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성분과 사상관계(김대중-노무현-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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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는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재벌의 2세들은 안하무인이라 한다. 어릴 때부터 남과 어울리거나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커서는 나이 든 중역들이 떠 받혀 주니, 자기제어를 훈련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 재벌의 아들은 나이 든 중역들에 욕을 하고 말로 걷어차는 사람도 있다 한다. 이러한 맥락으로 유추해 보면 김정일이 왜 저렇게 포악한지 알만 하다. 황제의 아들들은 대개 포악한 것이다. 그래서 선진국 기업주들은 자식을 자기 회사에서 키우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으로 그 사회에 대해 분노와 적개심을 쌓으면서 자라는 사람들도 있다. 옛날의 서자들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김대중의 반사회성

    김대중은 그 모친이 술집으로 전전하다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어느 남자가 유전상의 아버지인지 모른다고 한다. 기록들에 의하면 제갈씨로부터 수태했다는 말도 있고, 윤씨의 자식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김씨 집안의 첩으로 들어가 김대중을 낳았기 때문에 김씨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대중은 동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남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이 뒤집히기를 내심 바라던 차에 공산당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여 남노당에 입당한 후, 마을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반 사회적인 행태를 보였다. 그래서 온갖 사기행각으로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세상을 바꾸려 했을 것이다.

    노무현의 반사회성

    기록에 의하면 노무현의 조부는 일제 앞잡이였다 한다. 해방이 되자 마을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다. 아버지 노판석은 자기 잡안이 당한 이러한 멸시에 한을 품고 인민군이 들어오자 빨치산이 되었다 한다. 6.25가 끝나자 노판석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또 다시 손가락질을 받고 고립되었다 한다. 그래서 전라도 강진에서 밤중에 몰래 목포로 도주하여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가호적을 만들었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무현은 한국 사회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고, 부자와 학벌을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장인 권오석은 마을 사람 11명을 살해한 지독한 좌익이다. 노무현-권양숙 부부는 어려서부터 이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며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완전히 바뀌기 전에는 아무리 대통령을 해도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세상을 바꾸려 하다가 생각대로 잘 안되자 막말로 자기 분노를 표출하는 등 지기분열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에게 속아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데 그 비극이 있다. 우리의 가장 큰 역사적 과오는 김대중이나 노무현 모두에 대해 찍기 전에 전혀 이런 것들을 분석하고 검증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명박의 반사회성

    기록에 의하면 이명박의 아버지는 경북 영일군 홍해면 덕성동에 태어나 목축을 하는 일꾼이됐다 한다. 이충우는 1935년 고향 친구 몇 사람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일했다 한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그는 1940년 경에 고향에 잠깐 돌아왔다가 반야월 채씨 집안의 딸과 두 번째 결혼을 하고 결혼식을 한 지 며칠 만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이명박은 1941년 12.19. 일본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이명박이 5살 되던 해에 1945년 11월 오사카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이 때 오사카를 출발한 가족은 8명이었다. 이귀선, 이상은, 이상득, 이귀애, 이명박, 이귀분 그리고 부모였다. 이름을 보면 3남3녀의 가정이었다. 3명의 아들 중 2명은 ‘상’자 돌림이었으나 유독 이명박만은 ‘이들박문’의 ‘박’자로 지어졌다. 일본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짓는 이름자라 한다.

    이충우씨의 첫 부인에서 태어난 이상득(한나라당 중진의원)은 육사 출신으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지만, 배다른 형제인 이명박은 자기가 말하듯이 풀빵장사를 했다. 이상득의 생년월일은 1935.11.29일, 이충우씨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해다. 6살 터울의 이상득과 이명박, 적자는 평탄하게 자랐고, 서자는 어머니 채씨와 함께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이 된다.

    우리가 잘 아는 홍길동이 서자였기 때문에 서출내기라는 손가락질을 받았고, 천대를 받았으며 그래서 양반과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듯이, 1940년대 초기의 한국 사회 역시 서자들에 대한 천대와 멸시가 팽배했다. 이명박 역시 아마도 이런 과정에서 천대를 받아 고생을 했고, 그러는 동안 사회 기득권에 대한 반항심을 키웠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은 빨갱이집안으로 천대를 받아 우리사회를 증오했을 것 같고, 이명박은 서자 출신이라 천대를 받는 과정에서 우리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 좌익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이명박을 기업에서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냉혈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명박은 남파간첩에 의해 의식화된 제2기 산물

    그래서인지 그는 대학 4학년 때, 박정희에 항거한 6.3사태를 주동하여 현상금가지 걸렸다가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4년 6.3사태는 남노당이라 일컫는 대한민국 최대의 간첩단 “통일혁명당”(통혁당)이 대학 학생회를 의식화시켜 주도한 극렬 시위 사건이었다. 이명박은 그야말로 골수 빨갱이인 이재오와 또 다른 골수 손학규와 함께 6.3사태 3인방이 됐다. 이; 3인의 학생들은 통혁당에 의해 의식화된 산물들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의식화된 학생의 제1기는 고건과 류근일이다. 이들 역시 간첩들에 의해 의식화되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4.19의 대표적 구호를 외친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신진회라는 학생 써클을 만들어 순수한 4.19 데모를 폭동으로 비화시켜낸 장본인들인 것이다.

