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고려연방(大高麗聯邦) 2

  • #83974
    6년만기 24.***.74.254 3686

    제 2 장 – 건국(建國)

    궁예의 폭정을 뒤엎고 고려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워 나라 안팍을 정리하며 지나온 지 3달… 결코 길지 않은 시간동안 나라를 세우고 이정도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은 왕건과 그를 따르는 여기 모인 문무백관들의 재주가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왕건은 철원성에 도열해 있는 장수들과 군졸들을 굽어보며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왕건이 드디어 힘이 실린 좌중을 압도하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은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그동안 얼마나 이 나라를 재정비하기 위해 애써 왔는 지 알고 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대들을 치하하기 위해 마련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자리일뿐만 아니라 짐이 그동안 가슴에 품었던 의지를 그대들에게 천명(闡明)하고 그 뜻을 이루기위해 그대들과 함께 신명(身命)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고려인이라면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고 사해 어디에서나 떳떳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리라는 내 의지는 변함이 없다. 현재 나뉘어져 대립하고 있는 백제, 신라, 발해를 조속히 아우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대로 우리의 영토였던 고조선의 고토를 되찾고 당이 무너진 후 여러 왕조가 난립하여 백성들이 늘 불안속에 지낼 수 밖에 없는 저 광할한 땅을 차지하여 누구나 고통없이 살아갈 수 있는 대동방국을 세우는데 그대들을 선봉으로 삼고자 하니 모두 짐의 뜻을 따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앞장 서도록 하라. 자… 오늘은 그대들을 위한 자리이니 모두 마음껏 마시고 즐기도록 하라.’

    ‘와… 태조황제 만세!!! 대고려 만세!!!’

    왕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끓는 듯한 목소리의 만세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이윽고 철원성이 함성으로 뒤덮였고 한동안 그 소리는 그칠줄 몰랐다. 왕건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한동안 서 있다가 미리 준비해 놓은 술과 음식등이 군사들에게 나오는 것을 보자 이윽고 몸을 돌려 대전으로 향했고 개국공신들인 신숭겸, 홍유 등이 뒤를 따라 대전으로 들어섰다.

    ‘장군들… 그동안 모두 노고가 크셨소이다. 오늘은 모두 정무를 잊고 예전으로 돌아가 정담이나 나누어 보십시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두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평소보다 높아진 언성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고 있었다. 비록 왕건이 그냥 즐기자며 말을 꺼냈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역시 앞으로 어떻게 고려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가로 귀결되었고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그 어느때보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매사에 신중하던 복지겸마저 평상시 같으면 불경스럽기 그지 없게 들릴 말을 넌지시 꺼내기에 이르렀다.

    ‘폐하. 오늘 천명하신 폐하의 뜻은 잘 알겠사오나, 당나라를 치겠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런지요? 우리는 안으로 아직 백제의 견훤 그리고 신라와도 싸움을 끝내지 못하고 있질 않사옵니까?’

    ‘아니 복지겸 장군 이 무슨 불경스러운 말이오? 폐하께서 그리하시겠다 하시면 우린 그저 따르면 되지 가당치 않게 토를 달다니…’

    ‘배장군… 배장군은 진정하라… 이같이 좋은 날 우리끼리 언성을 높여서야 되겠는가?’

    예의 그 급한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는 배현경장군을 달래듯 얘기한 후 복지겸을 돌아보며 왕건이 말을 이었다.

    ‘복지겸 장군… 내 그대의 충심어린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내게 나름대로 복안이 있어 그리 말한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말라. 그나저나 술희는 아직 당도하지 못했는가?’

    궁예가 왕건을 경계하기 위해 왕건 휘하의 박술희와 유금필을 떼어놓은 지 6개월… 북방을 맡겨 놓은 유금필은 왕건에 의해 고려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자 한 달음에 달려 오려 했다. 하지만 왕건은 유금필에게 모종의 명을 내렸고 그 명을 따르는 중이라 이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다. 박술희에게도 같은 시기에 또다른 명이 내려졌고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박술희가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왕건은 이제나 저제나 박술희가 당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였다.

