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보다는 인성이 중요해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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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230.116 600

    앞으로 일주일쯤 후면 한국 총선결과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 결과가 궁금하지 않다. 왜냐하면 뻔하기 때문이다. 뻔한 선거는 보통 북한과 같은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지 진정으로 묻고싶어진다.

    아니다. 이 묻고싶은 질문을 다시 정정해서 말하고 싶다. 한국은 북한보다 과연 더 개방적인 사회인지를… 진정으로 개방적인 국가시스템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면, 왜 총선거 결과가 북한처럼 뻔하게 내다 보여지는지를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해야만 할것이다.
    뻔뻔하게스리, 태평성대라서 총선결과가 쉽게 예측된다든지, 친일파들이 주류인 한국사회의 지배층들이 조국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북한에 귀순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할 듯 싶다. 왜냐하면 북한은 (그들 표현에 따르면) 존엄하시다는 김씨일가의 대를이은 은혜로운 통치로 지상낙원이 이루어진지 오래라니까…
    (이러한 이데올로그는 사실 삼성공화국내에서의 가치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문득 신문칼럼을 읽다가 의미심장한 내용을 보게되었다. 아래와 같다.
    <역사학자라는 이병한씨의 연재물 “유라시아 견문기”에서 인용했음>
    아래 인용글들을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명백히 아닌 중국을 염두해 보면, 전적으로 틀린말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위대한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은 비민주적인 국가인 중국과의 무역으로 먹고 살다시피 해오고 있다. 특히 석탄과 석유없이 민주주의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다는 시각이 신선하다. 글쓴이가 옳다면, Climate Change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명백한 오작동 시그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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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의 이상은 근대의 신화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계몽주의적 오해 위해 세워진 모래성 같은 제도이다.
    트럼프 현상 또한 민주주의가 쇠퇴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면 아래 민낯이다. 100년도 안 된 이 새파란 제도는 20세기 후반 줄곧 오작동 했다. 당장 세계 지도를 펼치고 민주주의 국가들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그 중 훌륭한 거버넌스를 갖춘 국가가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기 바란다. 열손가락 꼽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주어도 1할이 채 안 된다.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미심쩍은 제도이다. 그럼에도 외면하고 간과했을 뿐이다. 고도성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의 풍요가 민주주의의 실상을 가렸던 것이다.

    나는 1인 1표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가 화석 연료 시대의 예외적인 정치 제도였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가고 있다. 아테네에서 반짝했다가 2000년이 넘도록 부정당하고 기각되었던 제도가 (일시적으로) 부활한 마법의 비결에도 지하자원의 남용이 있었다고 여긴다. 인간 사회에 과도한 에너지가 일시에 투입되면서 그 무질서(자유 상태)를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정치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립 과정과 석탄과 석유의 발견 과정, 그리고 민주주의를 유일 신앙으로 삼는 학문과 사상의 확립 과정은 중동과 유럽으로 서진하면서 차차 살펴갈 작정이다.

    즉 20세기의 번영은 석탄과 석유를 때우며 이룬 것이지, ‘각성한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들의 집합적 의지로 성취한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민주주의는 인민들의 붉은 피가 아니라 땅 밑의 검은 기름을 먹고 피어났던 것이다. 헌데 그 지하자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저성장 혹은 성장 없는 살림살이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만큼 잘 사는 아들이 나오기 힘든 시대로 진입한다. 20세기만큼 풍요로운 세기 또한 도래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럴수록 민주주의의 오작동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인간 해방’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자원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자유인’을 동경하기보다는 聖人(성인)을 존경했던 정치문화가 재차 기지개를 펼 것이다. 인권(Human Right)을 내세우기보다는 人性(인성) 도야가 강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