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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려연방(大高麗聯邦)
정처없는 긴 여행을 떠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벌써 끝을 걱정하는 우스운 짓거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나니 더이상 바보같은 짓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머릿속에만 가득찬 말들이 제대로 쏟아져나와 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제 1 부 – 통일의 서막
제 1 장 – 개벽(開闢)
왕건의 좌측으로 신숭겸, 복지겸 그리고 우측으로 홍유, 배현경이 오랜 침묵에 잠겨있었다. 모두들 왕건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동안 시간이 흘렀고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음인지 좌중의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성격이 괄괄하기로 소문 난 배현경이었다.
‘시중어른… 여기 모인 우리들뿐 아니라 박술희 장군과 유금필 장군도 이미 동의하신 일입니다. 무엇을 망설이고 계신단 말입니까?’
‘좀 자중하시오. 배장군… 어찌 그리 급하단 말이오?’
복지겸의 한마디에 급히 말문을 닫아버리는 배현경이었고 좌중은 다시 침묵속으로 빠져들었다.
‘제장들의 뜻은 알겠소… 내일까지 내게 말미를 주시오… 내일 내 뜻을 밝히리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왕건이 입을 열자 모두들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누구하나 감히 토를 달려하지 않았다. 복지겸이 조용히 장수들을 둘러보며 고개짓을 했고 장수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을 하나씩 빠져나갔다.
‘시중어른… 내일까지는 꼭…’
동료들의 제지 때문이었음인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배현경의 흐려지는 말 끝을 뒤로하며 왕건은 의자 깊숙히 몸을 묻었다. 그동안 궁예를 따르며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십수년을 대동방국의 기치아래 동고동락했던 궁예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내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이 왕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러 왔다.
‘상공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시기에…’
어깨로 얹어지는 손의 감촉에 흠칫 놀라는 왕건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유씨부인이 말을 꺼냈다. 언제나 집안의 대소사를 지혜롭게 처리하며 왕건이 나랏일만 신경쓸 수 있도록 해주는 왕건의 첫째 부인으로 아직 슬하에 자식을 얻지 못한 것만 제외하고는 왕건에게 있어 너무도 이상적인 아내였다. 유씨부인은 예의 그 푸근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상공. 벌써 축시(새벽1시에서 3시 사이)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주제 넘은 얘기인 줄 아오나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라 하였습니다. 너무 고민만 마시고 여러 장수들의 의견을 따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상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의 대왕께서는 예전의 그 분이 아니십니다. 예전에 상공께서 섬기고 따르던 그 분은 더이상 계시지 않다는 것이옵니다. 사사로운 옛 정은 접으시고 대의(大義)를 따르소서. 그 누구도 상공을 욕할 자는 없을 것이옵니다. 언제까지 백성들을 도탄에 빠져있게 하시려 하십니까?’
‘부인… 내… 부인의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소. 내가 내일 뜻을 이룬다면 부인의 공 또한 적지 않을 것이오…’
‘그럼 마음을 정하셨사옵니까?’
‘그렇소. 내 날이 밝는데로 제장들에게 연통을 하여…’
‘상공… 이미 마음을 정하셨는데 기다릴일이 아닌 줄 압니다. 밖에 윤경이 있느냐?’
유씨는 자신이 출가하기 전부터 데리고 있던 윤경을 불러들였다. 본래 유천궁의 집에 집사로 있던 허아무개의 여식으로 어려서부터 유씨부인과 같이 자랐으며 유씨부인을 언니처럼 따르는 아이였다. 옛날 유천궁의 집에 머문 어떤 고승이 윤경의 남자 못지 않은 체구와 범상치 않은 몸놀림에 반해 직접 무예를 사사하여 태껸과 수박도에 달통(達通)하였고 그 이후로는 늘 유씨의 곁에서 유씨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윤경이었다. 왕건의 수하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 있을때마다 이미 몇번이나 윤경의 도움을 받아왔던 왕건인지라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윤경을 보면서도 놀람이 없었다.
