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드림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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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68.***.88.6 2294

    코리안드림의 화신 노무현

    그의 꿈은 ‘승리’ 자체거나 ‘원조’로 기억되는 것…애써 선의로 해석하자면 ‘상황주의’가 비극을 초래해

    (나는 <한국일보> 4월11일치에 기고한 ‘노무현과 박정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이 글은 그 칼럼의 속편이기에 일부 대목을 재활용하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노 대통령 신진보냐 신보수냐’(<한겨레> 4월5일치), ‘노 대통령 진보적 우파냐 실용적 좌파냐’(<중앙일보> 4월6일치) 등과 같은 기사 제목이 말해주듯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이후 노무현의 정체성 규명이 왕성하게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념 중심의 평가 잣대로는 노무현의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이념 중심의 평가는 무의미하다, 왜

    2002 년 대선에서 노무현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유종일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강력히 반대했던 법인세를 집권하자마자 내렸고, 고소득층에 혜택이 돌아가는 특소세, 소득세를 다 내리면서 간접세는 늘려 서민 조세 부담은 더 늘었다”며 “노 대통령은 애초에 진보-보수의 이념 구분이 안 서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제야 확실해졌지만, 노무현에겐 이념이 없다. “10배 남는 장사도 있다”는 논리로 열린우리당의 총선 공약이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제를 뒤엎은 것 이상 좋은 증거가 또 있으랴. 노무현에게 이념이 있다면, 그건 ‘승리’ 그 자체이거나 ‘원조’(元祖)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다. 그 방법론은 역발상에 근거한 도박이다. 왜 이제야 이걸 알게 됐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판단이 잘못된 것일까? 노무현을 오판하게끔 일조한 내 자신의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겠다.

    나는 10년 전 노무현에 대해 “뻔히 패배할 줄 알면서도 지역구도에 정면 도전해 의연하게 패배한 것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지난 2002년에 발표한 글에서 이 평가에 이의를 제기했다. 노무현은 뻔히 패배할 줄 알면서 지역구도에 정면 도전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패배한 뒤 “정치는 마약과도 같다고 하더니… 잘하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분도 들었다”고 고백했다. 정혜신이 반박하고자 하는 건 ‘바보 노무현’이라는 그릇된 이미지다. 노무현은 ‘바보’가 아니라 ‘배짱이 두둑한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정혜신이 옳았다. 그러나 이젠 정혜신도 ‘두둑한 배짱’만으론 노무현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데도 동의하리라 믿는다. 노무현은 고3 졸업 무렵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검사가 되겠다. 검사가 되어 경제인들과 교제의 폭을 넓혀서 권력을 잡아보겠다”고 말했다. 바로 이 욕망이 그의 전 인생을 지배해왔다. 노무현은 ‘코리안드림’의 화신이다. 그는 동시에 ‘승리 이데올로기’ ‘원조 이데올로기’ 중독자다.

    이념이 없다는 건 장점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노무현이 그동안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배려하는 강한 이념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이해돼왔다는 점이다. 노무현 지지자들 중에서도 그런 이념성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은 심한 배신감과 좌절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과연 노무현을 오해했던가? 아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이 생산한 모든 담론은 약자·소수자를 위한 것이었다. 노무현의 기만 또는 연기가 문제인 것이지,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노무현을 애써 선의로 해석하자면, 늘 상황과 현장 분위기에 맞게 처신하는 그의 ‘상황주의’가 이런 비극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30대 중반까지 ‘민주화’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돈 잘 버는 변호사로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인권 변호사로 변신한 노무현을 둘러싼 환경은 상식 수준의 정의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뒤늦게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의식화 교육’을 독학으로 했다지만, 그저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고서 핏대 올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지지율 반전 카드, 대연정 이어 FTA

