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 장 – 여의솔을 얻다
‘복장군… 그 여의솔이라는 자에 대해 좀 말해 주시오.’
왕건은 어마의 행렬이 궁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왕건이 복지겸에게 물었다. 한나라의 왕의 행차치고는 소박해보이는 아니 차라리 초라해보이는 듯한 행렬에 지나가는 행인들은 간혹 흘끔거리며 비켜설뿐 제대로 왕건을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가마대신 전투복차림으로 말에 훌쩍 올라 이렇게 성내를 다니는 것은 나라가 항시 전시(戰時)임을 잊지 않기 위한 왕건의 생각으로 거추장스러운 어가행렬에 백성들이 혹여 불편할까 배려하는 마음또한 담겨져 있었다.
‘폐하… 여의솔이란 자는 저의 처조카뻘이 되는 자로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조모(祖母) 슬하에서 자랐사온데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만사에 막힘이 없이 사람들을 납득시켜 웬만한 송사는 백성들이 관에까지 가지 않고도 그에게 가 해결하였고 또한 그의 나이 불과 10세에 동네아이들을 모아 놀이처럼 만들게한 제방으로 가뭄에 농사를 망치지 않게 되자 그 고을에서는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 하옵니다.’
‘복장군은 어찌 하여 그런 자를 내게 미리 천거하지 않았단 말이오.’
‘실은 제가 그 자를 저희 집으로 데려온 이태전부터 폐주(廢主) 궁예에게 천거하려 하였으나 그 자는 궁예는 자기가 원하는 주인이 아니니 기다려 달라 하였나이다. 그자는 또한 그자가 원하는 주인이 나타나게 되면 스스로 몸을 일으킬 것인 즉, 그 때가 멀지 않았다 하였나이다. 오늘 폐하께서 이리 그 자를 찾게 되니 아마 그는 일이 이리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하옵니다.’
‘복장군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 그 여의솔이라는 자가 더욱 궁금해지는 구료… 섬길 주인을 스스로 찾겠다… 아직 길은 멀었소?’
‘얼마남지 않았나이다. 미리 연통을 해 두었으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옵니다.’
‘아니되겠소… 좀 더 서두르도록 하십시다. 술희와 혁이도 서두르도록 하라… 이랴…’
먼지를 내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왕건을 보며 박술희가 말했다.
‘내 여태까지 폐하를 모시는 동안 저리 서두르시는 걸 뵌 적이 없건만… 자 우리도 서두릅시다… 이랴…’
박술희가 박차를 가하며 달려나가자 장혁도 그 뒤를 따랐다. 한 무리의 인마가 쏜살과 같이 지나간 자리는 언제 그런적이 있었냐는 듯 이내 행인들의 발걸음으로 뒤덮였고 역사를 바꿀 두 영웅의 만남이 그렇게 가까워오고 있었다.
‘폐하… 누추한 곳까지 납시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 안으로 드시오소서…’
복지겸의 부인 여씨는 아침에 복지겸이 말한 나라의 큰 일이 몹시 궁금하였다. 복지겸을 만난 후 거의 매일 남편이 전장을 누비고 다니는 통에 하루도 마음 편할날이 없었다. 그러다 왕건이 나라를 세우자 몇달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아 안심하고 있던 터에 갑자기 남편이 또 큰일이 있다하니 또 남편이 전장으로 달려가지 않을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신경이 쓰여 고심하고 있는데 늘 남다르게 기이한 행동을 하던 자신의 조카 의솔이 찾아왔기에 총명한 의솔에게 아침에 일을 얘기하며 무슨 큰일이 날 것 같냐고 했더니 느닺없이 웃으며 오늘 폐하께서 오실 것 같으니 미리 오찬겸 점심을 준비해 놓으라는 것이 아닌가. 여씨부인은 의솔의 말에 어이가 없었으나 조카의 신통함 또한 아는지라 혹시 하는 마음에 미리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폐하께서 오고 있다는 연통을 받자 여씨부인은 다시한번 의솔의 신통함에 놀라며 이렇게 왕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허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늘은 좀 급한일이 있어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부인… 의솔이는 어디에 있소?’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왕건 일행이 막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조그만 동자하나가 갑자기 뛰어들다가는 왕건과 부딪혀 뒤로 발랑 넘어졌다. 아이는 놀랐음인지 아무말도 못한채 고개를 들어 왕건을 올려다 볼 뿐이었고, 무서운 얼굴로 아이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박술희를 제지하며 왕건이 손을 내밀어 동자를 일으켜주며 물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더냐?’