‘찾아 계시옵니까?’
‘상공… 하명하시지요…’
‘그대는 지금부터 여기적힌 각 장군들의 처소로 찾아가 묘시(卯時: 새벽5시 – 아침7시) 라고만 전하되 배현경 장군에게만은 묘정(卯正: 아침6시) 이라고 전하라. 그리하면 모두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것이다.’
‘다른말없이 그냥 묘시라고만 하면 되오리이까?’
‘그렇네’
‘그럼 다녀오겠나이다.’
문을 닫고 사라지는 윤경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유씨부인이 고개를 돌려 왕건을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어찌 배장군에게만 묘정이라 전하라 하셨습니까?’
‘배장군은 성정이 조금 급하여 묘정이라해도 이미 묘시에 출정할 것이니 심려치 마시오. 그나저나 밤이 깊었구료. 어서 잠자리에 들도록 하십시다.’
‘오늘은 동생(오씨부인)에게 가보도록 하소서… 오매불망 여러날을 기다린듯 합니다. 또 무(武: 왕건의 장자, 후에 혜종이 됨)에 관한 얘기도 있는 듯 하니… 그럼 소첩은…’
‘허나…’
이미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유씨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왕건은 말끝을 흐렸다. 둘째부인인 오씨도 오씨려니와 자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제 6살이 된 아들 무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유씨에 대한 미련을 접고 오씨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상공… 밤이 야심한데 어찌 주무시지 않고…’
‘부인은 어찌 하여 깨어 계시었소?’
‘저는…’
말끝을 흐리는 오씨의 목덜미가 붉어지는 것을 보며 왕건이 오씨의 옆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옷고름으로 슬며시 와닿는 왕건의 손에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오르며 고개를 푹 숙이는 오씨부인을 보며 왕건이 호탕하게 껄껄거리더니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방 밖에만 나서면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여장부가 방안에만 들어오면 어찌 이리도 수줍어 한단 말이오… 내 부인을 안 지 여덟해나 지났지만 정녕 그것만은 모르겠소…허허허…’
그러했다. 왕건의 둘째 부인 오씨는 나주 목포 출신으로 어렸을때부터 말타기와 활쏘는 것을 좋아했고 글을 깨우친 후 부터는 늘 병법서를 가까이 하여 전장터에서 쓰일만한 전술은 누구와 논하여도 막힘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특별히 여자들로만 만들어진 호위무사들을 직접 훈련시켜 자신과 유씨부인 또 집안의 어른들을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끔 만든것도 오씨였다. 오씨부인이 만든 이 호위대는 특히 진을 만들어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장기가 있었는데 그 진의 모양이 마치 나비와 꽃이 어우러져 있는것 같다고 하여 특별히 호접화(蝴蝶花)라 불리었다. 첫째부인 유씨에게 윤경이 있다면 오씨에게는 호접화가 있었다. 그나마 왕건에게 있어 다행인 것은 둘째부인 오씨가 유씨 따르기를 친언니 이상으로 따르고 유씨 또한 그런 오씨를 친동생 이상으로 아껴 윤경이나 호접화 무사들이 별다른 분열없이 잘 들 지낸다는 것이었다.
‘부인… 날이 밝는데로 호접화 무사들에게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일을 대비하여 집안을 살피도록 일러두시요… 만에 하나… 그나저나 요즘 무는 어떠하오? 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오?’
어지간히 담대한 왕건이지만 거사를 앞두고 잠을 청하기란 쉽지 않았음인지 이내 화제를 자신의 아들 무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이온지? 무는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모든 것에 열심이옵니다.’
왕건은 유씨부인이 자신을 오씨에게 보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약한 부분인 아들얘기를 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왕에 잠을 잘 수도 없는 노릇… 그리고 내일이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왕건은 오씨의 옷고름을 풀어헤치며 은근이 속삭였다.