    ‘전하… 박술희 장군께서 지금 막 당도하셨다는 전갈이옵니다.’

    ‘그래… 드디어 왔구나… 어서 들라하라…’

    늘 침착하던 왕건이었지만 이 때 만큼은 모두들 알아차릴 정도로 서두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이윽고 박술희가 대전으로 들어서며 용상에 있는 왕건을 향해 예를 취했다.

    ‘전하…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무슨 절부터 받으시오서…’

    왕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려서며 박술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일으키더니 그대로 팔을 벌려 박술희를 끌어 안았다.

    ‘저…전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술희야… 그동안 잘 있었느냐? 얼마나 고생이 많았더냐?’

    왕건은 다른 장수들이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반가운 마음을 그대로 들어내며 박술희를 더욱 부둥켜 안았다. 여러 장수들은 박술희가 왕건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뿐 아니라 자신들이 만약 박술희와 같은 처지였더라도 똑같이 대했을 왕건임을 알기에 누구하나 체통이나 형식등을 내세워 지금의 분위기를 따져 묻지 않고 벅찬 심정으로 두 사람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부둥켜 안고 떨어질 줄 모르던 두사람을 향해 배현경이 호탕하게 웃으며 농을 건넸다.

    ‘하하하… 두 분이 그리 서로 좋아하시니 이참에 혼례라도 치뤄드려야 하는게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허허허…’

    ‘와하하하… 맞습니다… 아예 신방을 꾸며 드립시다…’

    복지겸마저 맞장구를 치며 웃자 대전안이 훈훈한 웃음으로 가득찼고 마침내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왕건이 감았던 팔을 박술희에게서 풀며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좌중을 둘러 보았다.

    ‘전하… 저를 반기시듯 제가 가져온 이 소식 또한 반기실 줄 믿습니다. 이 서찰을 보시지요?’

    박술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품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왕건에게 내 밀었다. 왁자지껄하던 대전의 분위기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모두의 시선이 박술희의 손에서 왕건의 손으로 건네지는 한 통의 서찰로 향했다.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서찰을 읽어내려 가던 왕건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가 싶더니 이내 호탕한 웃음을 띠며 박술희의 손을 다시 부여 잡으며 말을 이었다.

    ‘해냈구나. 술희야… 네가 해 내었어… 되었도다… 이제는… 이제는 되었어’

    의아한 표정으로 왕건을 주시하는 장수들 중 복지겸이 나서며 왕건에게 물었다.

    ‘폐하… 무슨 서찰이기에…’

    ‘오… 복지겸장군… 어서 이 서찰을 읽어보시오…’

    이제 모두의 시선은 왕건으로부터 서찰을 건네받은 복지겸에게로 쏠렸고 서찰을 읽어 내려 가던 복지겸은 탄식을 발하며 말했다.

    ‘폐하… 이것은 백제의 왕 견훤으로부터 온 서찰이 아니옵니까?’

    ‘그렇소. 백제의 견훤왕이 보낸 답신이요…’

    ‘서찰에는 다음달 보름에 폐하를 만나자 적혀 있습니다. 무슨 연유로…’

    ‘자… 이 서찰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다시 모여 논의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즐깁시다. 오늘같은 자리에서조차 정무에 관한 얘기를 하기는 싫소. 대신 사안만은 알고들 계시오. 이 서찰은 백제왕 견훤이 나와 만남을 갖고자 한다는 것이라오. 자세한 내용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겠소.’