    대통령이 된 뒤에도 노무현의 말이 큰 논란을 빚은 경우는 대부분 청중이 자신의 지지자들 중심으로 구성돼 현장 분위기가 ‘업’되어(들떠) 있을 때였다. 노무현과 같은 상황주의자에겐 물리적 환경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무현이 2003년 5월 미국에 가서 “6·25 때 미국 아니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던 것도 그런 상황주의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 때 지지자들 앞에선 “반미 좀 하면 어때”라고 말하는 게 현장 분위기에 어울리지만, 미국에 가선 전혀 다른 상황에 충실한 적응을 한 셈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뒤에 약자·소수자들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반대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왔다. 또 하나의 중요한 상황 변화는 노무현의 지지율 급락이다. 노무현에겐 그건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었다. 그는 ‘역사와의 승부’를 위해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대연정 프로젝트가 좌절된 이후 노무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로 이때에 노무현이 후속타로 구상한 게 ‘경제 대연정’이라 할 한-미 FTA였다. 노무현이 한-미 FTA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은 2006년 1월18일 신년 연설을 통해서였지만, 그 구상을 한 건 대연정 좌절이 확실시된 2005년 가을이었다. 노무현은 한-미 FTA를 2003년부터 준비했다고 주장했지만, 전 청와대 경제비서관 정태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 바 있다. 한-미 FTA가 급조된 프로젝트라는 증거는 그 밖에도 많다.

    노무현은 2002년 대통령 후보 시절 농업은 시장경제로만 풀 수 없다고 했다. 또 노무현은 2003년 5월15일 방미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FTA가 되면 관세가 없어지기 때문에 우리 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아직 관세 없이 개방할 만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한-미) FTA는 어렵다”고 했다. 그랬던 노무현이 이제 와선 “농산품도 상품이다. 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이 없으면 농사지을 수 없다. 농업도 시장의 힘, 시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무현은 한-미 FTA 추진 의사를 밝힌 직후인 2006년 2월 여당 일부 의원들을 청와대에서 만나 “한-미 동맹이 군사적으로 많이 균열된 상황 아니냐”며 “북한 문제로 한-미 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밖에 없다”고 했다. 그랬던 노무현이 이제 와선 한-미 FTA는 ‘먹고사는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노무현은 애초 서비스 시장 개방을 한-미 FTA의 최우선 이유로 삼았다. 그랬던 노무현이 이제 와선 “우리 협상단이 협상을 잘해서 이들 시장이 열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노무현은 신년 연설에선 ‘양극화가 경제 세계화의 부작용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랬던 노무현이 이제 와선 경제 세계화의 결정판이라 할 한-미 FTA와 양극화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어지럽다. 그 어지러움을 명쾌하게 풀어준 이가 바로 정태인이다. 정태인은 지난해 4월 “YS 하면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DJ 하면 6·15 정상회담이 떠오르는데, 노 대통령은 이게 없다”며 “한-미 FTA는 전형적인 한건주의며 임기 안에 무엇인가 업적을 남겨보려는 노 대통령의 조급증이 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노무현과 박정희의 공통점 10가지

    노 무현은 조급했을 뿐만 아니라 강압적이었다. 여러 논객들이 노무현의 한-미 FTA 추진 방식이 ‘박정희식’이었다고 평가했는데, 실은 노무현은 ‘2000년대의 박정희’다. 노무현은 2004년 5월 연세대 특강에서 박정희는 절대 찬성할 수 없지만 박정희가 목숨을 걸고 한강 다리를 건넜다는 건 평가한다는 말을 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는 식으로 올인을 해야 성공한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이 발언에 노무현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다.