‘네… 괜찮습니다… 헌데… 아저씨가 그 호랑이신가요?’
‘호랑이?’
‘네… 제 스승되시는 청운선생께서 곧 이 집에 호랑이가 날개를 달러 올 것이니 내일 집으로 가기 전까지 조용히 지내라 하셨는데 제가 그만…’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건이 되물었다.
‘스승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더냐?’
‘제 스승님께서는 이제 호랑이가 날개만 잘 달면 잃었던 땅을 찾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사해가 편안해질거라 하셨습니다.’
아이가 여기까지 얘기하자 왕건은 이 아이의 스승이라는 청운선생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왕건이 복지겸을 돌아보며 청운 선생에 대해 물으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차라리 아이에게 직접 안내하게 하려고 고개를 다시 돌리자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동자가 어디론지 벌써 사라져 버렸다. 다시 복지겸을 돌아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찰나 여씨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변변치 않사오나 음식을 좀 마련했사오니 안으로 드시오소서…’
왕건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여씨부인에게 예를 보이며 마루로 올라섰다. 방으로 들어선 왕건 일행이 자리에 앉자 곧 여씨부인이 마련한 식사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변변치 않사오나 정성껏 마련했으니 요기라도 하시오소서…’
‘허어… 부인… 언제 음식을 장만하시었소… 그보다도 의솔이는?’
복지겸이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나절에 의솔이가 제게 와서는 오늘 폐하가 납실것 같다하며 음식을 장만해 놓으라기에 미리 준비하고 있었사옵니다. 의솔이는 폐하께서 찾으시면 폐하께 보여드릴것이 있어 준비를 해야하니 폐하께서 식사를 마치실때쯤 돌아올거라 전하라며 밖으로 나갔사옵니다.’
‘으음… 복장군… 이자가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이오?’
박술희가 눈을 흘기며 복지겸에게 추궁하자 왕건이 제지하며 말했다.
‘술희는 말을 삼가라… 부인께서 이리 정성들여 차린 상앞에서 그 무슨 경거망동이란 말이냐? 부인… 부인께서 이해해 주시요… 자 모두들 식사나 하며 기다려보기로 합시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왕건이 수저를 들며 밥을 먹기 시작하자 모두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왕건은 허기를 느꼈고 마침 들어온 밥상을 보자 식욕이 동하여 이것저것 입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배가 고프기는 복지겸이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정도 허기가 밀려나자 왕건은 아까 들은 청운선생이란 자와 여의솔에 대한 생각이 다시 머릿속을 메우기 시작했고 때마침 여의솔이 당도했다는 전갈이 여씨부인으로부터 전해졌다.
‘전하… 식사중에 황송하오나 여의솔이 알현하기를 청하옵니다.’
‘어서… 어서 들라하시오.’
왕건은 황급히 상을 물리며 여의솔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얼마지나지 않아 방안으로 약간은 앳되보이는 어찌보면 계집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하나가 들어섰다. 설마하는 왕건의 심중을 무참히 깨어버리며 그 사내가 부복하며 말했다.
‘신 여의솔 이제서야 폐하의 용안을 알현하옵니다.’
왕건은 속으로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여의솔의 외모를 보며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앞에 앉은 이제 약관도 채 되어보이지 않는 이 자가 정녕 자신의 발걸음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여의솔이라는 자인가 의심할 정도로 너무 앳되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실망감을 감추며 좀 형식적으로 물었다.
