시켰었다는 영향력 등을 근거로 내세워
대통령 출마 선언을 계획하고 있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압박하였다.
이 두 사람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박근혜 후보를 비판함과 동시에
오픈 프라이머리 경선의 도입을 주장하며 경선 과정에 대한 개편을 주장하였다.
※오픈 프라이머리 경선 : 새누리당 당원 50% + 국민 50% 여론조사로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
하지만 오픈 프라이머리 경선의 경우 생각지 못한 이변(異變)이 발생할 수가 있었다.
16대 대선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군소후보에 불과했었던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또한 http://www.ilbe.com/371075495 참고
결국 이 둘은 자신들이 주장한 오픈 프라이머리 경선제도가 도입되지 않자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불참할 것을 선언하였고
박근혜 비대위원장과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아래에서 짤막하게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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