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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기적의 독해술, 기적의 한국 경제
2009.7.28.화요일
우리 짜리지 언론들과 정부는 어제 날짜로 해외에서 날라온 기사 하나에 희색이 만연했다. 이들에 따르면 유명한 블룸버그 통신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이라는 양반이 우리나라 경제의 급속한 회복에 대해 극찬을 늘어놓으며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는 거다.
울나라 신문들의 관련 기사 제목들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조선일보 : “한국 경제, 빠른 회복 가능”
중앙일보 : “한국 경제 회복세에 경의를 표합니다”
머니투데이: “페섹이 한국에 모자 벗고 경의 표한 이유는?”
문화일보 : “한국 경제회복에 경의를 표한다:
경제에 대해 X도 모르는 필자, 머 그렇다길래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갈라고 했다. 근데 우연한 기회에, 브룸버그 통신에 뜬 페섹의 글 원문을 보게 된 거다.
하지만 그 글의 제목은 모자도 경의도 아닌, 이런 딱딱한 것이었다.
Call for Rapid Recovery Is Bubble All Its Own
빠른 회복 추구 자체가 거품이다함빡 웃음을 짓는 산타클로스 같은 페섹의 얼굴과 장미꽃이 흩뿌려지는 우리나라 지도까지 나오진 않더라도, 이건 좀 심하지 않냐. 경제 성장에 모자를 벗었다더만 이게 머꼬.
뭔가 냄새가 난다. 구린내가.
아 씨바 또 글 써야 되나… 달콤한 낮잠의 유혹을 이기고 상당히 긴 원문을 읽어 내려가기로 마음먹는 데만 30여분이 소요되는 등,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이 글은 탄생되었다.
근데 읽어보니 제목 바로 밑에 모자 이야기가 있긴 있다.
Hats off to officials in Seoul.
한국의 당국에 모자 벗어 경의를 표한다.South Korea’s ability to expand at the fastest pace in almost six years is some of the best news Asia has had in a long while. It’s a sign that even with the $14 trillion U.S. economy in chaos, Asia is beating the odds and holding its own.
한국이 6년만에 최고 수준의 성장세를 기록한 점은 아시아 경기에 있어서 실로 오랜만에 듣는 좋은 소식이다. 14조 달러 규모의 미국 경제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아시아는 열세를 딛고 나름대로 버티고 있다는 징후이다.올레! 이건 진짜 좋은 이야기네? 구린 거 아니네?
이렇듯 미국의 유명한 사람도 울나라 경제의 기적적인 회생을 인정하고 있다. 가카의 경제 살리기도 결국 삽질로만 끝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덤핑으로 팔아먹은 민주주의와 비참하게 죽은 용산의 원혼들이 최소한 돈으로라도 돌아왔다 이 말이다.
마, 10억을 받았습니다… 류의 찜찜함이 맘 한구석을 긁어 대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거 아니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지켜본 박태환의 탈락을 보상이라도 하듯, 나는 충혈된 눈까리를 꿈뻑이며 계속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린 지금 희망이 열라 필요한 상황 아니냐. 페섹은, 아니 가카는 앞으로 3년 반 동안 우리 국민들의 박카스가 되어 줄 지도 모른다.
근데…
조까고 있네…
바로 다음 문장이 이거다.
“For now, at least”
적어도 지금 당장은.솔직히 말하자. 필자 영어 좀 한다. 영어권에서 6년 동안 학교 다녔다. 저 문장 저거 나오면 대개 분위기 나빠진다. 이런 줄 알았지만 사실은 저거다… 머 이런 식으로 간다.
아니나 다를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나머지 글 전부가 반전이다. 아 씨바 또 낚인 거다.
긴말 할 것 없이, 찌라시 언론들에 소개되지 않았거나 소홀하게 다뤄진 원문의 주요 내용들을 좀 발취해 보자꾸나.
*loose policies may be doing more to fuel bubbles that merely provide the illusion of economic recovery, leaving Asia even more vulnerable to further problems in markets.
느슨한 정책은 경기 회복의 환상만을 심어주는 거품만 키우는 꼴이 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아시아는 차후 시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더욱 취약해 질 것이다. *The 2.3 percent growth Korea generated in the second quarter dovetails with optimism that East Asia’s rebound from the global crisis may be “V-shaped,” not U-shaped or W-shaped. The Asian Development Bank said just that in a report last week. It recommended that central bankers retain expansionary monetary policies even as risks to recovery dissipate.
That’s just what worries me, and China is a case in point.
