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매국노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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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 71.***.168.173 2233

    배신과 사기의 배후

    친일매국노로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은 탁월한 처세술과 풍채로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의리의 협객인 양 자부하였으나, 출세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은혜까지 저버리는 배신과 사기의 명수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출신과 성장 배경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다.

    “송은 일본을 흠모하여 신변의 의식주는 물론,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풍을 모방, 추호도 일본인과 다를 바가 없다”({조선귀족열전})라는 평가도 있듯이 파렴치범으로서뿐만 아니라 반민족 범죄자로서도 그는 제1의 서열에 오르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친일매국노 제1호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45년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추원리(秋湲里)에 있던 송병준의 집 마당의 벚꽃 나무와 그의 묘역에 있던 일본송(日本松)이 전부 말라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죽고 나서도 일본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기묘한 일이라 하겠다.

    http://bluecabin.com.ne.kr/split99/sbj.htm

    ‘해방’이 도리어 ‘행운’을 가져다 준 친일 가문

    송병준의 백작 작위는 아들 송종헌(宋種憲)이 물려받았다. 그는 ‘병합’ 후에 경기도 양지군 참사(1910∼1913), 중추원 참의(1921∼1933) 등을 지냈다.

    송병준의 사위는 구연수(具然壽)로, 그는 을미사변 당시 민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통감부가 개설되면서 일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귀국한 그는 송병준의 천거로 통감부 경시(警視:총경)를 거쳐, 총독부 경무관으로 경무총감부에서 근무했다. 이것은 경시보다 한 급 위인 경찰 최고의 직급인데, 조선인으로 경무관을 지낸 사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구연수 한 명뿐이다. 그는 3.1 운동이 나던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경무국장과 거의 맞먹는 경무국 칙임(勅任)사무관을 지냈으며, 1925년 5월 6일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직위는 중추원 참의였다.

    구연수의 아들, 그러니까 송병준에게는 손자가 되는 구용서(具鎔書)는 1918년 졸업생 105명 중 조선인이 단 2명뿐인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상대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인 1925년에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들어간다. 식민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더불어 침략기관의 중추부를 이루고 있었다. 해방 직전에 조선은행 오사카(大板) 지점 서구출장소 지배인을 맡고 있던 그에게 해방은 ‘고통’이나 ‘비난’이 아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1945년 11월 10일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星野喜代治)가 면직되면서, 일개 지점장도 못되던 구용서는 하루아침에 부총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1950년 총재로 승진한 그는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개편되면서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은행.금융계의 최고 지위에서 ‘해방’의 빛을 마음껏 누리던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상공부장관까지 지내기도 하였다.

    ■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

    ■ 참고문헌
    內田良平 編, {日韓倂合始末}, 1944.
    野田眞弘, {賣國奴}, 講談社, サ-ビスセオンタ-, 1977.
    川上善兵衛, {武田範之傳}, 日本經濟評論社, 1987.

    • 그래서 212.***.147.228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외치면 김구도 죽이고, 스스로 독립국가임을 포기하고 사는 나라가 되었도다.

      차리리 왜정때가 좋았다고 외친다, 이것은 미국-일본 양국에서 지령이 내려오니 누구말을 들어야 할 지 모를 때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 하는 한숨 짖는 소리임에 불과하다.

      몇끼 굶는다고 죽는거 아니다. 당당해져라.

      북한을 봐라,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고 하잖니.

      그정도의 열의가 없이 외치는 자주독립은 공염불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