‘음… 그래야지… 부인 그나저나 무가 어서 빨리 동생을 봐야 할텐데…’
부끄러운 듯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오씨를 따라 왕건도 이불속으로 몸을 넣었다. 그렇게 또 밤은 새로운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들 살육을 멈추라… 멈추어라…’
‘모두들 멈추어라… 더이상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말라…’
‘무의미한 죽음을 삼가라… 목숨을 아끼도록 하라…’
‘지금부터 무기를 들어올리고 있는 자는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고 내 칼을 받게 될 것인 즉, 모두 무기를 내리고 싸움을 멈추도록 하라’
정개 4년 2월 7일…
(정개: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친 후 쓰던 수덕만세라는 연호를 서기 914년부터 고쳐 부른 연호. 고로 정개 4년은 서기 918년에 해당함…)여명(黎明)속에서 울려퍼지는 좌중을 압도하는 우렁찬 고함소리에 언제 그런적이 있었냐는 듯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잦아들며 가라앉는 먼지속으로 백마에 올라앉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군사들의 눈으로 들어왔다.
‘난 시중 왕건이다. 내가 오늘 군사를 일으킨 연유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여긴다. 지금 태봉의 국왕은 원래 나라를 세우셨던 그 분이 더이상 ㅇㅏ닌 것이다. 원대하고 웅장했던 꿈은 잊은 지 오래고 너희들 부모, 형제의 피와 땀으로 향락과 사치를 일삼으니 내 더이상 도탄에 빠진 너희들을 두고 볼 수 없어 오늘 이렇게 군사를 내었다. 허니 저항을 버리고 모두 나와 뜻을 같이 하도록 하라. 자 이제 저항군의 군사들은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도록 하라. 지금 무기를 내려 놓는 자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군사로 남길 원하면 새부대로 옮겨 줄 것이고, 만일 낙향하기를 원한다면 그 또한 그리해 주겠노라. 허나 만에 하나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부질없이 버리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나서거라… 내 직접 상대해 주리니…’
이미 왕건이 구구절절 얘기를 하기도 전에 상황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항하고자 하는 의욕도 또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던 대항군들은 왕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들 무기를 제자리에 내려 놓았다. 일부 왕건의 군사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일부 다른 군사들은 이미 왕궁을 빠져나간 것으로 보이는 궁예와 그 호위 무사 몇명을 잡으러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배현경, 홍유 등에 의해 장내가 어느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갑자기 오른쪽이 술렁인다 싶더니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덮힌 누군가가 장검을 든 채 불쑥 무리 앞으로 나서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런 장정을 말리는 듯 보였다.
‘여보게 장달이… 왜 이러나? 자네가… 누구보다도 왕시중님의 뜻을 따라야 할 자네가 아닌가?’
‘참게… 장달이… 참어…’
소란스런 군중사이로 배현경이 말을 몰고 들어갔다. 얼굴을 뒤덮은 수염에 말도 놀랐음인지 배현경은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말에서 뛰어 내리며 그 장정 앞으로 다가섰다.
‘이노옴… 아직도 칼을 버리지 않고 무엇하고 있는게야… 감히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겐가?’
