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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재단 편집위원장 강기석
장터에서 얼큰히 취해 돌아오던 마을 사람 박씨(혹은 김씨든 이씨든!) 앞에
‘그것’이 느닷없이 나타나 시비를 걸었다. 이리 가려 하면 이리 와서 막고
저리 가려 하면 저리 와서 길을 막는다. 비키라고 하면 저도 비키라 하고
꺼지라 하면 저도 꺼지라 고함을 지른다. 힘깨나 쓴다는 박씨가 드디어
참을 수 없어 드잡이질을 시작했는데 결국 힘이 부쳐 기진맥진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동네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박씨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짚으로 엮은 싸리나무 몽당비 한 자루가 흩어져 놓여
있더라는 오싹한 결말. 우리가 어렸을 적 많이 듣던 ‘허깨비 이야기’의 대략적
줄거리가 그랬다.
허깨비는 눈 밝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지만,
눈이 흐릿하거나 마음속에 헛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홀려서 이상한 짓
들을 하게 된다고 했다. “(대명천지를 꺼려하고) 밤길 좋아하는 인간일수록
그만큼 귀신과 조우할 가능성이 크다”는 중국 속담도 있다.
[퇴로 끊긴 검찰, “갈 데까지 가보자”]
한신건영의 한모 사장이 지난해 12월 20일의 2차 공판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게
9억 원을 주었다는 검찰에서의 진술을 전면 부인했음에도 검찰은 4일 3차 공판
에서도 여전히 한 총리의 정치자금 불법수수를 굳게 진실로 믿고 있는 듯했다.
이미 퇴로가 끊겼기 때문일 것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정신적 공황상태,
결국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다.
지난 2주 동안 검찰은 900통이 훨씬 넘는 한 사장의 편지와 역시 수백 건이 넘는
구치소 접견기록을 이 잡듯 뒤진 모양이다. 그 결과 한 사장이 한 총리에게 돈을
준 것이 사실인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다수 수집했으며, 이를 토대로
검찰은 한 사장의 검찰 조사과정에서의 진술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 사장의 법정에서의 진술번복의 의미는 자동소멸의 운명을
면치 못할 터다.
검찰은 한 사장이 주로 자신의 모친과 동업자들, 피해자들과의 접견 때 발언과
서신 내용 중에서 2007년 한 사장이 한 총리의 측근 김 실장에게 대여해 준 3억원
외에 또 다른 3억이 ‘한 총리’라는 이름과 함께 거론되고 있음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이에 대해 한 사장은 “한명숙 총리에게 돈을 준 사실이 없다” 는 것을
거듭 밝히면서 자신의 모친에게 김 실장-한 총리 라인으로부터 받을 돈이 있는
것처럼 설정하고 이를 계속 유지한 것은 “(돈 관계에 대하여) 정상적인 말씀을
드리기에 많이 모자라는 모친에게 믿을 만한 곳에서 받을 돈이 있다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라는 의미로 해명했다.
기타 다른 주변인들에게 검찰에서의 진술이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한 부분에 관한
이리 치고 저리 치는 신문에 대해서도 “기억도 잘 안 나고, 만약 그랬다면
오버한 것”, 아니면 “검찰에 협조하기로 이미 그들과 교감했기 때문이었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모자라는 실력을 사술로 메우려는 얄팍한 계산]
추궁과 부인이 반복되며 지루하게 진행되던 검찰과 한 사장 간 진실게임은 이튿날
새벽 1시 가까이 돼서야 끝났다. 당초 검찰은 한 사장과 접견인 간에 오간 수많은
대화 중에서 가장 수상함직한 부분을 발췌 편집하고 동영상으로 충격 효과를 한껏
드높인 CD를 법정에서 터뜨려, 이날따라 방청석을 가득 메운 기자들을 상대로
한바탕 화려한 ‘언론쇼’를 기획했으나 변호인단의 완강한 반발에 막혀 실패했다.
그럼에도 법정 밖에서는 중앙지검 3차장이 검찰 출입기자들을 불러 모아 CD에 담겨
있는 내용과 함께 확인되지 않은 추정사실을 유포하는 ‘검찰의 범죄적 행위’가
끝내 자행됐던 모양이다.