‘그래 자네가 여의솔이로군… 만나서 반갑구나… 내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이리 자네를 찾았네…’
왕건의 말투 또한 실망감이 묻어나오며 복지겸의 집까지 올때의 의도와는 달리 좀 퉁명스러워져 있었다.
‘하명하시오소서…’
여의솔은 왕건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왕건을 한번 보고는 대답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순간, 왕건은 여의솔의 번뜩이는 눈빛을 보았고, 조금 신중하게 다시 물었다.
‘그대는 어제 그대의 숙부인 복지겸 장군이 짐이 백제왕 견훤에게 서찰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신라왕에게도 서찰을 받을것이며 그것은 절부구조라 하였다는데 그 뜻이 무엇인고?’
‘말씀올리겠나이다. 절부구조라함은 형식따위의 작은것을 버려 큰 것을 취한다함이옵니다.’
처음부터 여의솔이 탐탁지 않았던 박술희가 대뜸 반말지거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절부구조의 뜻을 모른단 말이더냐. 그것이 서찰과 무슨 관계가 있냐는 말이다.’
‘박술희 장군이 아니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이제 곧 장가도 가야할 분이 여전히 너무 급하십니다. 하하하’
‘자…장가라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하하하하… 금번 장군께서 견훤왕으로부터 가져온 서찰이 장군을 곧 대주낭자와 맺어줄 것이옵니다… 아니 그렇사옵니까 전하?’
대주낭자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며 약간 얼굴이 상기되고 있는 박술희에게서 눈을 돌려 왕건을 바라보며 여의솔이 물었다. 왕건은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참아가며 궁금한 것을 물었는데 자신의 질문에 답은 커녕 엉뚱한 질문을 하는 여의솔을 보며 마음이 상했으나 간신히 역정을 누르며 재차 물었다.
‘서찰과 절부구조 또 술희가 대주낭자와 맺어진다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순간 왕건을 바라보던 여의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히더니 다시 눈빛을 반짝이며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소서… 지금 전하께서는 백제나 신라와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하시옵니다. 아니 한민족끼리의 상잔(相殘)을 끝내고 보다 큰 웅지(雄志) 펴기 위해 궁예왕 시절 백제, 신라와의 대결구도를 탈피하여 이제는 협력구도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폐하께서는 견훤왕과 경명왕을 만나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愚)를 일깨우고 더 큰 실리를 나누어 갖자는 것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하고 계십니다.’
여의솔이 여기까지 얘기하자 왕건은 여의솔을 흥미롭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愚)란 무엇을 말하며 더 큰 실리를 나눈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소탐대실의 우란 삼국으로 나뉘어 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는 고려, 백제, 신라의 형세를 일컬음이요 더 큰 실리란 지금 5대 10국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무너지는 당(唐)이후의 대륙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여의솔의 막힘이 없는 대답에 왕건은 물론이거니와 복지겸, 박술희, 오장혁마저 여의솔을 다시 보게 되었고 여의솔에게 다시 하문하는 왕건의 질문이 이제는 아랫사람에게 대하는 하대에서 존대로 바뀌어갔다.
‘어찌하여 대륙이 백제와 신라에게 큰 실리가 될 수 있단 말이오?’
‘하하하… 폐하 더이상 무엇을 감추려 하시옵니까? 폐하께서는 백제, 신라와 손을 잡고 대륙을 치려하고 계시질 않사옵니까? 대륙을 치기 위해서는 더이상 같은 민족끼리 피를 낭비할 수는 없는 터, 백제와 신라에게 힘을 모아 대륙을 치고난 후 그 땅을 나누자고 하실 요량이 아니십니까? 이리하면 고려뿐만아니라 백제와 신라에게도 큰 이득이 될것은 자명하고 폐하께서는 이 점을 들어 견훤왕과 경명왕을 설득하려 하심이 아니옵니까? 제가 백제와 신라로부터 서찰이 올 것을 예견하고 또 이를 두고 절부구조라 하였음은 폐하께서 백제와 신라를 일통하여 작은 나라의 제왕으로 머무는 형식따위는 과감히 버리시고 큰 대륙을 취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길을 택해 더 큰 뜻을 펼치려 하신다는 뜻이었나이다.’
