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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책임져야할 과거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책임지지 않았고, 이제는 그 독재자의 딸이 대한민국 제1당의 대통령후보가 됀 현실을 외국 언론들도 의아해합니다. 대한민국국민 절반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 합니다. 자신의 성과를 위해 핸대건설을 부도직전까지 몰고가고, BBK, 임기중 여러 비리와 국민과 소통 없이 측근비리를 다이아그램을 그려야만 볼 수 있는 이명박대통령, 이제는 그것 위에 아버지의 과거를 추앙하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후보. 다음은 어떤 사람이 대통령후보로 나올지, 궁금합니다. 이런, 기가막힌 일이 벌어지는 것은 국민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새누리당을 탓 하기전에, 먼저 우리를 돌아봐야합니다. 여기 workingus에 오는 분중에 이번 총선 투표하신 분 얼마나 됍니까. 노인대학에서 단체로 가 투표하는 한표와 석/박사학위 받고 해외에서 행사하는 한표는 100% 같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하기전에, 내 자신은 얼마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참여하고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고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가 21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자택 거실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진을 뒤로하고 서있다. 박아름 기자 parkar@hani.co.kr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씨의 37년
이웃들조차 집 근처 얼씬 못해
누군가 돈내고 쌀·연탄 보내줘
항상 과묵하고 강직했던 남편
박정희 대통령 자격없다 열변
애들 다칠까봐 조용히 살았다
이제 진실규명 진짜 싸움 시작서울 강남구 일원동에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가 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대 초반 지어졌다. 1975년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88)씨는 이 낡은 아파트의 20평 집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지난 17일 저녁 찾아간 자택에서 김씨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방 2개와 거실이 딸린 이 아파트에서 김씨는 혼자 지낸다. 슬하의 3남2녀는 번갈아 전화해 안부를 묻는다. “나 안 죽었다고, 걱정 말라고 말하죠. 혼자 사는 게 편해요.” 김씨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달 초 어느 날 장남 장호권씨가 김씨를 찾아왔다. 아들은 그저 안부를 물으려는 게 아니었다. 장준하 선생의 머리뼈에서 둔기에 얻어맞은 듯한 함몰 흔적이 발견됐다고 아들은 전했다. “틀림없지?” 김씨가 물었다. “틀림없습니다.” 아들이 답했다. “이제 됐다.” 김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노령임에도 김씨는 또박또박 말했다. “절대 실족사는 아니고 누군가 죽인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이제 진실을 밝히는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양의 탈을 쓰고 활보하는 잔당을 없애야죠.”
다시 싸움이 시작되기까지 37년이 걸렸다. 남편이 세상을 떴을 때, 김씨는 51살이었다. “아이들이 다칠까봐, 시대가 무서우니까, 말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다”고 김씨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남편과 아내는 원래 사제지간이었다. 해방 전 평안북도 정주시 어느 소학교에서 김씨는 학생이었고 장 선생은 교사였다. 김씨가 열여덟살이 되던 1943년 11월 둘은 결혼했다. 얼마 뒤 남편은 학도병에 입대했다 탈출해 광복군에서 대위로 활동했다. 해방 뒤에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군사정권 시절엔 유신 철폐 운동을 이끌었다.
“과묵하고 강직한 분이었어요. 허튼 얘기 한번 안 했습니다. 한번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뭔가 설득하려고 집을 찾았다가 그냥 돌아가면서 ‘참 지독한 분입니다’ 하고 간 적 있어요.” 생전의 남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늘 혹독하게 비판했다. “‘일본놈 앞에서 자기 이름 바꾸고, 광복군은 씨를 말려 죽이겠다 한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생각하겠느냐. 다른 사람은 다 대통령 자격 있어도 박정희는 자격 없다’고 했어요.”
그랬던 남편은 의문 속에 세상을 떴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8년 동안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24시간 내내 서울 중랑구 상봉동 집 근처를 서성였다. 동네 꼬마들은 중정 요원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중정)아저씨들 저기 있어요’ 하고 저한테 일러바치기도 했죠. 그러면 아이들 안심시키려고 ‘우릴 지켜주려고 하는 거야’라고 달랬죠.” 그런 분위기 때문에 이웃조차 집 근처에 얼씬 못했다.
결국 도움은 익명이어야 했다. 쌀집에서 갑자기 쌀을 갖다주거나, 연탄집에서 연탄을 갖다주곤 했다. 누군가 먼저 돈을 지불한 것이다. “담 너머에서 누군가 국수를 던져놓고 가면 그걸 삶아 먹기도 했다”고 김씨는 말했다. 아들 둘은 대학을 중도에 그만뒀다. 딸 둘과 막내아들은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마쳤다. 익명의 기부자가 등록금을 대신 내준 적도 있다.
그 시절을 모두 보낸 이제서야 진실을 밝힐 작은 실마리가 발견됐다. “(타살 의혹을 다룬) <한겨레> 기사가 났을 때 정말 기뻤어요. 신문을 여러 부 사서 이웃들에게 나눠줬어요.” 김씨의 근심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나 같은 아픔을 당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남편을 원망한 적은 없다고 김씨는 말했다. “남편 덕에 임대아파트에도 살잖아요. 자식들 모두 잘 컸어요. 점심은 집 앞 복지회관 가서 먹고요. 딱 필요한 만큼 갖고 사는 거죠.” 김씨는 국가보훈처에서 다달이 나오는 100만원으로 생활비를 해결하며 지낸다.
이웃 주민들은 김씨가 장준하 선생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용돈을 모아 노인들에게 약을 사주고, 아이들 교복도 소일 삼아 수선해주는 인정 많은 할머니’라고 이웃들은 김씨를 칭찬했다. 김씨의 남편이 박정희 정권 시절 돌아가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는 이웃 윤아무개(61)씨는 “국가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은 국가가 잘 돌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의 작은 거실 벽에는 장준하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허재현 박아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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