2분기 한국이 기록한 2.3% 성장은 글로벌 위기에서 동아시아의 회복 곡선이 U나 W가 아니라 V 모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 전망은 아시아 개발은행이 지난주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내 놓은 바 있다. 이 보고서에서 아시아 개발은행은 아시아 각국 중앙은행들에게 경기 회복에 대한 위협 요소가 축소되는 중에도 팽창적 통화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내가 우려하는 지점이다. 중국을 보면 명확해진다.
*It’s an Asia-wide phenomenon. Signs of life in the region’s economies are compliments of massive stimulus efforts that will become less potent as time goes. That will put the onus on central banks to trim interest rates to support markets. Again, this is a short-term fix, not a long-term solution. It will only lead to new asset bubbles that look like economic growth.
이런 현상은 아시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역내 경기의 회복세를 알리는 징후들은 대규모 경기부양 노력에 대한 반응일 뿐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발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중앙 은행들은 시장을 지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추가 금리 인하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단기 조정책이지 장기 해결책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경제 성장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산 거품만 새로 키우게 될 수밖에 없다.
*In a sense, optimism about a V-shaped recovery in Asia is becoming a bubble all its own.
즉 어떤 의미로는, 아시아의 V 곡선 회복세에 대한 낙관론 그 자체가 거품이 되는 것이다. *The global crisis will eventually end and Asians will return to task of upgrading * economies and raising living standards. We’re not there yet, and hopes markets can continue heading for the stratosphere won’t be supported by realities on the ground.
글로벌 위기도 언젠가는 끝 날 것이고 아시아인들도 경제 발달과 생활 수준 향상에 다시 전념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시장이 계속 최고점을 경신하여 성층권까지 뚫고 갈 것이라는 희망은 지상의 현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자.
원문 전체를 보실 분은 여기를 클릭
…머 대충 이 정도면 이 글의 논조가 먼지 알만 할거다. 이 글의 대부분은 당장의 경제 지표에 속지 말고 거품을 조심하라는 경고로 채워져 있을 뿐, 울나라 언론들 표현처럼 한국 경제 발전에 경의를 표하는 내용과는 거의 무관하다. 사실 그 부분이 들어있는 첫 단락은 나머지 단락의 경고와 부정적인 내용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리드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런 걸 우리 말로 떡밥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국내 언론들은 다음과 같은 분위기로 이 글을 전하고 있다.
“서울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경의를(Hats off to officials in Seoul).”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사진)의 26일자 칼럼 첫 문장이다. 모두가 허덕이는 상황에서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 경제에 존경심을 표한다는 의미였다. 한국이 2분기 2.3%(전 분기 대비)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라고 했다.
(후략. 중앙일보)27일 나라 안팎에서 한국경제에 관한 ‘굿 뉴스’가 쏟아졌다. 미국 통신사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Pesek)은 이날 칼럼에서 “한국이 2분기에 2.3%의 성장률(전기 대비)을 기록한 것은 동아시아 경제회복이 U형(긴 침체 후 회복)이나 W형(이중 침체 후 회복)이 아니라 V형(급반등 회복)이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에도 들어맞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한국 경제의 빠른 회복세가 아시아 경제 회복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며 “(경기부양책의 성과를 낸)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후략. 조선일보)윌리엄 페섹은 27일 “한국 경제가 정부의 강력한 부양책에 힘입어 빠르게 회복세를 타고 있다”며 “한국 정부에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블룸버그통신의 경제 칼럼니스트인 페섹은 “한국이 지난 2분기 전분기대비 2.3% 성장세를 기록했다”며 “미국 경제의 혼란에도 아시아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AD 또 “한국의 성장률은 동아시아 경제가 V자형 회복을 보일 것이라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낙관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행이 아시아 주요 중앙은행 가운데 가장 빨리 금리를 인상할 것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며 “8개월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이슬란드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으로 전망됐다”고 말했다
(한국재경신문. 기사 전문)“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 블룸버그의 대표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의 칼럼 첫줄입니다. 페섹이 한국의 경제 위기 극복 능력을 극찬했다고 하는데요. 페섹은 칼럼에서 “한국은 지난 2분기 전분기대비 경제가 2.3% 성장하는 등 6년만에 가장 빠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면서 “이런 점은 미국 경제가 혼란에 빠져 있음에도 아시아가 굴하지 않고 있다는 단적인 예”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가 ‘U’자나 ‘W’자가 아닌 ‘V’자형 회복세를 보일 것이란 겁니다. 그러면서 페섹은 “8개월 전만 해도 트레이더들은 높은 외채 부담 때문에 한국이 아이슬란드처럼 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국은행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금리를 인상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다만 중국에 대해선 “버블이 형성되고 있다”면서 “대규모 경기부양책 자금이 증시로 지나치게 배분돼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머니투데이. 외신 브리핑 전문)이렇듯 실제 글 제목과 주제는 전혀 다른 내용인데도 일부만 침소봉대해서 기사 첫머리로 뽑거나, 막상 중요한 부분들은 뒤쪽에 숨겨 놓고 잔소리인양 희석해 버리거나, 내용을 바꿔 왜곡해 놓거나 아예 그냥 빼 버린다. 이런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울나라 경제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고, 또 정부의 업적을 칭송함으로써 지금의 첨예한 정국에 어떻게든 물을 탈려는 거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해야 입 아프다.