    노무현의 ‘동업자’ 안희정도 “젊은 세대가 정권의 주역이 된 것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40년 만”이라며 “그때는 군인들이 총칼 들고 한강을 건너 정권을 장악했지만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했고, 어느 인터뷰에선 자신의 야심을 밝히면서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JP는 공화당의 당의장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노무현의 의식 심연엔 박정희가 자리잡고 있다. 리더십 스타일에서 노무현·박정희의 공통점이 많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공통점은 ①역사와의 승부에 임하겠다는 선지자주의, ②‘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는 식으로 올인’하는 도박사 근성, ③자신만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독선적 흑백논리, ④다른 의견을 묵살하고 매도하는 일방적 밀어붙이기, ⑤여당을 무력화시키는 ‘나홀로 결정방식’, ⑥반대자에 대한 철저한 응징, ⑦소수자 희생을 가볍게 생각하는 국가주의, ⑧이념의 기회주의적 도구화, ⑨실질과는 거리가 먼 상징적 수준의 포퓰리즘, ⑩밑바닥에서 일어난 ‘코리안드림’의 상징성 활용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두 가지다. <한겨레> 논설위원 김종철은 “탄핵 등 고비마다 ‘바보 노무현’을 지켰던 기존 지지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고 했고, 한림대 교수 김영명은 “노무현 후보가 서민 대중과 젊은 층을 대변하겠다고 선풍을 일으키며 집권한 것은 일종의 사기행각임이 판명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30%대로 뛰어오른 노무현의 지지율이 모두 보수파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무현의 ‘사기행각’을 선의로 이해하며 계속 지지를 보내는 열성 지지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농촌을 죽이는 정책을 편 박정희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낸 농민들이 많았던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다. 그 이유가 바로 두 사람이 효과적으로 이용한 상징적 수준의 포퓰리즘과 밑바닥에서 일어난 ‘코리안드림’의 상징성이다.

    노 무현에게 보낸 지지자들의 ‘연애편지’를 묶은 <노하우에 쓴 러브레터>(열음사, 2002)라는 책을 다시 열어보자. 이 편지들은 대부분 노무현의 이념이 아니라 노무현의 험난한 수난·투쟁 과정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일종의 ‘신앙’ 고백이다. 세 편의 고백을 소개한다.

    “당신의 순수한 모습에, 당신의 진실의 눈물에, 당신의 확고부동한 의지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저는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직 정의와 진실만을 위해 한 곳만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주님. …지금은 당신을 위해 미치고 싶습니다. 아니, 죽도록 사랑하며 흠모하고 싶습니다.”

    “빈 농의 자식으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집안에 고등학교만 나온,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표와 당위성을 가지고서 꿈을 이루어내지 않았습니까? 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꿈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러한 꿈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나중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한 인간의 영혼은, 그 품격과 의지들은 외부 상황 때문에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모습의 한 이면에는 언제든 나를 뒤흔들어놓을 섹시함이 존재한다. 그 어떤 정치인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정열, 뜨거움, 강렬한 파워가 있다.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 끝없는 달아오름이 존재한다. 인간의, 역사의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그에게서 발견한다.”

    왜 3불 정책은 붙잡아두려 하나

    노무현의 열성 지지자들은 지금도 한-미 FTA에 분노하기보다는 노무현이 그걸 밀어붙이면서 겪었을 ‘처절한 고독’에 눈물 흘린다. 노무현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 한-미 FTA 자화자찬에 이어 ‘3불 정책’을 공격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3불 정책을 방어하지 못하면 교육 위기가 올 것”이라며 “지금보다 낮은 경쟁으로도 충분히 한국은 최고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 신문들은 ‘한-미 FTA’와 ‘3불 정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지만, 정태인의 분석 패러다임으로 보면 말끔하게 정리된다. 한-미 FTA라는 도박은 성공만 하면 노무현의 동상을 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업적이 되지만, 3불 정책은 그렇지 않다. 3불 정책은 이미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지만 도망가려는 최후의 지지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방어해야만 한다.

    보수 신문들의 노무현 예찬은 광기에 가까운 호들갑이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스스로 폭로했다. 그들의 호들갑은 한-미 FTA로 인해 고통받을 사람들의 처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은 냉혈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한-미 FTA에 대한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라는 걸 웅변해주었다. 이제 한-미 FTA의 미래는 노무현의 ‘코리안드림’ 신화에 매료돼 노무현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열성 지지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한겨레21)

    • ㄸㅂㄱㅎ 68.***.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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