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alk Free Talk 짜장 먹으러 갔다가 문득 This topic has [1] reply, 0 voices, and was last updated 2 years ago by Eric. Now Editing “짜장 먹으러 갔다가 문득” Name * Password * Email Topic Title (Maximum Length 80) 베트남과 베트북이 맞장을 뜰 때 내 계급이 상사였다. 차출보단 지원, 지원 우선였기에 한시라도 빨리 가고픈 맘에 목숨을 걸어야는 험지에 지원을 했더니 아니 쓰바, 날 뭘로 보고. 여군, 여군부대로 배치를 했다. 백마 부대였다. 백마부대장은 날 크게 반기며 천군만말 얻었다며 매우 기뻐했다. 무튼, 가선 베트북 애덜 몇 잡아 족쳐서 의젓하게 훈장달고 돌아오면 온 동네 잔치를 하고 엄마도 품에 안기고 여동생도 품에 안기고 짝사랑했던 현자. 그 지지배도 굳게닫힌 입술, 무거운 철몰 쓰고 웃으며 돌아오는 믿음직한 칼상사. 그런 날 보면 내 품에 퐉, 앵길 줄 알아서였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신은 내 편이 아녔다. 백마부대 스키중대 소속였던 난 베트북 애덜을 코앞에 둔 진지에서 눈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끝내 눈이 안 와 총 한 발 못 쏴 보고 철수하게 되었고 가슴에 훈장이 안 달렸단 이유로 여동생년은 해외여행 다녀왔네비지? 얼굴이 때깔이 좋네? ㅉㅉㅉㅉㅉ 하며 품에 안 앵겼고, 현자는 네가 그럼 그렇지라며 딴놈을 찾아 삼만리나 떠났고 엄마만 날 끌어안아줬었다. 저런 썩을년들. 뭣이 중헌디. 칼아, 아이구 예쁜 내새끼. 이 이미는 네가 살아 돌아 온 게 이미한텐 질 큰 훈장여. . . . . . 전세기 70년대 초반 이후에 군생활을 한 애덜은 3년이란 세월이 안식년였다. 물군대라 놀러가고 쉬러가고 재충전하러 가는 곳이 군대였지만 나 땐 처맞기 위해 기상을 했고 처맞으며 취침을 했고 가끔은 자다 일어나 처맞고 다시 잤었다. 당시의 군댄 처때려도 된다는 게 군법 1 조 1항에 명시되어 있어 얼마나 처맞는 게 유행였냠, 내가 자대에 당도하자 고참들은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당신은 처맞기 위해 군대 온 사람"~~~ . . . . . 군생활이 힘들었던 건 고된 훈련과 처맞음의 연속, 그런 게 아녔다. 답장이 없는 현자를 못 잊어 탈영욕구를 억제해야만 했었던 고통도 아녔다. 가장 힘들었던 건 왜기였다. 애국간 국 사가 되어서야 마스틀 했었고, 국민교육헌장은 국 오가 되어서, 구구단은 국 육이 되어서 마스틀 했었고, 국기에 대한 맹센 중 일인갈 때 마스틀 했으니 군인정신이니 군인의 길이니는 말해 뭐하랴. 제대하고 나서 바드시 마스틀 했었다. 내무사열할 때 중대장이 밸 툭 치면, 추앙서엉!!! 단풍하사 칼 있 으 마!!!! "군인정신 왜 봐." 그럼 냥 목에 치렁치렁 지렁이를 감으며 힘찬 목소리로 군인정신!!! 에 , 저, 그, 그게 있지말입니다. 원래 군인정신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해 또 처맞았고 소대장한테 처맞았고 선임하사에게 처맞았고 고참한테 처맞으며 돌림빵을 당하곤 했었던 기억 때문에 지금까지 왜기 트라우마가 있는데, . . . . . 그래야지. 게 맞다고 봐. 시댄 변했는데 언젯적 왜기를 지금도 그걸 그대로 왜둬락하는 건 구태일 뿐이고, 구닥다린 현시대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 변경해서 왜기도 진화를 시켜야는 게 현명하다고 봐. 먹고 살기 바빠 그 때 왜뒀던 것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엊그제 미 오야붕 바이든이 한국을 방문했단 뉴슬 보면서 왜기의 추억이 소환되는 바람에 깜짝 놀랐잖아. 국기에 대한 맹세. 걸 보면서 말야. 우리가 왰던 국기에 대한 맹세. 것관 다르게 걸 많이 수정 보완해서 아주 고무적으로 진화를 시켜놨더라고.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살포시 얹는 것은 그대로드마안? . . . . . "나는 자랑스런 성조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미국 에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2천 22년 모월 모일 주방장 윤 완용 외 국힘반점 직원 일동.~~~ I agree to the terms of service Update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