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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7일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정치 행태에 대해 자신과 맞붙은 15대 총선 당시에 빗대 “노 대통령은 역시 3등”이라고 비꼬았다.
이 전시장은 이날 건국대 부동산 대학원 초청강연에서 “15대 총선에서 종로 지역구에 노 대통령과 함께 출마해 내가 압도적인 표차로 1등을 하고 노 대통령은 3등을 했다”면서 “당시 3등 하신 분이 결국 대통령이 됐지만 최근 하는 것을 보면 3등은 역시 3등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기사)
자기는 1등, 노무현은 3등이었다니…난 노빠로서 명바기의 저런 비열한 말에 속이 상했다. 그래서 나는 명바기의 과거에 대해 약간 공부를 해 보기로 했다. 조사 방법은 간단하다. 기사 검색 사이트 카인즈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럼 잠시 살펴보자.
[ 이명박의 과거 ]
청계천으로 재미보더니, 대선 공약으로 경부운하를 들고 나온 바 있다. 명바기는 65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해서, 12년 후, 77년 현대건설 사장의 자리까지 오르고, 1991년 말 현대건설 회장의 자리에서 정계진출을 선언한다. 건설업자로서의 경험들이 정치인 이명박의 펀더멘털한 정체성을 형성한 것 같다. 거기서 뭘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카인즈 기사 검색도 안 되고,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내가 초등학교 때 맨날 공차러 놀러 다닐 때라 별 기억이 없다. 머 암튼 좋다.
1992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정치에 뛰어든다. 현대맨 명바기는 여기서, 중요한 결단을 한다. 정주영이 만드는 신당에 불참한 것이다. 이곳으로 가면, 왕회장님 꼬봉 노릇밖에 못할 것이라 판단했는지, 아무튼 다른 길을 한다. 아무튼 왜 갈라섰는지에 대해서는 명바기 인터뷰를 조금 읽어보시든지.
암튼 명바기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25번에 발탁되고, 국회의원이 된다. 국회의원으로서 뭔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민자당 입장에서는 그 해, 대선에서 정주영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 명바기를 꼬셨던게 아닐까 싶다. 그러면 1992년 대선 유세 현장의 풍경. 김대중 쪽의 노무현도 슬쩍 보인다.
1993년 공직자 재산 공개가 있던 때, 국회의원인 명바기도 재산 공개를 했다. 2백74억2천만원이 있다고 했다. 돈이 많았던 명바기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재산 공개를 앞두고 서초동의 금싸라기 땅을 매우 싸게 팔기도 했다. 아깝겠다. 쩝. 명바기는 돈보다는 권력을 좋아한다. 암튼 오너도 아닌 자수성가 전문경영인이 어떻게 그리 많은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서도 당시 많이 의심을 받았던 모양이다.