    그걸로 끝이었다. 모두들 왕건의 입가로 번지는 개구장이와 같은 미소를 본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래된 왕건의 버릇으로 모두들 궁금증을 유발시킬만한 사건의 머리부분만을 슬쩍 던져 놓고는 자신이 정해 놓은 시간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구하여 듣는 이들의 호기심을 극한까지 몰고 가 주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모두들 이 미소를 보자 왕건으로부터 더이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념하고 제각지 마음속으로 추측만 할 뿐이었다. 왕건은 이런 제장들을 보며 다시 한번 미소를 짓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박술희와 저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장수들은 저마다 술을 마시며 간혹 소리를 높여 떠들어 대곤 하였지만 견훤으로부터 전해진 한 통의 서찰에 대한 궁금증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

    ‘나리, 어제도 많이 늦으셨는데 오늘 아침은 어찌도 이리 등청을 서두르시는지요?’

    ‘부인… 아무래도 오늘은 궁에서 큰 일이 일어날 듯 싶소. 내가 서두르는 이유도 그때문이요?’

    ‘큰일이라니요? 이제 나라도 많이 정비가 되어 가고 있고, 백성들도 평안을 찾아가고 있는데…?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요?’

    ‘허어… 부인답지 않게… 오늘따라 나라일에 너무 신경을 쓰시는 구료.’

    ‘나리께서 너무나 평소와 다르게 서두르시는 통에 제가 그만… 송구하옵니다.’

    ‘음…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너무 개념치 마시오… 자세한 얘기는 내 다녀와 얘기하리다.’

    복지겸은 어제 본 견훤에게서 온 서찰에 관한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별다른 특별한 내용없이 그냥 언제 한번 보자고만 적혀 있었지만 그 서찰을 받자마자 보인 왕건의 태도는 분명 무언가 다른 의미가 서찰에 있으리라 짐작되었고 그에 대해 함구한 채 대답을 오늘로 미룬 왕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기에 궁으로 향하는 복지겸의 마음은 급하기만 하였다.

    ‘아니 다들 이 이른 시간에 벌써들 등청하십니까?’

    ‘그러는 복장군이야말로 이 이른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복지겸과 홍유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벌써 다른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궁안으로 들어들 오고 있었다. 모두들 밤늦은 연회에 피곤할만도 한데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반짝이는 눈은 총기로 가득차 있었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바쁜 걸음을 대전으로 옮기고들 있었다.

    ‘폐하께서는 기침하셨는가?’

    ‘이미 대전에 납시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군들께서 평소보다 일찍 등청하실것이라는 명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전하… 장군들 드셨사옵니다…’

    ‘어서 들라하라…’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왕건의 동지인 장수들이 한명도 빠지지 않은 채 모두 등청하여 대전에 모인 것은 이제 막 묘정(오전 6시) 이 지나기 시작한 이른 시각이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배현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예의 그 괄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폐하… 신 배현경은 어제 견훤으로부터 온 서찰때문에 어젯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나이다. 이제 그 서찰이 무슨 의미인지 말씀해 주소서…’

    이번만큼은 누구하나 배현경의 급한 성정을 탓하는 사람없이 모두 왕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배현경을 향해 미소만 짓던 왕건이 정작 말을 꺼낸것은 서찰의 내용이 아니였다.

    ‘혁이 있느냐? 들어오너라…’

    왕건의 부름에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며 장혁이 대전으로 들어섰다. 모두의 눈은 대전에 새로 등장한 사내에게로 모였다. 다른 장수들이 영문을 몰라 장혁을 쳐다보는 중에도 배현경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만난적이 있는 장혁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여기 이 자는 오장혁이라는 자로 짐과는 어렸을 적 같이 무술을 연마한 사제이며 또한 짐의 의제이기도 하오. 배장군과는 이미 일면식이 있으나 다른 장군들께도 소개를 시켜드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불렀소. 혁이는 장군들께 인사드리거라.’

    ‘안녕들 하십니까. 소생은 오장혁이라 합니다.’

    다들 오장혁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관심은 온통 견훤의 서찰에 가 있는지라 새로 나타난 이 사내에 대해 별반 신경을 쓰지 않은채 대충 인사만 건낼뿐 빨리 화제를 견훤의 서찰로 옮겨가고자 할 뿐이었다. 이런 장군들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왕건은 다시 서찰과는 무관해 보이는 말을 늘어놓았다.