‘허~어… 애꾸를 몰아 냈나 싶더니 이젠 다짜고짜 막말밖에 모르는 무식한 놈이 나서네 그려~’
‘뭐…뭣이라…네 이놈을 당장…’
배현경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칼 집에서 칼을 뽑자마자 장달을 내리쳐 갔다. 배현경이 누구던가? 그 수 많은 전장에서도 용맹함을 떨쳐 적들에게 이름만으로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용장중의 용장이 아니던가? 이런 장군이 예의 그 무시무시한 용맹함으로 단 칼에 내려치니 모두들 곧 일어날 끔찍한 광경을 미리 짐작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허~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네 칼 솜씨를 보니 니가 힘께나 쓴다는 배모라는 장수인가 보구나… 허허허…’
군중들은 걸걸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눈을 뜨며 배현경의 칼을 피해 여유를 부리는 장달을 보면서도 눈 앞에 광경이 믿겨지지 않는 듯 입을 쩍 벌리고는 다물수가 없었다. 놀란것은 이 들만이 아니였다. 대항군의 술렁거림을 막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좀 모질지만 극단의 방법을 쓰기로 마음먹고 전력을 다해 내친 자신의 검을 피해낸 것도 놀라운 일이거늘 하물며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돌아와 비록 칼집에서 칼을 빼내지는 못했으나 칼을 칼집에 꽂은채 자신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여유롭게 웃고 있는 이 자의 정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야압’
배현경은 머릿속에 어지러운 생각과는 달리 간결한 동작으로 어깨의 칼을, 아니 칼집을 쳐내며 다시 한번 가슴께를 찔러갔다. 허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자신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한 이 수염투성이는 또다시 옆으로 돌아와 자신의 어깨를 칼집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배현경은 이자가 처음에도 칼을 뽑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칼을 뽑지 않은 것이라 확신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배현경은 재빨리 칼을 거두며 아까와는 사뭇 다른 눈으로 장달이라 불린 자를 쳐다보더니 이내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렇게 일반 병사로 지낼 자가 아닌것 같은데 정체가 무엇이냐?’
여전히 하대를 하며 좀 고압적인 투로 말을 건넸으나 배현경의 마음속에는 이미 이 사내에 대한 호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허어… 그 놈 성정이 난폭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제법 사람보는 눈이 있기는 있었구나… 왕 시중이 너를 버리지 않고 가까이 하는 것도 그나마 니가 사람보는 눈은 있음을 아시는 탓이로구나.’
배현경은 이미 이 거침없는 사내의 거침없는 말투에 기가 눌린 상태였으나 주위를 의식하여 더욱 소리를 높여 얘기했다.
‘무엇을 하는 자이냐? 정체를 밝히라 하지 않았더냐?’
‘허허허… 나는 장달이라고 한다… 왕건 시중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이나 칼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다만…’
‘다만… 무엇이오?’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백마위에 올라 앉은 왕건이 입가에 미소를 띄운채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만… 아까 시중께서 칼을 버리지 않는다면 직접 상대해 주신다 하였기에… 외람되오나 시중어른과 검을 한번 논하여 보는것이 제 평생에 소원이었던지라…’
왕건이 말에서 훌쩍 내려 장달에게로 발걸음을 옮기자 모두들 숨을 죽이며 왕건이 가는길을 좌우로 터 주며 비켜서니 어느새 장달과 왕건 사이에는 길 아닌 길이 생겼다. 이 때 갑자기 왕건의 앞을 막아서며 배현경이 말했다.
‘시중어른… 이러실 일이 아니옵니다. 내 저 놈을 당장…’
칼을 고쳐 잡고 장달에게로 막 달려나갈것 처럼 보이는 배현경을 잡으며 왕건이 말했다.
‘배장군… 배장군께서는 저를 부끄럽게 만드실 작정이오? 나를 어찌 내 입으로 뱉은 말에 책임도 지지 못하는 소인배로 만들려 하시요?’