1995년, 명바기는 자전 에세이를 펴냈다. “신화는 없다.” 95년에는 지방선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바기는 3월 서울시장 출마선언을 한다. 대통령 겸 민자당 총재 빵삼이는 서울시장 후보를 골라줘야 하는데, 빵삼이는 이 때, 명바기보다는 정원식 전 총리에게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초선의원 명바기는 여기서 경선 안시켜준다면, 탈당한다고 버틴다. 빵삼이가 직접 나서서, 명바기를 달래려고 했으니, 명바기는 끝까지 경선을 요구하고, 끝내는 경선을 얻어낸다. 빵삼이를 명바기의 고집이 꺾은 것이다. 명바기는 그리 호락호락 만만한 초선의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경선은 어찌되었을까? 졌다. 그리고 불만은 좀 있었겠지만, 승복도 했다. 졌지만 명바기는 그만큼 또 컸다. 절대권력 빵삼이에게 맞짱 떠 가면서 컸다. 그 선거에서 명바기는 정원식의 러닝메이트로 뛰면서 부시장을 약속받았으나, 조순과 이해찬이 나선 민주당에게 졌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 1등, 노무현 3등이란 말이 나오게 된 선거다. 정치1번지 종로에서 이명박, 이종찬, 노무현이 출마했다. 잠시 배경을 이해하자면, 1995년 지방선거가 끝나고, 은퇴했던 김대중이 97년 대선을 겨냥하고 돌아온다. 민주당의 사람들은 김대중의 국민회의로 옮겨갔고, 민주당에는 김대중의 정계 복귀에 반대하는 소수만이 남았다. 여기남은 노무현이 민주당 후보로 종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고, 패한다. YS, DJ, JP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분할이 유난히도 강력하게 작용한 이 선거에서 대패한 민주당은 미니정당이 되지만, 노무현은 이 꼬마 민주당을 잠시 이끌면서 성장한다. 아무튼 여기서 명바기는 자기 말대로 당선이 되었고, 이제 중진 못지 않은 2선 의원이 됐다. 명바기는 시작부터 50대 기수론 등을 주장하며, 대통령을 향한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승승장구하던 명바기, 그러나, 곧 대반전이 시작된다. 15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된 명바기의 참모 하나가 명바기의 선거 자금 문제를 폭로한 것이다. 당시 법정선거비용은 9천5백만 원. 명바기는 선관위에 7천백만 원을 신고했다. 그런데 선거참모가 나타나서 자기가 확인한 것만 6억8천만 원이라고 폭로를 했다.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검찰의 수사를 촉구하고, 아무튼 폭로가 된 이상 검찰의 명바기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선거 참모와 이명박의 말을 들어보자.
아무튼 난감해진 민자당은 대책도 못 세우고 우왕좌왕 대고 있었다. 명바기를 감싸자니, 들통나면 또 큰일이 날 것같고, 그렇다고 또 야당의 집중 공격을 당하는 명바기를 그냥 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파문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이 사건을 폭로했던 명바기의 참모가 돌연 해외로 출국을 한다. 이 자가 왜 갑자기 해외로 떠났는지 곧 2차 공방전이 시작된다. 아무튼 당시 명바기의 말도 들어보자. 그러는 가운데 동해안 무장간첩 사건이 터지고, 사건이 흐지부지되려 한다. 그런데 검찰은 곧 명바기의 참모들이 그 폭로참모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들을 구속한다. 사태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다급해진 신한국당은 이명박의 탈당을 권유하고, 출당 협박까지 한다. 당시의 신문 사설들을 읽어보자. 서울신문 “이명박 사건과 도덕성”. 경향신문 “이명박 의원의 두얼굴” 야.. 명바기 더럽네 진짜… 반칙써서 1등하고 이렇게 뻐기기냐.
여당은 명바기의 탈당을 요구하고, 야당은 명바기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지만, 우리의 철면피 명바기는 이러한 요구들을 거부하고, 버티기에 들어간다. 검찰은 곧 폭로자 출국에 대해 명바기도 관여했다는 것을 포착했고, 수사는 막바지에 접어든다. 아무튼 당시 수사의 한 단면을 살펴보자.
7일 오후 검찰에 소환돼 20시간여 동안 조사받은 신한국당 이명박 의원은 시종일관 혐의사실을 부인해 검찰관계자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이의원은 조사 초기에는 혐의사실을 부인하다가도 새벽쯤에는 혐의를 털어놓기 시작하는 일반 피의자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완강한 태도였다는 것.
명바기 안 되겠네… 아무튼 드러난 폭로의 이유는 ‘승진 안 시켜줘서’ 였다. 그 참모는 그 앙심으로 국민회의 측에 자료를 가지고 접근했던 것이고, 사태가 커졌던 것이다.
