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하이라이트. – 이 지연

  • #98961
    ByteClub 69.***.230.41 2676

    젊었을때 저의 로망. :-)
    지금봐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은 저 미모.
    그리고 잠자리 선글라스를 낀 전영록의 압박 ㅡㅡ;;
    게다가 전기기타에 캐이블도 안 꽂고 폼만.. ㅋㅋㅋ

    • 타고난혀 24.***.41.238

      …이쁘네요… >.<..

    • Pianoman 74.***.106.238

      저의 가슴도 설레게 한 그녀입니다. 인기 짱일때 모든것 포기하고 사랑을 따라 미국으로 간 순정만화의 주인공 이기도 하고요. 아래는 이지연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을 위한 펌글입니다.



      이지연(이진영)
      생일 : 1970년 10월 31일
      데뷔 : 1987년 12월

      수없이 떴다 지는 연예계의 크고 작은 별들처럼 이제는 옛 팬들의 기억 속에서만 반짝거리고 있지만, 이지연이란 가수는 ’90년대의 H.O.T나 2000년대의 보아 혹은 장나라와 같이 ’80년대를 대표할만한 틴 아이돌 스타였다. 김완선을 필두로 김승진, 박혜성 등의 10대 스타를 배출한 ’80년대의 시장은 그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나긴 조용필의 독주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의 대중 음악은 주현미를 중심으로 한 트로트 진영과 조용필, 전영록, 김수철, 이문세, 윤시내, 정수라, 나미, 이선희 등이 혼전을 벌이던 메인스트림 진영, 헤비메탈과 언더그라운드의 조용한 혁명 등이 힘 겨루기를 하고 있었고 전 세대에 비해 풍요로웠던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소방차와 이지연, 이상은 등이 돌풍을 일으키며 대중음악의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했다. 우리의 ’80년대는 레이건(R. Reagan)과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보수주의로 평가절하 되는 미국과 달리 전에 없던 르네상스를 누렸던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인프라가 ’90년대의 혁명기를 낳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지연은 바로 이 질풍노도의 한복판에서 짧지만 화려하게 피워낸 한 떨기의 꽃봉오리였다.

      대구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그녀는 고교시절 재뉴어리(January)라는 그룹에서 보컬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을 부르던 그녀는 그룹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의 시선을 빼앗고(이 지점은 두고두고 메탈 팬들에게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곧이어 가수와 매니저로 한솥밥을 먹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본명을 가지고 모델로 먼저 데뷔했으며 이어 유현상의 곡으로 꽉 채워진 첫 앨범을 발표한다.

      데뷔 곡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는 “손짓하는 가을비”처럼 조용히 다가와 순식간에 우리를 압도해 버렸다. 더디지만 조금씩, 사춘기를 살고 있는 학생들의 귀를 사로잡은 이 곡은 곧 라디오와 모든 차트를 점령했으며 뒤이어 ‘그때는 어렸나봐요’, ‘난 사랑을 아직 몰라’, ‘남겨진 슬픔, 사랑’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대들의 감성을 포획했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절정을 누리던 그녀는 7개월 뒤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이상은과 불꽃튀는 신인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녀와의 라이벌전은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괴담처럼 번져 몇 달간 악성루머에 시달려야 했지만 연말 시상식장의 꽃다발은 그녀에게 돌아갔다. 이 인기에 힘입어 , 등 각종 드라마에 출연했던 그녀는 다수의 CF로 올림픽이 열리던 해를 화려하게 마감한다. 그리고 ’89년, 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2집을 내놓는다. 가수 이외에 작곡가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전영록의 힘을 빌은 두 번째 앨범은 ‘그 후론’이 먼저 전파를 탔지만 곧이어 ‘바람아 멈추어다오’와 ‘슬픈 안녕’이 팬들의 선호도에 점령되었으며 고3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부른 ‘졸업’ 역시 많은 청춘 군상들의 가슴속에서 흔들거렸다.

      ‘Love for night’으로 포문을 열었던 3집 활동은 타이틀곡이 뛰어났음에도, 성인 취향의 ‘늦지 않았어요’가 후속곡으로 더 많은 인기를 얻었고 ABU가요제에 나가 3위에 입상하면서 그녀는 대내외적으로 인지도를 형성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노선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당시 같이 밤무대 활동을 했던 무명의 히 파이브(He5)에서 리드 싱어 정국진씨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기 때문 이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인기가 하락되는 대부분의 가수와 달리 이지연은 그녀가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미국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후 음악계에서 그녀의 위치는 빠르게 지워져 갔다. 그녀는 1년 반만에 피노키오란 기획사를 차리고 ‘삶은 한번 뿐인걸요’라는 곡으로 컴백을 시도했지만, 그녀의 용기 있는 시도에 배반당한 팬들은 4집을 철저히 외면했으며 아무도 그녀의 손짓에 화답하지 않았다. 인기를 걷어차 버리고 사랑을 얻은 여왕은 이렇듯 허무하게 왕관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최병걸과 정소녀가 불렀던 ‘그 사람’이란 곡을 어느 CF에서 살짝 들려주었던 그녀는 현재 사업하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언젠가는 좋은 노래로 다시 한번 팬들 곁으로 다가올 날을 손꼽아 고대하고 있다. 2003/02 지운(trajanus11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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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계를 배경으로 한 순정만화’ 같은 이야기.
      매니저 한다고 원래 활동하던 밴드까지 버린 유현상씨는, 저때 ‘채인’ 이후로 한동안 폐인이 되었다가 나중에 또 다른 유명인과 결혼했다고 하죠. 수영선수라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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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orts.hankooki.com/lpage/music/200612/sp2006120415533458550.htm

      eyenews.hankooki.com/gisa_view.php?gisa_id=00049808

      news.hanafos.com/entertain/view.asp?ArticleNo=244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