‘허나…’
배현경은 더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왕건의 눈이 이미 장달이라는 사내에게로 향하며 예의 그 호랑이와도 같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배현경은 아까 장달이라는 사내와 겨룰때 느꼈던 어디서인가 경험했었던 위압감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이제서야 풀리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처음 배현경이 병졸로 지내던 시절 자신의 무예를 알리기 위해 난동 아닌 난동을 부리다가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마주쳤던 왕건. 그리고 왕건의 기도… 바로 지금 저 장달이라는 사내에게 내뿜고 있는 이 기와 똑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까 자신이 장달과 맞닥드렸을때 은근이 자신을 압박해 오던 장달의 기도가 마치 왕건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느끼는 순간 장달이라는 사내의 발이 땅을 박차며 몸을 공중으로 솟구쳤고 동시에 왕건도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떠오르는 햇빛에 눈이 부셔 모두들 눈살을 찌푸렸고 모두들 무슨 아름다운 무용이라도 본 듯한 착각을 느낌과 동시에 장달과 왕건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와…’
‘정말 왕 시중은 대단한 분이군…’
‘둘 다 칼도 뽑지 않고 칼집으로만 상대를 했군… 역시…’
장달의 칼집을 왼쪽 겨드랑이에 낀 채 자신이 칼이 꼽힌 칼집을 장달의 목에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자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저마다 한마디씩 왕건을 칭송하며 수군거렸다.
‘그나저나 저 왕 시중과 대적한 장달이라는 사내도 보통은 아니군…’
‘그러게나 말일세…’
‘그나저나 저자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글쎄… 왕 시중에게 불경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벌이 내리겠지?’
군중들의 수군거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 시작하자 굳었던 왕건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장달은 왕건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자신이 졌음에도 여유로운 표정만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왕건이 칼집을 목에서 거두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혁이 이 놈… 그동안 성취가 많았구나… 이게 대체 얼마만이더냐?’
‘허허허… 알고 계셨습니까? 형님께서도 여전하십니다…’
별안간 바뀐 분위기에 의아해하는 좌중에 둘러 쌓인채 손을 마주 잡고 있는 왕건과 장달 앞으로 배현경이 나서며 말했다.
‘시중어른… 이게 도대체…?’
‘하하하… 배장군… 이리로 오셔서 인사 나누시지요… 이 친구는 제가 오래전에 의제(宜第)로 삼은 오장혁이라는 친구로 어렸을 적 한 스승님 밑에서 검을 같이 배운 동기간입니다.
‘배장군님… 아까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오장혁이라 합니다.’
‘하하하하… 용서라니요? 역시 그러셨구료… 내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 생각했더니 역시 왕시중님의 사제셨구려… 자 정식으로 인사하십시다… 배현경이외다…’
마주 잡은 배현경과 오장혁의 손 위로 왕건의 손이 덮어지니 사방에서 군중들이 환호성을 보냈고 셋은 한동안 미소를 머금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원히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세사람 앞으로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군사를 배현경이 막아서며 물었다.
‘누구냐? 감히…’
‘장군… 저는 복지겸 장군의 부장 서형이옵니다. 일전에 뵌적이 있는 데 알아보시겠는지요?’
‘아~ 윤서형 부장… 근데 어인 일로 이리 급하단 말이냐?’
‘왕건 시중께 급한 전갈이 있사옵니다.’
왕건이 서형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어서 말해 보라’
‘예! 시중어른… 궁 밖으로 달아난 궁예왕과 종간의 소식입니다. 궁 밖을 벗어난 도주중이던 궁예왕과 종간은 그만 성난 백성들에게 잡혀 몇몇 호위 무사와 함께 도살당했다 합니다. 지금 복지겸 장군께서 시신을 거두시어 이리로 오고 있고 저는 먼저 사실을 알려드리라는 분부를 받고 미리 당도하였나이다.’
‘음… 안타까운 일이로다. 비록 대의를 이루지 못하고 변절하였으나 사적으로는 나의 의형이기도 하시니 내 어찌 그 분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배장군은 성안이 정리되면 즉시 다른 장군들과 상의하여 폐하의 장례를 준비해주시요. 또한 이번일로 있을지 모를 군사들과 백성들의 동요를 막는데 모든 힘을 쏟아주시기 바라오.’
‘예… 시중어른…’
대동방국(大東邦國)의 이상(理想)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궁예는 그 뜻을 미처 펼치지도 못한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함께 태봉이라는 나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었고 어둠을 걷고 아침을 알리는 새벽처럼 대고려연방(大高麗聯邦)의 개벽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