이렇게 보면 페섹이 왜 굳이 첫 문장을 ‘Hats off to officials in Seoul’ 이라고 뽑았는지도 알 수 있다. officials 라는 단어는 ‘공무원들’ 이라는 뜻이다. 결국 이 말은 우리나라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아닌, 정부 공무원들에게만 경의를 표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이라면 Hats off to Korea’ 나 ~ Korean economy 라고 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그럼 왜 굳이 이렇게 썼을까?
그건 여기에 페섹이 이 글 전체에 걸쳐서 이야기하려고 한 중심 주제가 슬쩍 비꼬아진 채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현재 경제 지표들이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아닌, 정부의 인위적이고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에 바탕한 열라 불안한 것임을 우회적으로 꼬집은 거다.
머 그럴까 싶을지 몰라도 서양 사람들은 글이나 말에 이런 류의 중의적이고도 반어적인 풍자(sarcasm)를 집어 넣는 것에 아주 익숙하다. 최소한 이런 능력에 관한 한 우리에 비해 훨씬 세련되고 앞서 있는 그들이라는 점, 미드 좀 본 사람들이라면 다 안다.
반면 이런 행간의 의도를 깨달았을 리 없는 울나라 꼴통 오피셜들은 다음과 같이 기뻐하고 있다.
민주당의 지독한 이명박 정부 발목잡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 곳곳에서 실물경제회복 청신호가 켜지고 있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의 경제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한국경제의 빠른 회복과 관련해서 한국정부 관계자들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안상수 발언. 한나라당 7월 28일 원내대책회의)
머 지들도 힘들 텐데 나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욕할 생각은 없다. 페섹 자신도글 중간에 우리나라를 폄하할 생각은 아니라고도 했다. 다만 이런 언론 보도만 믿고 이게 무슨 극찬 일변도인양 우쭐한다면 전문가가 기껏 해준 조언도 아무 쓸모도 없게 된다는 점이 문제다. 게다가 이걸 이용해서 최근 미디어법을 포함해 자신들이 자행한 온갖 만행들을 미화하려는 수작을 벌여서는 더욱 곤란하다.
하지만 당연히 그렇게 이용될 것이고, 언론들의 왜곡 보도 역시 바로 그것을 뒷받침해 주기 위한 거다. 일마들이 영어를 못해 번역을 틀리게 하는 게 아니다. 알고서 왜곡해서 전달할 뿐이다. 그래서 더 미운 거고.
그러니 다들 속지 말자. 물론 우리 경제가 좋아진다면야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가카가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마저 기적적인 경제 발전의 대역사를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페섹의 말대로 이제 약발이 떨어지고 나면 조만간 버블이 나타나기 시작할게 분명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국에서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로 대변되는 삽질 경제 정책과 양도세와 종부세 인하 등으로 사라져버린 수십조의 세원 등이 조만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는 부자들은 더 부자되고 가난한 서민들은 하나 둘씩 무너져 나가는 미래가 머지 않았다.
와중에 오늘도 노동자들 머리 위로 스티로폴 녹이는 최루액이 부어지고 얼굴에 전기충격 총이 발사된다. 옛날 박정희 시대부터 일단 나라만 잘 살게 되면 그 담엔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는 약속만 믿었던, 수출 역군이라는 보람에 배고픔을 참으며 견뎌온 이들이 2009년 지금까지도 두들겨 맞고 밟히고 내쫓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진짜로 만들려고 했던 어떤 바보는 이미 죽고 없다.
이런 대한민국에서라면 나는, 아무리 좋게 나온다 한들 경제 지표 따위를 믿을 생각 전혀 없고, 정부 관계자들에게 모자를 벗을 생각도 전무하다.
열분들은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