    ‘짐이 여기있는 혁이와 재회한 것은 몇달전이나 생각한 바가 있어 장혁이를 신라로 보냈었는데 어제 연회가 끝나고서야 돌아왔소. 그래서 이제서야 인사를 시키는 바이오. 이제 혁이가 무엇때문에 신라를 다녀왔는지 제장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니 모두들 경청해 주시기 바라오’

    제장들은 왕건이 서찰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느닺없이 이 장혁이라는 처음 본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라하자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며 장혁이 빨리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리며 조바심을 냈다. 그러는사이 장혁은 장군들의 표정을 살피며 서서히 말을 꺼냈다.

    ‘제가 폐하의 명을 받자와 신라를 다녀온 것은 신라의 경명왕을 만나 폐하의 서찰을 전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장혁의 한마디는 그동안 별반 주목하지 않던 제장들의 귀에 벽력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며 모두들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장혁을 바라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도대체 이름조차 알지 못하던 이 자가 누구기에 그런 중차대한 일을 맡았으며 또 그 이야기를 개국공신인 자기들 앞에서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뜩이나 어제 견훤의 서찰때문에 정신이 없는 이 시점에 신라의 왕이라니… 장군들은 장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신은 경명왕을 만나 폐하의 서찰을 전하고 그 답을 받아 어제 도착하였습니다. 서신의 상세한 내용은 폐하께서 여러분과 다시 논의가 있을것이나 먼저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드리자면 백제왕과 더불어 삼자가 한날 한시에 만나고자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였습니다.’

    장혁이 말을 끊고는 왕건을 돌아보자 대전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왕건은 그 술렁거림을 즐기듯 미소만 띄운채 장군들을 바라보며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고 드디어 참다못한 배현경이 먼저 왕건에게 말했다.

    ‘폐하… 지금 오공이 말한 바는 나라의 중차대한 일로 어제 술희 장군이 가져온 서찰과 더불어 마땅히 여기 모인 저희들이 알아야 할 내용으로 사료되옵니다. 어찌 말씀이 없으신지요?’

    ‘하하하… 맞는 말이오. 허나 내가 말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고 싶소. 여러분들은 어제 또 오늘 백제와 신라의 왕으로부터 각각 서찰을 받았다는 보고를 들었소. 그 서찰에 대해 또 짐의 의도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있으면 기탄없이 얘기해 보시구료…’

    왕건의 질문에 대전은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저마다 왕건의 여유로운 눈빛과 장난기 섞인 미소를 통해 무언가 알아내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였으나 쉽사리 그 저의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서로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장군들과 비교해보려는 통에 대전이 소란스러워졌다. 오직 복지겸만이 의자에 몸을 깊숙히 파 묻은채 꼼짝도 하지 않고 왕건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이었다. 복지겸이 갑자기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왕건을 향해 탄식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절부구조(竊符求趙)…’

    복지겸은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온 큰소리에 스스로도 놀란 듯 눈이 커지며 왕건을 쳐다보았고 그와 함께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지며 모두의 눈이 복지겸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왕건의 얼굴에서 장난스런 미소가 가시더니 용상을 탁치며 일어나며 복지겸에게 말했다.

    ‘복장군… 장군의 생각을 말해보라…’

    왕건의 질문에 복지겸은 할 말을 잃은 듯 왕건을 멍하니 쳐다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왕건이 재차 물었다.