    그리고 제2기가 6.3사태를 주도한 이명박-이재오-손학규 들이며 이들은 통혁당에 의해 의식화된 사람들이다.

    이명박의 사상적 정체성은 6곳에 드러나 있다.

    1) 이명박은 박정희를 증오하는 모임인 6.3동지회 지휘
    2) 김정일 만나기 위해 서울시 조례 제정하여 대북지원비 200억 마련한 후 김정일측과 협상
    3) 청계천을 ‘박정희에 항거한 좌익-노동세력의 로고’인 전태일에 바친 사실
    4) 좌익들의 이념침략을 비호하는 발언들
    5) 좌익 친구들
    6) 좌익 운동권 출신요 일심회 간첩들과 가까이 지내는 정태근을 핵심참모로 데리고 다니는 사실 들이다.

    좌익세력의 국가전복 행위 가려주는 이명박의 발언들

    2005년 12월 20일 오전, 이명박은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이 청년층과의 교류 확대를 위해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마련한 ‘대학생아카데미’ 행사에 첫 번째 강연자로 초청됐다. 사립학교법과 관련하여 박근혜가 주도하는 이념 논란 즉 “우리 아이들을 전교조에 맡길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이렇게 비판했다.

    “정치권에서 국가정체성이 어떻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정체성 논란을 이해할 수 없다.”

    “21세기에 누가 국가정체성을 가지고 그러느냐.”

    “국가정체성에 대한 승부는 이미 갈렸다. 그 승부가 끝났는데도 대한민국은 그 문제를 가지고 지금도 왈가왈부한다.”

    국보법 폐지 등 4대 악법과 관련하여 그는 “되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국민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조선ᐨ동아를 포함한 애국자들은 4대법안을 4대악법이라 불렀지만, 이명박은 열우당 편에 서서 가결되면 기분이 좋다고 한 것이다.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을 사회에 헌납할 생각은 없느냐”는 한 대학생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20년간 CEO를 하며 재산을 모았지만 현재 대기업 CEO의 1년치 연봉보다 적다. 내가 일궈낸 재산에 대해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거짓말일 것이다.

    2006년 7월 5일, 당대표 경선 때, 이규택 후보는 이재오 후보에 대한 사상검증 주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전 시장이 골수보수로 가자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명박이 사상검증을 꼴보수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방해한 것이다.

    2006년 6월 30일, 이명박은 또 “한나라당이 골수보수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개혁이 되지 않아 골수보수가 아닌 개혁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했다. 김진홍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2005년 10월 24일(내일신문), 박근혜는 “강정구 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지휘는 현 정권이 국가정체성을 뒤흔든 것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구국운동도 불사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손학규는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도 문제지만 강정구 교수 발언을 이념논쟁으로 끌고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언했고, 이명박은 아예 강정구 교수 사건에 대해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 작통권 문제에 대해 그는 기억에 남을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기자가 묻는 말에 수동적으로 “작통권 문제는 차기 정부에서 다뤄야 한다”는 견해만 피력했다.

    이명박의 절친한 친구들이 좌익

    이명박과 절친 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 김진홍, 인명진, 이재오, 손학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좌익전력으로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다. 지금도 친북-반미 발언들을 하고 있으며 좌익세력의 폭력시위, 국가파괴, 전교조의 이념전파 행위를 감싸주는 발언들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재오, 김진홍, 인명진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소위 킹메이커들이다.

    좌익 운동권 출신 정태근을 핵심 동반자로 데리고 다닌 사실

    정태근은 이명박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을 때, 이명박 캠프에서 그를 도왔고, 시장일 때에 는 부시장이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서서 이명박을 보호하는 핵심측근이었으며, 지금은 공개적으로 이명박 캠프에서 핵심 참모로 일하고 있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이명박의 색깔을 알 수 있다.

    이명박의 1급 참모인 정태근은 간첩들과 친구이고, 반미 친북 운동으로 감옥에 갔고, 친구들이 좌익 운동권이고, 지금도 반미-친북 단체들에서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전형적인 골수 좌익이다. 이명박은 김진홍-인명진-손학규-이재오-정태근과 시스템적으로 연계된 골수 좌익이다.

    1. 정태근은 고진화, 김민석, 허인회(부여간첩접선)와 함께 삼민투 운동전개

    2. 미문화원 점거(3년징역)

    3. 박종철 고문사건과 연루, 수사대상에 올라

    4. 이번 일심회 간첩 손정목과 함께 운동했고,

    5. 친북단체인 민가협의 간사

    6. 그 외 수개의 친북 단체에 관여

    7. 인터넷에 많이 떠도는 자료에 의하면 정태근은 이번 386간첩단의 수괴인 장민호와도 죽마고우라 하지만 아직 확실하게 단언할 단계는 아니다.

    2000년 총선 당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사상이 불순한 386 3인을 영입했다.

    원희룡(서울대 82학번)

    고진화(성균관대 총학생회장 82, 삼민투위원장)

    정태근(연세대 총학생회장 82학번, 이명박 서울시장 당시 서울시 정무부시장)

    • 허허 61.***.18.12

      liberty? 꼭 무식한 넘들이 ‘자유’란 말을 단순무식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