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했던 그 때가 그립네요.

  • #409390
    고릴라 98.***.1.209 3545

    요새 외로워서 그런가 고등학교 다닐때 무지하게 짝사랑 했던 음악선생님 생각이 자주 나네요.

    고등학교 오리엔테이션때 한눈에 반해서 3년 내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선생님 책상에 꽃과 편지를 남겨 두었드랬죠. 이걸로 전교에서 쫌 유명했습니다;; 여고인데다 선생님 인기도 많았는데 제가 하두 유별을 떨어서 선배들도 엄청 째리고;; 미움을 받았죠. 선생님 앞에선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반장인데도 선생님 수업시간에 차렷 경례를 맨날 고개 숙이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선생님도 맨날 놀리시고.. 선생님이 저 졸업할때 주신 디올 빨간 립스틱을 미국 올 때도 고이 가지고 왔고 선생님이 써주신 편지랑 사진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대학 들어가고 몇번 찾아뵙긴 했지만, 저도 진짜 남자친구가 생기고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횟수가 점점 줄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지만, 남자친구랑 다투고 해서 마음이 속상할 땐 정작 선생님 생각이 나드라구요.

    그냥 지나가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미 순수함을 잃은지 오래구나. 그런 생각.. 내 또래의 남자 친구를 만나 사랑하네 죽네 사네 해도 결국은 등돌리고 돌아서니 왠수보다 더 밉고.. 그땐 야자때 몰래 노천극장에 앉아서 친구들하고 선생님 얘기하고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관심보여 주면 얼굴도 벌게 져서 수줍어하던 나였는데.. 이젠 아줌마아닌 아줌마같이 되어서 남자가 뭐가 필요해 노후자금이나 착착 저금하며 살자. 늙어서 등긁어줄 남편이 없으면 장판에 돈이라고 깔아놔야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고;;

    순수했던 그 때는 이미 오래전 기억이고, 인생이 그냥 그렇게 살아지네요.
    밥 먹고, 돈 벌고, 나이 먹고.. 그냥 그렇게 살아집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짝사랑했던 그 마음이 지금은 너무 그립네요. 사춘기에 미숙하고 바보같았지만 정말 순수하게 누군가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그랬던 마음떨림이 그립네요.

    나는 언제까지나 선생님 앞에서 부끄러운 소녀같은 느낌일거 같은데..살짝 두렵네요. 선생님과 만나게 되면 서로 어떤 모습일까.

    이제는 긴 생머리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거 같아, 나잇값 좀 하려고 머리도 짧게 자르려고 생각중이랍니다.

    사는게 뭔지.. 매일 그냥 저냥 시간이 가고 가장 나같은 나는 오래 전에 죽은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쓸쓸해

    • 동감 71.***.188.43

      합니다. 매일 매일이 그냥 흘러가는 것 같아, 내 존재란 지금현실은 뭘까? 하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 ^^ 67.***.19.188

      ^^학교때 말씀하시니 저 역시 짝사랑하던 국어 선생님이 생각이 납니다.
      군대 가계신동안 편지도 꼬박꼬박하고,,, 답장까지해 주시던 선생님이신데..
      정작 휴가 나오셔서 학교에 들르시면 얼굴도 못봤던 수줍음 많던 나..
      미국 올때도 갖고 왔던 선생님의 답장들…
      사는게 뭔지…그런날이 있었는지도 잊고 살았었네요..
      원글님의 글을 읽다가 옛추억에 빠져 봅니다..^^

    • 아암 98.***.210.251

      혹시 원글님 학교가 정동에 있는 E여고?
      노천극장 하니까 문득 E고등학교가 생각나네요.
      옛날 생각도 나고… 고교시절 넘 좋았는데.

    • 원글 98.***.1.209

      아암님 혹시 선배나 후배님이신가요? 맞습니다. 이화여고 졸업생이랍니다. 5월에 노천극장 푸른 잔디에 앉아서 친구들과 도란 도란 수다 떨기도 하고 배꽃 그늘에 앉아 학교 우물에서 유관순 귀신나온다더라 하면서 귀신얘기도 하고.. 정말 그리운 시절이네요.

      어렵사리 알아내서 선생님께 메일 드렸더니 오늘 답장을 주셨네요. 사랑하는 딸아라고.. 헉 딸이라뇨 T.T 쌤 그래도 선생님은 제 첫사랑이란 말예욥~~~~ 순식간에 뻘쭘해지게 만드시긴..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한국가서 쌤하고 데이트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입니다.

      선생님께서 많이 늙으셨지만 맘만은 청춘이라고 하시는데.. 오매..완전 공감가네 하면서 왠지 모르게 슬퍼졌다는.. 어쩌다가 제 첫사랑 음악선생님하고 저하고 같이 늙어가는 이런 순간이 왔는지.. 인생 정말 너무 빠르네요.

    • 저두요 12.***.124.50

      고등학교 졸업한지 9년. 저도 영어 선생님을 엄청 좋아해서 친구들이 놀리고 그랬거든요. 나중에 선생님이 따로 불러서 수능 잘 보라고 엿(?)도 주시고 ㅋㅋ 그리고 풋풋했던 첫사랑 기억이 나네요. 정말 손만 잡아도 수줍었던 그 때 기억이 나서 즐거워요. 그 때의 제 모습이 그립기도 하고…

    • 심심최절정 24.***.89.82

      순수를 그리워하시는거 보면 아직도 많이 순수하신건가봐요.
      전 인생이 하나도 순수하지않고 확 드러죽겠다는 생각이 든후로
      옛날에 주고 받았던 선물들 편지쪼가리들 저걸 버려야지 버려야지하는데..
      사실.. 아직도 손을 덜덜떨며 버리지 못하고 이사할때마다 궁시렁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