여의솔을 말을 들으며 복지겸, 박술희 그리고 오장혁은 자신의 머리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왕건은 희열에 찬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아직 부복하여 있는 여의솔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내 그대와 같은 현인을 미리 알아보지 못하고 심중에 그대를 의심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부디 용서해 주시요… 내 물어 볼 것이 많으니 어서 이리로 앉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건은 여의솔이 자리에 앉자 자리로 돌아와 앉기가 무섭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아까 술희가 대주낭자와 맺어진다는 말은…?’
여의솔은 웃음띈 얼굴로 박술희를 한번 쳐다본 후 고개를 왕건에게 돌리며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오래전 견훤왕이 백제를 세우기 전 견훤왕과 만나신 적이 있사옵니다. 거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오나 전하께서 그 이후에도 견훤왕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 전하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줄로 아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어쩌면 전하께서는 이미 견훤왕과 호형호제(呼兄呼第)하는 사이일 것이라 사료되옵니다만 맞사옵니까?’
‘아니… 그것을 어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왕건 뿐만이 아니였다. 복지겸과 박술희는 무언가 긍정의 뜻을 비치며 되묻는 왕건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여의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그리 짐작하는 것은 그동안 견훤왕과 전하께서 벌인 전투들을 살펴보면서 무엇인지 모든 전투가 누군가에 의해 잘 짜여진 것 처럼 서로 이기고 져 땅을 빼앗기고 빼앗을지언정 피아간(彼我間)에 큰 인명의 살상이 없었던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옵니다. 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저는 이리 짐작하였나이다. 전하와 견훤왕은 이미 친분이 두터우나 아마도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또 궁예왕의 눈을 속이고자 거짓으로 싸웠음이라고… 허면 제가 왜 박술희 장군이 곧 대주낭자와 혼인을 하게 될 것인지 말씀해 올리겠나이다.’
모두들 여의솔의 한마디 한마디에 빠져들어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전하께서는 궁예왕을 폐하시고 드디어 한나라의 주인이 되셨사옵니다. 이는 드디어 전하의 큰 뜻을 펼칠 기반을 마련하셨다는 뜻이옵니다. 이제 기반이 마련된 이상 더이상 불필요하게 견훤왕과의 관계를 숨기실 필요가 없어졌음이고 그럼 전하께서는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백제와 무혈(無血)로 손을 맞잡으려 하실 것이옵니다. 소인의 소견으로는 아마도 견훤왕과 만나 이 일을 담판짓기 위해 서찰을 주고 받으셨다 사료되옵니다. 이미 친분이 두터우신 전하와 견훤왕은 분명 이번 만남으로 어떤식으로든 서로 돕는 관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 서로 싸우느라 아니 싸우는 척 하느라 연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적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박술희 장군과 대주낭자는 당연히 맺어지기가 쉽게 되옵니다. 실은 만약 두 분이 싫다 하더라도 두 나라의 친분을 굳건히 하기 위해 그 혼인은 꼭 맺어져야만 하옵니다. 전하께서도 분명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계셨으리라 생각하옵니다. 맞사옵니까?’
여의솔이 다시 한번 웃음띈 얼굴로 박술희를 돌아보며 왕건에게 물었다. 박술희는 벌겋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왕건의 대답을 기다렸다. 왕건이 무언가 나쁜짓을 하다 들킨 듯 어색하게 시선을 박술희에게 돌리며 대답했다.
‘허어엄… 여공의 말은 모두 틀림이 없으나… 실은 내 아직… 술희에게 혼례문제에 관해서는 상의해 본 바가… 없어서…’
말 끝을 흐리며 왕건은 무언가 도움을 청하듯한 시선으로 여의솔에게 고개를 돌렸다.
‘박술희장군께서도 아마 마다하지 않으실거라 생각되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여의솔이 박술희에게 고개를 돌려 묻자 박술희는 상기된 얼굴로 머뭇거리며 답했다.