이제 97년으로 접어들고, 명바기는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게 7월에 징역 2년을 구형받고, 9월에 서울지법에서 700만원을 선고받으며 의원직 상실의 위기에 처한다. 한편, 97년 12월에는 대선이 있었고, 신한국당에서 딴나라로 화장을 고쳐봤으나 딴나라는 결국 고배를 들고 만다. 명바기에겐 이중삼중 시련의 계절일 것이다.98년 2월이 되자 명바기는 6월에 있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 선언을 한다. 곤혹스런 딴나라의 반응을 보자. 명바기는 곧 한발 더 나가 의원직 사퇴를 선언한다. 의원직 상실 여부를 가리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명바기는 전략적으로 의원직을 사퇴한 것이다. 꼼수정치 명바기의 전략도 참 눈부시긴 하다. 재판의 재미가 확 떨어뜨리면서, 재판 물타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선거법 위반은 의원직 상실 외에, 공직에 나갈 수 있는 피선거권도 제한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98년 3월 명바기는 현재 딴나라당 의원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고, 4월 서울고법에서 400만원 형을 선고받는다. 이대로 대법판결에서 확정되면, 피선거권마저 박탈될 지경. 그러나 철면피 명바기는 여기서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면서 서울시장경선 출마를 접는다.
99년도에 대법원에서 현재의 대법원장인 당시 이용훈 대법관은 왜 항소심에서 벌금이 줄었냐고, 이걸 다시 고법으로 돌려보낸 모양이다. 끈떨어진 명바기 그 담부터 재판이 어케됐는지, 뉴스도 별로 엄따. 걍 돈 내고 만 것 같다. 명바기의 신화는 이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는가? 객관적으로 명바기의 정치인 생명은 위기에 처했다. 이렇게 다 죽었던 명바기는 어떻게 다시 살아난 것일까? 그런데 참 묘하게 그 이후엔 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별 드라마틱한 반전이 없다.
드디어 2000년, 총선이 있다. 피선거권마저 박탈당한 명바기는 출마를 원했는 듯 보이나, 사면이 된건대 안 나온건지, 사면이 안 되서 못 나온건지, 아무 기사가 없다. 암튼 그해 10월, 증권사 최고 경영자로 컴백한다.
2001년 11월 명바기는 무슨 사기로 고소를 당한 기사가 있다. 아무튼 별 기사 엄따.
2002년 1월이 되자, 명바기 ‘신화는 없다’에 이어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라는 책을 들고 나타나며, 다시 서울시장 후보 출마선언을 한다. 암튼 드디어 딴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된 명바기, 그 해 6월 청계천 권법으로 김민새를 격파하고 서울시장에 당선이 된다. 선거법 위반으로 피선거권도 잃었을 그가, 어떻게 다시 출마를 할 수 있었는지 잘 파악이 안 되지만, 암튼, 명바기는 그 후, 청계천 하나로 현재의 대선주자 1위까지 와 있다.
이상 명바기 종로에서 노무현 이기고 1등한 사연 찾다가, 알게 된 내용들이다. 대한민국이 조금만 정상적으로 된 나라였다면, 명바기의 정치인생은 이미 10년전인 96년에 끝났어야 할 것 같은데, 암튼 이렇게 돼 있다. 잘나가던 명바기 엎어지던 사건은 재미가 있는 드라마인데, 엎어지던 명바기 다시 일어나는 사건은 별 재미가 없다. 그냥 모두 다 까먹은 것일 뿐이다. 이러면 안된다. 정치인의 미래는 과거로 평가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수성가 샐러리맨의 신화까지였다면 참 매력있고 좋았을 건데, 그 이상 값을 쳐주긴 어렵지 않을까 싶다. 명바기의 정치철학…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명바기 머릿속엔 삽질과 권력의지 그 뿐이다.
PS:
신동아2004.7월호 167쪽
이명박서울시장 미 LA에서 100억대 소송낸 사이버금융 미스테리
신동아 지난호 보기로 꼭 읽어보삼
명박의2000년 LK이뱅크,EBK증권중개 대표이사,다스(전 대부기공)에관한 것 정말 미스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