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장태동 주유산천기] 그날 난 전나무로 행복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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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장태동 주유산천기] 그날 난 전나무로 행복했네

    장태동 전문기자·여행작가(jjcokr89@hotmail.net) 2007년 04월 16일

    전북 부안 내소사와 채석강 … 화석으로 묻힌 그 어느 봄날

    해마다 봄만 되면 이 산하는 밤낮으로 피고 지는 꽃소식으로 분주하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해 놓고 봄은 벌써 중부내륙까지 진군했다. 때로는 봄도 휴식 같을 때가 있어야겠다. 한가롭게 거닐어 보는 숲과 바다의 하루를 선물한다.

    새벽이었다. 청주에서 시를 쓰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후배는 한 마디 안부와 함께 올 봄은 어떠냐는 말을 이었다. 꽃소식에 정신없다고 대답했더니, 봄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자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대답한다.

    예전에는 저 먼 남쪽바다부터 천천히 북상하던 봄이었는데 요즘은 아무데서나 고개를 들고 있다며 정신없는 봄을 탓하기도 했다.

    새벽 통화를 마치고 나서 머릿속으로 봄꽃의 북상 진로를 더듬어보았다. 예측하기 어렵다는 일기와 황사 속에서도 봄은 천천히 예전의 속도로 북상하고 있었다.

    여수 영취산 진달래가 지난 주에 만개 했고, 이번 주에는 전북과 충청도 남부 경북 지역에 봄꽃의 만개 소식이 들리니 봄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사람의 발걸음과 같은 속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전나무 숲길을 거닐다

    ‘현대문명이 세상을 ‘확’ 바꾼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다만 사람 사는 모양만 바꾸었을 뿐이지 자연 앞에 놓인 문명은 티끌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티끌을 끌어안고 세상을 호령하려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걸을 때 이런 생각들이 언뜻 스쳐갔다. 하늘을 덮은 키 큰 나무 아래로 길이 났다. 침엽수림에서 뿜어 나오는 향이 몸을 적신다.

    푹신한 흙길에서 발걸음은 더 느려진다. 속도와 편리의 세상에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풍요로움이 가슴에 들어찬다. 주위 것들에 눈길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나온 손자의 모습은 고목에서 피어난 새순과 다를 게 없다. 이제 막 사랑을 확인한 것 같은 연인들은 숲이 쳐 놓은 보호막 아래서 더 행복해 보인다.

    숲은 세속과 분리된 또 다른 세상임에 틀림없다. 숲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편안해 보인다. 숲의 그늘을 벗어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저들의 일상은 번연할 것이다. 나의 일상 또한 그렇다.

    세속의 생활에서 찌든 때를 숲의 길에서 씻어 내기 때문에 또 다른 일상을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끝없이 반복, 정진해야 세속에서 ‘사람같이 살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정화의 통로이자 비속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고목에 피어난 봄

    의식 같은 발걸음으로 숲길을 빠져 나오자 절이 드러난다. ‘화르락’ 피어난 벚꽃도 내소사에서는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오래된 벚나무가 나란히 여행자를 맞이한다. 오래 된 나무에 피어난 신록은 사람의 마음에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고목에 핀 흰 벚꽃 또한 은빛 서슬이 예사롭지 않다. 그곳은 흙조차 기름기를 머금은 것 같이 무겁고 진득하다. 절 뒤 바위산 또한 기상이 높아 보인다.

    천년 하고도 4~5백년이 더 지난 내력은 내소사 작은 절집을 옹이처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래 된 느티나무를 지나 절집 기와가 내려 다 보이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꽃눈 되어 흩날리는 벚꽃 잎이 절집 기와 위에, 사람들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세속의 때를 씻는 의식의 절정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 순간 그곳에 있는 사람을 축복해 주는 자연의 배려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그도 아니면 이 멀고 외진 곳까지 찾아준 발걸음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면 어떨까.

    내소사 뜰 앞에 느티나무 아래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채석강, 바닷가의 산책

    전나무 숲길을 되걸어 세속으로 다시 나왔다. 죄는 씻겼으되 봄처럼 되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봄을 닮은 아이의 눈망울이 나를 위로 해준다. 아이들은 봄이다. 나는 내소사의 봄을 뒤에 남기고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차를 달려 후배가 인도한 곳은 채석강이었다. 적당히 찌들고, 적당히 때 묻고,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보인다. 벗어 날 수 없는 굴레에서 오늘 하루 발걸음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한다.

    후배와 함께 수천 개의 층으로 쌓인 거대한 바위 옆을 거닐었다. 채석강, 변산반도국립공원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바다풍경 중 하나라는 곳이 바로 여기다.

    켜켜이 쌓인 세월 그 맨 아래층에는 1억5천만 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세월의 어느 봄날이 화석으로 묻혀 있을 것이다. 그때도 오늘처럼 꽃은 피었고, 푸르른 잎이 지천으로 번져 있었겠지.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봄이 쌓여 있는 바위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바다향 진한 해산물을 안주로 곁들였다. 이곳까지 나와 장사를 하는 아줌마들의 일상 속으로 나는 들어가 보고 싶었다. 술잔에 이런 저런 얘기를 담아 한 잔 권했다. 아줌마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너 잔 더 마셨고 아줌마는 오늘 장사 끝이라며 봄이 켜켜이 쌓여 있는 퇴적층을 밟고 위로 올라간다. 화석으로 묻혀있던 봄이 지상으로 환생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 내 앞의 봄을 즐기며 걸었다. 분주한 봄날, 휴식 같은 하루가 바닷가에서 저물고 있었다.

    • 123.***.165.142

      내소사의 산책길은 정말 권할만한 길인 듯 해요.
      저도 작년 봄에 한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길을 혼자 한적하니 걸어 올라 자애불상 앞에 이르면,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뭔가 한국식 불교는 이런 느낌이구나 싶은 감상을 건네주지요. 산책길로도 좋고, 가족끼리 두런거리며 걸어도 숨차지 않는 적당한 산길인듯.

      좋은글 잘 봤습니다. 아~한국온김에 내소사를 가볼까요. 시간나거든 광주호 근처에 대나무숲이랑 이런저런 옛날 조선 선비 은둔처나 구경갈까 했더니.

    • UZ 67.***.69.28

      다녀 오시면 좋을 것 같네요. 우연히 지나다가 멋진 곳을 발견하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미리 준비하고 원정가는 것도 꽤나 즐거운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빨리 출장꺼리를 만들어야겠는데, 올봄은 어려울 것 같네요.
      모쪼록 좋은 추억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