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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때는 비행기 값이 아까워서 한국에 자주 못 갔었고
박사 땐 펀드가 있으니 좀 여유롭게 한국 드나들 수 있을까 했는데
이것도 논문이다 페이퍼다 뭐다 해서 여의치가 않았고..3년에 넘게 한국에 못 들어가고 있다가
겨우 이번 겨울 한국행 비행기표 발권하고 지금 들떠있는 중입니다좀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니 바쁘신 분들은 그냥 패스하셔도 되고요.
글써서 뭐 어쩌자는 게 아니라 그냥 오늘 이런저런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서..……………………………..
학부 때 남자친구를 사귀었었는데 그 아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말하면 ‘흑인’이 되겠죠.
여름방학 때 귀국길에 동행하고 싶다고 하여 한 2주 정도를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인사동에서 파는 꿀타래(만드는 과정이 무척 신기하더군요. 맛도 있고!)를 먹으러 같이 지하철 3호선을 탔습니다.
안국역(제 기억이 맞다면..)에서 남자친구랑 내리는데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양복입은 말끔하게 보이는 아저씨가 제 뒷통수에 대고
‘깜둥이랑 xx하는 양공주 년’ 이라고 쏘아붙이더군요.뜻은 몰라도 억양만으로 그 폭력성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 남자친구는 반사적으로 그 사내를 돌아봤고,
단어 하나하나 너무 명확하게 이해했던 저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어지럽고 몸 속에 있는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이미 지하철 문은 닫히고 그 안에선 그 아저씨가 경멸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우리가 지하철에서 끌어안고 있었냐고요?
손도 안 잡고 (한국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영어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알기때문에) 말도 엄청 조용조용히 했습니다.남자친구한테 다 설명해주기도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네가 흑인이라 내가 이런 소리 들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국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나라라고 말하기도 싫어서
대충 ‘이상한 사람이네..’ 정도로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그 일이 지난 한참 후에도 가끔 자다가도 깨서 그 기억에 고통받곤 했습니다.
당시 지하철엔 건장한 청년들, 여대생들이 한 가득이었는데
아무도 저런 모욕적인 언사에 나서서 불쾌해하는 사람이 없었고..
(당시 생각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있는 나인데 내가 뭣땜에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등등..급기야 이러다간 미쳐버리지 싶어
병원에 전화해서 emergency session으로 약속잡고 치료까지 받았습니다.이 모든 일이 지난지 벌써 한참 된 일이고 이제 예전만큼 괴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때 그 아저씨의 목소리, 그 지하철의 풍경, 순간 쓰러질 것 같았던 현기증.. 모두 다 기억납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길에서, 상점에서 제 남자친구를 무슨 동물 보듯, 저를 동물하고 어울리는 친구 바라보듯 했던 시선들도 다 기억납니다.그 친구가 동양인이었어도, 아니, 백인이었었도 그랬을까.. (인종차별)
내가 만약 한국남자이고 그 친구가 흑인여자였다고 해도 그랬을까.. (성차별)
내가 그 아저씨보다 나이가 많았어도 그랬을까.. (나이로 인한 우월감)
한국사회가 안고있는 세 가지 문제를 단 한 줄로 요약한 그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면 참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ㅎㅎ………………………..
후에 그 친구와 헤어지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흑인이 아니니 적어도 한국가서 ‘껌둥이’ 소리는 안 들을 수 있겠구나 안심했더니 이게 웬걸..
한국남자들이 저를 ‘백인에 죽고 못사는 얼빠진 년’ 취급을 하네요.
이유는 홍대 앞이나 강남역에 ‘백인이라면 쉽게 가랑이 벌리는 여자들’이 많아서 그렇답니다.호기심에 한 번 원나잇하는 것과 평생을 걸고 혼인의 약속을 하는 것과의 차이점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무시하기엔
그동안 한국분들한테 받은 상처가 너무 큽니다.비단 한국에 사시는 한국분들 뿐 아니라 미국에 계신 분들마저도 색안경끼고 절 바라본다는 걸 알고있습니다.
계속 그렇게살면 편집증 걸릴 것 같아 아예 한국-한국 커플들하고 어울리는 건 진작에 포기했고,
마음맞는 또래 한국-미국 커플하고만 어울리게 됐습니다.고등학교 때 떠난 한국..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이어가지 못한 탓에 한국어 고급어휘도 많이 잊어버렸고, 서울 가면 어리버리한 저이지만
그래도 김치찌개 좋아하고 아직도 한국노래 들으면 한국이 너무 그립고..
그런 저인데.그런 한국에 가려고 생각하면 걱정부터 하게 되는 것이 너무나 속상합니다.
한국사람을 처음 만나면 방어기재가 작용하는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도 말 잘 통하는 한국사람 하고 살고싶었는데.. 어쩌다보니 미국인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게 됐어요.’라고 먼저 설명하게 됩니다.남편은 한국을 참 좋아합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도 좋고, 한국 음식도, 한국인들 정 많은 것도 좋답니다.
(한국사람들 정 많다는 건 처가집만 겪어보고 하는 말입니다ㅎㅎ)
저 학위 통과되고 자기 한국에 직장 찾으면 한국에 적어도 몇 년은 꼭 살아보자고 조릅니다.다른 국제커플들은 서로 자기나라 가서 살자고 한다는데,
우린 반대로 제가 한국가서 살기가 너무나 두렵습니다.곧 아이도 가질 계획인데
21세기에 아직도 한국이 단일민족이라고 굳게 믿고있는,
또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굴 하얗고 눈 큰 우리 아이들이 ‘한국인’으로 섞여살 수 있을지..한국도 많이 바뀌었다는데 제가 너무 과거의 상처에 매여서 괴로워 하는건지..
두서없이 썼는데 경험자분들의 의견 듣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이 얘기도 하고싶네요.
시작부터 이민자의 나라였던 미국과, 잦은 침략으로 인해 ‘외국’이라는 것에 닫힌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현실을 1:1로 비교한다는 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세계화에 맞춰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한국이 왜 유독 인종문제에 대해선 이리도 비뚤어진 시각을 갖고있는 것일까요?
게다가 ‘백인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영웅대접 받는데, ‘백인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이런식으로 취급받는 게 참… 그렇습니다..)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입니다.
밑에 갖은 악플들이 달렸더군요. 네티즌들 수준 참…
거기서 토론해봤자 입만 아플 거 같아서 리플로 퍼간다는 허락을 구하고 이리로 가져왔습니다.전 ‘백인 여자와 결혼한 남자’ 입니다만, 저도 굉장히 불편한 시선을 느낄 때가 많이 있는데 글쓴이 경우엔 오죽할까 싶습니다.
같이 의견 나눠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