    ‘복장군… 방금전 무어라 했는 지 또 왜 그리 말했는 지 소상히 말해보시요’

    ‘폐하… 저도 모르게 생각없이 나온 말이니 개념치 마옵소서…’

    ‘허어… 방금 무어라 했는 지 말해보라지 않소’

    왕건 또한 자신의 언성이 흥분으로 인해 떨리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듯 주위의 다른 장군들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을 신경쓰지 않으며 재차 복지겸을 다그쳤다. 복지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소신은 절부구조(竊符求趙)라 하였나이다…’

    ‘왜? 왜 그 말을 하게 되었는 지 소상히 말해보라…’

    ‘소신은 그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신이 절부구조라 아뢴것은 소신의 생각이 아니오라 실은 어제 백제왕의 서찰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저희 집에 식객으로 있는 한 현자의 말이 생각나서 이옵니다.

    이번엔 홍유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대관절 그 현자는 누구이며 왜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이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복지겸이 다른 장수들을 둘러본 후 다시 시선을 왕건에게 옮기며 말했다.

    ‘그 자의 이름은 여의솔이라 하옵고 저에게는 먼 친척뻘이 되는 자로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겨하며 사물의 이치에 밝고 무든 일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하여 이태전에 제가 데려와 저의 집에 머물고 있사온데 어제 저의 고민을 듣더니 하는 말이 분명 며칠 상간에 백제왕에게 서찰이 온 것과 같이 신라왕에게도 서찰이 올것이라 하였나이다.’

    ‘허어… 이런 일이… 어찌 집안에 앉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단 말이오?’

    이번엔 박술희가 신기한 듯 물었다. 복지겸이 박술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박장군 그 점이 하도 신기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그 자가 한 그 절부구조란 말을 나도 모르게 흘리게 된 것이오.’

    왕건은 눈빛을 번득이며 무슨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복지겸의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이며 복지겸에게 계속 얘기해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복지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자는 만일 자신의 생각이 맞아 신라왕에게도 서찰이 온다면 이는 분명 절부구조라 하기에 그 뜻이 무어냐 하였더니 지금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폐하의 생각과 같은 지 알 수 없다며 신라왕에게 서찰이 오게 되면 그 때에 가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알려주마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 폐하께서 신라왕으로부터 서찰을 받으셨다하니…’

    턱을 만지작거리던 신숭겸이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절부구조라 함은 다시 말해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겠다는 말이 아니오. 그런데 백제와 신라로부터 받은 서찰이 그 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지…’

    모두들 말을 끊으며 답을 구하듯 시선을 왕건에게 돌리는 신숭겸을 따라 시선을 왕건에게로 돌렸다. 왕건은 다시 용상에 걸터 앉으며 복지겸에게 물었다.

    ‘그래… 그 여의솔이란 자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소.’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저도 또한 저 나름대로 견훤왕의 서찰에 마음을 빼앗겨 있던 터라 난데없이 그자가 말한 절부구조가 서찰과는 관련이 없는 동문서답이려니 여겨 더이상 깊이 묻지 않았사오나 오늘 신라왕의 서찰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되었나이다.’

    복지겸의 말을 들으며 왕건은 몸을 용상뒤로 깊숙히 묻으며 생각에 잠기었고 동시에 모두는 왕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동안 정적만이 대전을 가득채웠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기었던 왕건이 벌떡 일어나 용상을 뿌리치듯 내려서며 복지겸의 자리로 다가들며 말했다.

    ‘복장군… 아니되겠소. 내 그 자를 지금 당장 만나봐야 하겠으니 복장군의 집으로 가십시다.’

    갑작스러운 왕건의 말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복지겸만큼은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이 왕건을 보며 얘기했다.

    ‘폐하… 이 또한 여의솔이 미리 얘기한 준 말씀이오니 들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어서 말씀해 보시구료.’

    ‘여의솔은 이미 폐하께서 자신이 말한 절부구조라는 말을 듣게되시면 분명 자신을 찾을거라 했사옵니다. 다만 폐하께서 자신을 궁으로 불러드리지 않으시고 직접 자신을 찾아온다 하시면 그리 하시도록 하되 필히 박술희 장군과 또 신라로부터 서찰을 받아올 사람이 누구일지 모르나 그 사람만 대동하시기를 청했사옵니다.’

