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바다, 성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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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oica 69.***.144.179 3964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 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에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60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

    A Thousand Kisses Deep – Chris Botti

    • 감사 216.***.191.34

      좋은 시 감사합니다.
      학부 1학년땐가 2학년땐가 저 시집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던게 벌써 이십년이 다 되어가네요. 신촌 어느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샀던거 같기도 하고 알고 지내던 누군가에게서 선물받았던거 같기도 하고…
      사랑하던 사람과 혹시 헤어지게 되면 그 가슴앓이를 꼭 바다너머 성산포에서 소주 한잔으로 달래리라 생각했던거 같기도 하네요. 결국은 가보지 못했고, 이제는 더 넓은 바다 너머가 되어 버렸지만…

    • eroica 69.***.144.179

      이 시를 접한게 한국에서 학교다닐때 이 시를 멋지게 외웠던 선배를 통해서 였는데 저도 성산포 한번 가봐야지 하다가 끝내는 못가보고 이곳에 와있네요. 갑자기 바닷바람 맞으며 술한잔 하고 싶군요…

    • 67.***.30.223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미국에서 먹는술은 취하지도 않습니다.
      한번 미치도록 취하고 싶은데….
      음악좋네요…. 바다소리가 들리는듯합니다….

    • 샌디에고 71.***.252.61

      샌디에고에 살아 매일 보는게 바단데, 한국에서 드물게 달려가 보는 동해 바다 만큼 슬프지 않더군요. 그게 꼭 이제 바다 건너 멀리 살아서 만은 아닐텐데요.

    • eroica 98.***.187.97

      …님, 음악이 좋다니 감사합니다. 저도 취해본적이 언제인지 모르겠군요…

      샌디에고님은 바다와 관련된 슬픈사연이 있나부죠??

    • 그냥 84.***.175.114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 eroica 98.***.187.97

      .
      .
      .
      .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 감으면 보일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 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