‘저야… 뭐… 형님… 아니… 폐하께서 원하시고… 또… 나라의 큰 일을 위해서라면…’
‘고맙다… 술희야… 그리 해 주겠단 말이로구나… 고맙구나…’
왕건이 박술희를 보며 말하자 복지겸이 큰 웃음과 함께 끼어들며 말했다.
‘하하하하… 박장군… 얼굴이 이리 농익은 홍시마냥… 푸하하하하… 전하의 하명이 없었더라면 큰일 날뻔 했사옵니다. 하하하하…’
심각하던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며 화기애애졌다. 하지만 왕건은 여의솔과 계속 얘기를 이어가고 싶었다. 이제 여의솔을 대하는 왕건의 태도는 아예 제자가 스승을 대하는 그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여공… 내 오늘 여공을 만나 그동안 홀로 생각했던 바를 여공에게 들으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환해지며 새 세상을 보는 것 같구료. 청컨데 지금 당장 궁으로 함께 들어가 계속 얘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오. 그러지 말고 짐과 같이 궁에서 지내시는 것은 어떻겠소?’
왕건의 뜻밖의 제의에 모두들 놀랐으나 여의솔만큼은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 제가 여기 철원으로 올때부터 늘 이 날을 기다려왔사옵니다. 이제 이렇게 폐하를 뵈었으니 당연히 폐하를 모시고 견마지로(犬馬之勞)할 것이오나 제가 궁으로 들어가기 전 꼭 같이 데려가고 싶은 분이 있사오니 제게 조금만 말미를 주시오소서…’
‘아니 그 분이 누구시길래?’
‘청운을 호로 쓰는 분으로 저와는 막역한 사이오며 폐하께 꼭 천거하고픈 분이옵니다.’
‘아… 안그래도 내 그 분을 꼭 만나보고 싶었소… 차라리 그 분을 이 자리에 모시면 어떻겠소?’
‘아니옵니다. 전하… 지금 그 분은 여기 계시질 않사옵니다. 오늘 전하께서 오실것을 미리 알고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아니… 왜 짐이 오는데 자리를 피한단 말이오?’
‘그 분은 속세의 일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사온데 전하와 제가 이렇게 만나게 되면 당연히 제가 전하께 그 분을 천거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전하께서 방금처럼 찾으실 것이고 그러다보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속세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을 저어하여 그리 하였을 것이옵니다.’
‘허어… 그것 참… 그렇다면 그 분은 출사를 할 요량이 없다는 말이 아니오?’
‘지금은 그렇사오나 제가 만나 꼭 설득을 하여 수일내로 같이 궁으로 들겠나이다. 그러하오니 제게 이틀만 말미를 주시오소서. 만일 이틀안에 그 분을 설득할 수 없다면 저만이라도 전하를 찾아뵙겠나이다.’
‘그 분은 대체 어떤 분이길래 여선생이 이리도 신경을 쓰시는 것이요?’
박술희가 왕건의 안타까운 마음을 대변하듯 여의솔에게 물었다.
‘만일 전하께서 저와 함께 청운선생까지 얻으실 수 있다면 이미 천하는 전하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사옵니다. 그분이야말로 저 대륙을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보시는 분이지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온데 한시가 급한 일이니 저는 이만 그 분을 찾으러 나설까 하옵니다.’
여의솔의 대답은 언뜻 매우 방자하게 들릴 소지가 있었으나 묘하게 그가 하는 말에는 믿음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왕건은 자신이 괜한 말을 꺼내 좀 더 여의솔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자리가 파하게 될 것 같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왕건의 그런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여의솔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품 속에서 두개의 봉투를 꺼내 박술희와 오장혁에게 따로 건네며 얘기했다.
‘여기 계신 분은 지난번 철원성에서 배현경 장군을 곤란하게 했다던 오장혁이란 분이 아니신지요?’
왕건은 여의솔이 오장혁을 어찌 알고 있는 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것을 어찌 아시었소?’