    왕건은 자신이 행동할바를 손바닥의 손금보듯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여의솔이라는 자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박술희와 장혁이만을 대동하라 했단 말이오?’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갑자기 배현경이 대전의 탁자를 치며 분을 참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런 발칙한 자를 보았나… 저 따위가 무엇이건데 감히 폐하까지 납시는 길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단다는 말이오. 폐하 제가 한달음에 달려가 그 놈을 끌고 오겠나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소서.’

    당장이라도 대전밖으로 뛰쳐나갈 듯 몸을 일으키는 배현경을 만류하며 왕건이 말했다.

    ‘허어… 배장군. 배장군은 경거망동을 삼가하라.’

    왕건의 불호령에 배현경이 멈칫하는 사이 이번엔 홍유가 일어나며 말했다.

    ‘전하… 아무래도 폐하께서 직접 납시시는 것은 가당치 않은 줄로 아뢰옵니다. 정히 그 자를 만나시려 하시오면 제가 찾아가 정중히 모셔오도록 하겠나이다. 영(令)을 거두어 주소서.’

    홍유가 말을 하며 동의를 구하듯 다른 장수들을 돌아보자 모두들 홍유와 뜻을 같이하며 왕건에게 고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홍장군이나 복장군으로 하여금 그자를 궁으로 들게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왕건은 자신의 행동을 이해못하는 장군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진정들 하라. 내 비록 아직 그를 만나보지 못했으나 이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훤히 알고 있고 한번 보지도 못한 나의 심중 또한 꿰뚫어 보는 것을 보면 그 여의솔이라는 자는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터 옛날 한중왕이 된 유비는 공명이라는 현인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마다치 않았거늘 오늘 짐이 그와같은 현자(賢者)를 만나려 하는데 어찌 그의 자그마한 당부조차 지키지 못하겠는가? 짐이 예를 차려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을 도우지는 못할 망정 어찌 이리 짐의 마음을 모른단 말인가?’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박술희가 입을 열었다.

    ‘폐하… 허나 그 자가 정녕 현자인지 아닌 지도 모르는 지금에 폐하께서 직적 납시신다는 것은…’

    ‘허어… 어찌 술희 너마저… 그 자가 정녕 현자일지 아닐 지는 내 만나보고 얘기를 나누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터… 제장들은 짐이 하고자 하는 일에 의심을 품는단 말이더냐?’

    ‘망극하옵니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왕건이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인 제장들이 모두들 나에게는 한사람도 없어서는 안될 나의 벗들이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임을 안다. 그러기에 모두들 나의 체통을 염려하여 하는 말임도 알고 있다. 하나 짐이 지금 여의솔을 만나러 가고자하는 것은 나와 여러분들의 뜻을 이루는데 큰 힘을 얻고자 함이니 더이상 이 일을 거론치 말라. 그리고 술희와 혁이는 출궁할 채비를 하여 대전으로 다시 들고 나머지 장군들은 오늘은 각자 해산하도록 하라. 복장군은 나의 출궁을 준비해 주시오.’

    더이상 왕건의 의지에 반(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왕건의 말에 완전히 수긍하지 않은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누구하나 더이상 이일로 왈가왈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개중에는 오히려 왕건의 말을 들으며 기대감을 갖는 자들도 있었다. 왕건 또한 여의솔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고 그렇게 고려의 건국은 또다른 영웅의 탄생과 함께 새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joe 157.***.98.203

      설마 이런글이 머릿속에서 그냥 술술 나오는건 아니겠지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회색빛 75.***.202.6

      전공이 궁금해지네요
      정말 왜 맥가이버가 생각날까요?

    • mayflower 141.***.218.101

      왠지 작품이 나올듯한 느낌이 듭니다.

    • 허거거 68.***.68.31

      일단 선리플 후감상

    • 꿀꿀 75.***.74.106

      슬슬,, 전통 사극에서 fiction 으로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슬슬 연방이라는 제목이 구체화 되고 있는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