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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멀지 않은 서울 효자동 자하문로 70번지. 주한 중국대사관. 4층 건물 옥상에 오성홍기(五星紅旗)가 펄럭이고 있다. 봄비가 흩뿌리고 간 거리 위로 꽃샘바람이 차갑다. 길 옆으로 빼곡하게 늘어선 전경버스 뒤로 굳게 닫힌 대사관 정문이 보인다.
길 건너 옥인교회 앞. 조그만 텐트 안에 담요와 파카를 뒤집어쓴 40대 후반의 가녀린 여인이 웅크리고 있다. 탈북여성 1호 박사 이애란(경인여대) 교수다.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에 항의하며 오늘로 15일째 단식 중이다. 함께 단식농성을 하던 박선영(자유선진당) 의원이 탈진해 실려나간 뒤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변에 ‘내 친구를 구해주세요(Save my friend)’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death)’라는 영문 구호가 보인다. ‘대사님, 대사님의 가족이라면 돌려보내겠습니까’라고 중국어와 영어로 된 호소 문구도 보인다. 이곳에 들른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배 고파서 넘어온 게 죄입니까’ ‘후진타오는 김정은의 하수인 그만두라’는 항의성 메모도 눈에 띈다. 중국 정부는 이 교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교수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는 허기와 냉기를 참으며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대통령도 못 바꾸는 중국의 정책이 제가 이런다고 바뀌겠어요? 제가 여기서 이러는 건 탈북자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섭니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기자에게 이 교수는 “광우병이 무섭다고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동족이 겪고 있는 참상에는 왜 침묵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탈북자 송환 문제는 보수와 진보 같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처형되고,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생명과 인권의 문제인데 어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촛불시위 때 시민들이 보여준 자발적 참여 열기의 10분의 1만 있어도 중국이 탈북자들을 함부로 북송하진 못할 것”이라고 했다.
탈북자 문제는 중국으로서도 곤혹스러운 문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온 탈북자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북한 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조종(弔鐘)이 될 가능성이 크다. 1989년 9월, 동독을 탈출한 주민들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가 난민으로 인정해 서독행을 허용한 것이 동독 엑소더스의 기폭제가 됐다. 그로부터 두 달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듬해 동독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중국이 유엔난민협약에 따라 탈북자들에 대한 난민 지위 심사를 유엔난민기구(UNHCR)에 맡기려면 북한인들이 중국 땅으로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사태를 각오해야 한다. 변방의 안정을 중시하는 중국 정부로선 용납하기 어렵다. 중국이 탈북자들을 경제적 이유로 국경을 넘어온 ‘불법 월경자’로 규정하고,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고 있는 근본적 이유다. 탈북자 문제는 중국이 북한의 붕괴와 한반도 통일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해결이 힘든 난제다.
탈북자 북송 문제에 대한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그동안의 ‘조용한 외교’에서 ‘공개적 외교’로 방침을 바꿨다. 대통령까지 나서 강제 송환 중단을 촉구하고, 유엔인권이사회에 정부 대표를 보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이나 압력에 굴복하는 나라가 아니다. 시리아 사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외교를 통한 공개적인 압박은 탈북자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면서 한·중 관계만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물밑 교섭에 의존하는 기존 방식으로 돌아가고, 대신 민간이 나서야 한다. 인도주의에 호소하는 시민들의 단합된 목소리로 중국의 여론을 움직여야 한다. 중국 정부도 여론을 무시하긴 힘들다. 이 점에서 중국 내 일부 지식인 사이에 탈북자 강제 송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한류의 주인공인 연예인들이 지핀 불씨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이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다.
“언제까지 단식농성을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촛불을 든 시민 400명만 중국대사관 앞에 모여도 여한이 없겠다”며 “적어도 그때까지는 농성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무관심에서 벗어나 탈북자들을 위해 촛불을 들자. 촛불의 열기로 탈북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하자. 그렇게 한다고 중국이 정책을 바꾼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권을 말하고, 동포애를 말하고, 통일을 말할 자격이 없다. 북송 위기에 처한 탈북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천, 수만 개의 촛불이 자하문 거리를 뒤덮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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