‘저에게는 이런 저런 사람들로 부터 장수들에 관한 말을 듣고 만들어 정리 해놓은 장수록(將帥錄)이란 것이 있사온데 여기에는 고려 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모든 이름있는 장수들은 물론 이거니와 조금이지만 저 대륙의 장수들에 관한 명세가 들어있나이다. 저는 이 장수록에 장수들에 관해서는 모두 외우고 있사온데 전하와 형제의 연을 맺고 있다던 오장혁이란 분에 관한 철원성의 일화를 접한 뒤 갑자기 사라진 연유가 궁금하던 터에 아까 말씀드린 청운선생과 그 연유를 유추해 본 바 아마 신라에 다니러 가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분에 대해서는 마침 별로 아는 바가 없었으나 제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고려의 장수와 그 생김새가 같지 않으니 당연히 그리 생각하게 된 것이옵니다.’
좌중은 다시 한번 여의솔의 예리한 통찰력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술희와 혁이에게 준 저 봉투에는 무엇이 들어 있소?’
‘제가 오늘 박술희 장군과 신라에 다녀온 분만 대동하라 청한것은 바로 저 봉투 때문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내일이라도 당장 박술희 장군과 오형을 다시 각각 백제와 신라로 보내시려고 하시지 않으셨는지요?’
‘허어… 어찌 여공 내가 생각하는 바를 모두 알고 계신단 말이오… 놀랍소이다… 내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그렇다면 전하께서 생각하신 바와 같이 하소서…’
‘그런데 술희와 혁이가 백제와 신라로 가는 것과 저 봉투는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박술희 장군께 드린 봉투에는 한 통의 서찰이 있나이다. 박술희 장군께서는 백제에 당도하시면 견훤왕을 만나기 전에 꼭 이 서찰을 대주낭자에게 전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견훤왕과 만나기 전에 전하셔야 합니다. 대주낭자가 이 서찰을 장군께 받았다는 것을 견훤왕이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미리 알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오형께 드린 봉투에도 한 통의 서찰이 있나이다. 이 서찰은 오형이 신라에 당도하시자마자 경명왕을 보게 되면 곧바로 경명왕에게만 전하소서. 경명왕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려운 일인줄 아오나 다른 사람은 이 서찰의 존재에 대해 누구도 알아서는 아니됩니다. 끝으로 전하께서는 두 서찰의 내용을 살피보시고 내용이 전하의 생각을 잘 대변했다 여기시면 폐하의 인장을 찍어주소서. 두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오나 내용은 폐하만 보시고 곧바로 봉하시는 것이 좋을듯 하옵니다. 전하 신 여의솔 곧 전하의 용안을 다시 뵈올 것을 약속드리며 이제 물러날까 하옵니다. 모쪼록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소서.’
왕건은 여의솔과 헤어지는 것이 마치 십년지기를 어디론가 멀리 떠나 보내는 듯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차 다짐했다.
‘이틀이요… 내 이틀안에 꼭 궁으로 와 주셔야 하오… 내 여공과 같이 나눌 얘기가 너무도 많으나 여공의 뜻대로 잠시 미루도록 하겠소. 내 그대가 궁으로 오기만을 기다릴터이니 오늘 못다한 얘기는 꼭 궁에서 다시 나누도록 하십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인 필히 이틀안으로 궁으로 찾아 뵙겠나이다. 그럼…’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여의솔을 보며 왕건은 마치 무슨 꿈이라도 꾼것처럼 여의솔의 막힘이 없던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을 맴돌았고 다른 장수들 또한 여의솔의 말들로 인해 비로소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었던 왕건의 큰 뜻을 되새김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여의솔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오장혁이 말했다.
‘전하… 이제 환궁하시지요? 여공의 이야기로보아 서찰의 내용이 화급을 다투는 일일지 모르오니….’
그제서야 왕건도 정신을 차린 듯 대답하며 다짐을 받아두며 말했다.
‘그러도록 하자. 내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술희와 혁이 그리고 복장군은 오늘 나만 여공과 독대한 것으로 하라. 오늘 여공과 나눈 얘기는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알겠는가?’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