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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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oica 69.***.144.179 3969

    아버님의 일기장

    이동순

    아버님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종일 본가(終日 本家)’

    ‘종일 본가’가

    하루 온종일 집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다

    이 ‘종일 본가’가

    전체의 팔 할이 훨씬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며

    해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끼시고

    그날도 어제처럼

    ‘종일 본가’를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일부러 ‘종일 본가’를 해보며

    일기장의 빈칸에 이런 글귀를 채워넣던

    아버님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던 심정을

    혼자 곰곰이 헤아려보는 것이다

    ==

    Two For The Road – Charlie Haden & Pat Metheny

    • ignoramus 71.***.196.28

      eroica님이 왜 이 시를 고르셨을까 궁금하네요.

      혹 사연이 있으신지…

      우연히 보게 된 일제 때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의 일기가 생각이 나서 달아 봅니다. 좀 OT지만…

      http://www.biblekorea.net/index_diary.html?my_uidx=171

    • 꿀꿀 75.***.115.173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퇴근후,, 같이 산책도 하고 외식도 하고,,같이 TV 보고 웃고 떠들고,, 그렇게 사는게 얼마나 그리운지 모릅니다,

    • eroica 69.***.144.179

      이 시를 고른 사연같은건 없고요 그냥 지난 일요일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전화통화하면서 아버지 목소리가 왠지 기운없고 쓸쓸하게 들리더군요… 저희 부모님도 연세가 많아 특별히 일하시는것없이 집에만 계시거든요. 김교신선생을 언급하시니 갑자기 다석 유영모선생도 생각이 나는군요.

      옛날에 부모님과 같이 살땐 조금이라도 빨리 부모님밖으로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렇게 떨어뜨리고 다른 새가족을 타지에서 꾸려나가니 그게 또 맘이 편하지가 안네요…..

    • 동감 66.***.21.222

      꿀꿀님의 말씀에 120% 동감합니다. 매일 저녁 8시 반에 하는 일일 드라마를 부모님과 아이와 같이 보고싶습니다. 많이 그립습니다.

    • eb3 nsc 76.***.33.228

      이번에 한국가면서…친정엄마와 큰딸을 집에 두고 남편과 저, 둘째딸 이렇게 셋이 다녀왔습니다.. 늘 함께 하던 친정엄마께는 좀 미안했지만… 7년 가까이 보지 못한 시부모님을 뵈러가면서.. 그 미안함을 뒤로 했습니다.. 늘 함께 하는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하는 시부모님.. 그래서..이번에 한국가서 엄청 잘 해드리고 왔습니다.. 두 분의 행복해 하시는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부모님 살아계실때… 잘 해 드려야 겠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와보니..친정엄마와 큰딸은 감기 몸살에 음식도 제대로 챙겨 드시지 않아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몸이 많이 상했더라구요… 그래서 당장 엄마 모시고 시장도 가고..맛있는 음식도 사드리고.. 다시 예전 기운을 되찾도록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부모님 사랑하세요..

    • 까탈김 24.***.41.204

      왠지 자꾸 다시 읽게 되는 시네요. 좋은 시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ignoramus 71.***.196.28

      시를 읽고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셨지만 아버님 살아 생전 함께 다녔던 봄날, 여름날, … 자라면서 보고 듣고 느낀 그분 삶 전체가 내 안에 사랑의 추억처럼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없으니 아이들에게라도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어야겠습니다. 봄이니 시간이 날 때마다 많이 데리고 다니기로…

      시속의 종일본가, 그리고 고독한 노년… 참 적막강산 같은 심정이 느껴집니다. 가끔 미국에서의 나의 노년은 어떨까 생각할 때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유영모란 분에 대해선 처음 알았습니다. eroica 님 덕에 그분 얘기를 읽으면서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그런 분들이 세세토록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