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女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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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oica 98.***.187.97 4485

    여승(女僧)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
    Fade Out – 강은일(해금)

    • ISP 38.***.181.5

      와… eroica 님은 이런 시들을 어디서 접하시는지요.

      정말로 주옥 같은 시들을 어디서 접하시는지요.

      고삐리들 인기에 편승하는 시인 같지도 않는 것들이 시인 입네 하고

      떠드는 세상에서 이런 주옥 같은 시들을 찾아 내시는 재주는 실로

      대단 하다고 봅니다.

    • 꿀꿀 64.***.152.167

      좋은 글 감사 용~~

    • eroica 98.***.187.97

      ISP님,
      감사합니다… 한 7~8년정도 ㄷㅚㅆ을겁니다. on-line이나 off-line상에서 시를 접할때마다 마음에 드는것들은 file로 copy를 해놨죠. 예전에 활동하던 on-line club이 시를 주제로한 club은 아니었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죠. 그 이후로 가끔씩 시간이 있을때 마다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

      꿀꿀님도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밤되십시요…

    • sunpan 98.***.173.40

      on-line club이 무엇인가요

    • Block 12.***.134.3

      저도 eroica님의 글모음과 음악에는 팬입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roica 98.***.187.97

      sunpan님,
      학교다닐때 몸담았던 동아리의 졸업한 선후배들이 만든 평범한 친목을 위한 club이었고요 몇몇 선배들이 시를 좋아해서 저도 그때 조금 알게되었습니다.

      Block님,
      제가 올린시를 잘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분 모두 좋은밤되세요….

    • 꿀꿀 64.***.152.131

      eroica 님,,소소한 댓글에 감사라니요,,
      저도 어렸을적 약간 글쓰는걸 좋아해서 나름 문학소년 이란 소릴 듣고,,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같은 데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요,,물로 수상경력은 없지만,,
      공장지대로 혼탁한 인천에서 시청앞 잔디밭에 모여,, 푸른 하늘을 보며 글짓기 하던 기억이 있네요,,
      중3때 싸이코 국어 담임 선생님 덕분에,, (인기투표 라는걸로 매주 애들은 서너명씩 하루종일 팼던 기억이,,ㅋㅋ 저도 한번 걸려서 죽다 살았다는,,) 문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거든요,,ㅋㅋ
      암튼 건강하시고,, 좋은글 자주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