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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텍하면서도 퇴근시간은 언제나 칼같이 지키려 한다. 물론 공식적인 퇴근시간이다. 일 많을때는 공식퇴근을 했더라도 어쩔수 없이 퇴근이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처리되지 않은 일거리들을 해결하곤 한다. 다만, 공식적으론 퇴근을 했기에, 답변을 부탁하는 이멜이나 텍스트 문자들에는 퇴근전처럼 굳이 답변할 의무가 없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 업무에 직접 관련된 일에만 몰두 할 수 가있어 퇴근이전과 퇴근이후의 노동에 대한 느낌은 그 뉘앙스가 각각 다르다. 마치 타율적인 노동과 자율적인 노동의 차이같은게 아닐까 한다.
그러다가, 어제 오후 4시 30분 즈음에 보스로부터 텍스트가 왔다. 나의 공식적 퇴근 시간은 오후 4시이다. 보스는 정말 정말 미안해 하면서, A라는 프로젝트에 대한 성사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질문하고, 갑자기 내일 아침일찍 자신의 보스와 회의가 잡혀서, 자신이 좀더 내용을 파악하고 싶어서 무리를 무릎쓰고 이렇게 연락한다고 하면서 또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퇴근이후라도 괜챦다고 하면서 그에게 전화를 직접걸어서 핵심적인 내용을 알려줬다.
전화를 끊고나서 갑자기 든 생각은 미국직장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잘 넘기지 않는다는 점을 느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은 퇴근이후엔 직장동료에게 업무때문에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선’이다. 나는 한국직장도 대기업에서 6년정도 경험이 있다. 아직도 그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 있는 대학동문들 얘기에 의하면 여전하다고 하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의 진자 직장생활은 사실상 퇴근이후 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중요한 업무결정과 직장내 인맥관리가 모두 퇴근이후에 결정되곤 했다는 기억말이다.
물론, 한국은 개발 도상국에서 세계 10대 선진국으로 발돋움 한 거의 유일무이한 나라이다. 위와같은 퇴근이후 생활에 대한 각자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주었다면, 이와같은 기적같은 국가발전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면에서 이해가 안될 것도 없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습관’이나 ‘물리학의 관성력’이라는 의미를 이젠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방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것 같다. 왜냐하면 이젠 개발도상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하는 직장인들에게 더 이상 ‘저녁있는 삶’을 주저없이 희생시키는 행위같은 것으로 직장내의 선을 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퇴근 이후의 삶이 결코 존중되지 않는 직장문화가 지난 6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다면, 그 기간내에 습관화 된 또는 관성력을 충분히 지니게된 ‘선을 넘는 행위들’은 또 다른 60여년 정도 (그러니까 2080년대)가 지나야만 사라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 세상엔 공짜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발간된 한 소설 책은 (정아은 작가의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전두환이라는 ‘악’을 탄생시키고 엄청난 죄를 저지른 그를 단죄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하는데, 정 작가는 이 책에서 “전두환이라는 악이 나타났을 때 아무도 제 구역을 지키며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정 작가는 ‘선’이 없는, ‘선’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전두환과 그 패거리들은 한국사회의 선을 넘는 문화에 촉매제를 들이부은 집단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한국사회의 잦은 ‘선을 넘는 행위들’은 전두환같은 인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먼 과거로는 친일파 청산의 실패까지도 집고 넘어가야만 그 뿌리부터 해결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사실상 한국사회의 지배층은 이들 친일파 후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정리되지 않는한, 한국사회 직장생활에서 ‘선이 지켜지는’ 직장생활은 어려울것 같다. 그래서 요즈음 젋은 세대들 (MZ)도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자살과 저출산으로 한국사회 절멸의 선택을 하고 있는것 같아만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사회 지배층들 중 적지않은 인간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대다수는 미국과 같은 외국의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 알고 지내거나 알고 지냈던 기러기 가족들은 한국내에서 서울 강남지역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이 제법 있었는데, 본인들은 물론이고 미국에서 성장했던 자녀들 모두 시민권 또는 최소한 영주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한국사회의 절멸을 걱정 할 이유는 누가봐도 없을것이다.
가난한 동남아 국가들의 젋은 처자들을 데려다가 식모로 부려먹게 다고 한 서울시장 오세훈을 적지않은 한국인들은 아마도 차기 대통령감으로 생각하고 있는것 같어 씁쓸한 미소를 짖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 동남아 처자들이나 오세훈같은 사람들이나 똑같은 인간으로서, 선을 넘어도 한참넘은 이따위 정책을 단 한치의 부끄럼도 없이 추진하는 오시장과 그와 유사한 한국 지배층들의 모습에서 봉건조선 시대의 썩어빠진 신분계급 양반층의 모습이 아니라면, 17세기 부터 대서양을 사이에 둔 노예무역을 주도한 악마들이나 다름없었던 유럽식민제국주의자들의 모습마저 엿보이고 있는 행태들이다. 그것은 누가봐도 분명한 퇴행적 모습일 뿐이다.
오시장 패거리들의 선택보다 오히려 사회전체의 절멸로 가는선택이 차라리 훨씬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