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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눈물나는 이야기입니다.
풍족한 미국에서 점점 나태해져가는 제게 채찍질하는 글로 읽었습니다.
6개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다
[내가 겪은 IMF 10년] ‘IMF’ 그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며…
1997년 12월, 나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그때 이미 남편은 6개월치 월급을 집으로 가져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의 표정은 그 무엇이라 할까, 기뻐해야 할 둘째 임신 소식에 남편은 참으로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IMF를 진즉에 예감했던 것일까? 남편은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면 되지, 둘을 낳아서 니가 힘들지 않겠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생하며 이제껏 살아온 터라 자기 자식들에겐 자기의 그런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단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려준 아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마음 약한 남편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리하여 둘째를 낳기로 결정했다.
둘째를 낳고 병원비가 없어 바로 당일 날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니 방은 온기 한 점 없이 냉기가 돌았다. 남편이 총각 시절 자취할 때 쓰던 낡은 전기장판을 꺼내어 꽂았더니 그나마 조금의 온기가 느껴졌다.
전기장판 위에 아기를 눕히고 나도 옆에 몸을 뉘었다. 산모가 제대로 못 먹어서일까. 첫 아이 때 잘 나오던 젖까지 잘 안 나왔다. 갓 태어난 둘째는 배가 고파서인지 쉴 새 없이 울어댔다.
금방 출산한 나는 온몸으로 한기를 느끼며 끓인 물에 밥을 말아 출산하기 전 담가놓은 김장김치로 끼니를 때웠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나….
금반지 팔아 끓여야 했던 멀건 미역국
다음날, 출산 직후 붓기도 빠지지 않은 몸으로 나는 시내에 나갔다. 첫 아이 때 선물로 들어온 금반지 몇 개를 손수건에 싸들고 금방에 팔러 갔다. 아이가 크면 아이에게 좋은 선물을 해주리라 마음먹고 간직해두었던 것인데…. 무엇이라도 팔아야 했다. 젖이 모자라 우는 아이에게 배를 불려줘야 했다.
금은방 주인인 듯한 남자가 퉁퉁 부어 눈도 제대로 안 떠지는 내 모습을 보고, 안 됐던지 시세를 잘 쳐줬다.
돌아오는 길에 미역 한 꾸러미와 들깻가루 한 봉지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미역국을 끓였다. 오래 먹으려고 미역 조금에 들깻가루를 풀고 물을 가득 부어서 멀건 미역국을 끓였다. 쇠고기 한 점 못 넣은 멀건 미역국….
그리고 보일러 기름을 반 드럼을 넣었다. 한 드럼을 넣고 싶었지만 금반지 판돈을 다 써버렸다가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큰 낭패를 볼 것 같았다.
남편은 내가 끓인 멀건 미역국을 먹고 매일 출근은 했지만 이미 회사에서 일은 접은듯했다. 그리고 부도내고 잠적한 사장을 몇몇 동료들과 찾으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잠적한 사장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남편은 13년 동안 다닌 회사에서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1998년 1월 찬바람 몹시 불던 날 남편은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공사를 하는 곳도 잘 없고 게다가 경기까지 밑바닥이니….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일을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온몸이 녹초가 돼 방바닥에 엎어지듯 누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온몸으로 느끼는 추위와 힘든 노동이 남편의 어깨를 짓누르는 모양이었다. 그때 받은 일당 2만5천원으로 그렇게 며칠씩 버텼다. 나는 남편의 의사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려 둘째를 낳은 것이 무슨 큰 죄인 양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IMF의 한파 속에서도 봄은 왔고,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이웃의 소개로 옆 동네 아파트 계단 청소를 시작했다. 5층 건물 여섯 통로를 청소하는데 한 통로당 월 2만5천원을 주겠다고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엔 둘째를 데려다 유모차에 뉘어 놓고 5살 난 큰아이에게 보라고 했다. 비가 오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염치 불구하고 이웃집에 잠깐씩 맡겨놓기도 했다. 월 15만원이라는 돈은 없는 우리 형편에 큰 도움이 되는 소중한 돈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아파트 청소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부녀회장이라는 여자가 느닷없이 2만5천원이 아니라 2만원만 주겠단다. 그렇게 줘도 일할 사람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하기 싫으면 관두라고 했다. 나는 2만원이라도 받고 일하겠다고 했다.
‘두고 봐라. 내가 평생 계단만 닦고 살 줄 아느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어디 깎을 게 없어 뼈 빠지게 일하는 사람의 일당을 깎으려 하느냐….’
속으로 이렇게 말하며,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참고 또 참아야 했다. 그즈음 나는 부업이라는 부업은 다해봤다.
구슬 끼우기, 낚싯바늘 묶기, 또 가을에는 밤깎기 등. 곱던 내 두 손은 어느새 뻣뻣한 나무 막대기가 돼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순전 악으로, ‘깡’으로 버틴 그 세월….
악으로 ‘깡’으로 버틴 세월… IMF 헤쳐나온 정신이면 못 할 게 없다
10년이 지난 지금 남편은 안정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고, 나는 더 이상 부업을 하지 않는다. 남편은 자신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의 배려로 지금의 회사에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어렵고 힘들어 배우지 않으려던 기술을 배워 회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누군가 그랬다. 영원한 직장은 없어도 영원한 직업은 있다고…. 훌륭한 기술이 있다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도 하지 않으려던 그 기술을 밤잠을 설쳐가며 배웠단다. 남편의 그런 성실함은 회사도 인정해줬다.
그때 아이를 낳고 막바로 너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해서 그런지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기에 오늘날 이 정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그때를 후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내 고생을 알아주며 성실함 하나로 이제껏 내 곁을 지켜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때 태어난 둘째가 올해로 11살이 돼다. 젖배를 곯아서인지 또래보다 조금 작지만 그래도 건강하다. 둘째 낳기를 두려워하던 남편도 아이의 재롱을 보며 그때 둘째를 포기했더라면 어찌할 뻔했느냐고 한다.
작년 봄 우리는 드디어 우리 아파트를 마련했다. 남편 이름으로 된 등기부등본을 보고 둘이 눈이 벌개지도록 울었다. 남편이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남편은 IMF 때 차라리 혼자 몸이라면 노숙이라도 하며 살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만 바라보는 6개의 눈망울을 바로 보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노라고…. 그래서 이를 악물었단다. ‘가족의 힘’이란 지쳐 쓰러지는 사람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과 떨어져 처음으로 ‘우리 방’이라는 곳에서 잠을 자던 날 우리 부부는 한잠도 못 자고 수학여행을 온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세월.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IMF를 헤쳐나온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못 이겨낼 일이 없으리라….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튼튼하다면 세상에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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