이제 문제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만 남은 셈이다. 뒤늦게나마 한 총리에 대한 존경과
미안함으로, 자신에게 유리할 것은 하나도 없는 대신 온갖 위험과 위협만이 가득한
진실의 길을 택했다는 한 사장. 그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법정에서의 진술번복이야
말로 또 다른 진실의 부정이라고 주장하는 검찰.
어느 쪽이라도 자신의 진실을 입증할 무언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아니면 상대 쪽이 잘못됐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한, 누구를 믿는가의 문제는
결국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끝나가던 새벽 2시 가까이까지도, 최소한 이날 3차 공판에서만은, 어느
쪽도 자신이 옳거나 상대가 결정적으로 틀렸다는 증명을 해 내지 못 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그때 그런 일이 발생했다!
변호인이 물었다.
“한 총리께서 2007년 3월경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로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한 총리께
정치자금을 드리기로 결심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한 적이 있지요?”
“아니, 저는 처음부터 한 총리께 정치자금을 드리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아니, 내 질문은 그런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검찰에서 진술한 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는 답변이 나오자마자 백승헌 변호인은 2007년 상반기 여당은 민주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당시 열린우리당이 와해상태에 빠진 후 중도 통합
민주당이 6월, 대통합민주신당이 8월에 창당됐고 지금의 민주당은 이들을 통합해
이듬해 2월 비로소 창당됐다고 설명했다.
한 총리가 2007년 3월 대선 경선에 나설 생각을 굳히기는커녕 민주당 자체가 겨우
소수 정당으로 존재하던 때였음을 신문형식으로 밝힘으로써 그 해 3월 민주당 대선
경선 운운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가를 조목조목 논증한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과 허구로 짜 맞춘 ‘한명숙 죽이기’ 음모]
검찰의 거짓에 대한 더 놀라운 폭로가 곧이어 터져 나왔다. 검찰 공소내용의 핵심은
그 해 3월 초 한 사장이 한 총리의 비서 김 피고인을 통해 한 총리의 전화번호를 얻었고,
이를 자신의 핸드폰에 입력했으며 바로 한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민주당 경선자금을
제공할 용의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한 사장은 십 수차례 한 총리와의 통화를
통해 자세한 자금 수수날짜와 수수방법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변호인(검찰이 한 사장 핸드폰에 내장된 수백 개 전화번호를 복제한 내용을 보여주며):
“이것이 증인의 전화번호 맞지요? 한 총리와 통화했다면 이 전화로 한 거겠지요?”
한 사장 : “예, 그렇습니다.”
변호인 : “이 전화번호를 복제한 날짜가 모두 2007년 7월 20일로 나오는데 이것은
증인이 핸드폰을 바꿀 때 일괄적으로 이 날짜에 기존 핸드폰에 내장돼 있던 전화번호를
옮겨 왔기 때문입니다.”
한 사장(신기하다는 듯이) : “아, 그렇습니까. 제가 신경질이 나면 핸드폰을 집어던지는
습관 때문에 자주 핸드폰을 바꾸기는 했습니다만….”
변호인 : “그런데 수백 개 번호 중에서 유독 10여 개 번호만은 다른 날짜가 찍혀 있어요.
이것은 나중에 별도로 그 번호를 입력했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면서 변호인은 검찰이 그 부분만 검게 표시한 번호 하나를 제시했다.
변호인 : “이 번호는 한 총리님 번호가 맞지요?”
한 사장 : “예, 그렇습니다.”
변호인 : “그런데 복제날짜가 7월20일이 아니라 2007년 8월 21일과 2010년 4월 26일
이네요?
[이런 재판 더 해도 좋은 건가]
이때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때에야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검사들의 벌레 씹은
표정보다도 한 사장의 천진난만한 반응이었다.
“아, 정말 그러네요!”
백 변호인이 친절하게 결론을 내렸다.
“결국 적어도 2007년 8월 21일 이전에는 한 사장의 핸드폰에 한 총리님의 전화번호는
입력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십 수 번씩 전화를 했을 턱이 없지요.”
그리하여 검찰이 한 사장을 상대로 열심히 꾸민 조서는 처음부터 거짓투성이
엉터리였음이 통렬하게 드러났다. 이런 엉터리 조서를 토대로 한 나라의 총리를
지낸 인물에게 지금 누명을
씌우고 망신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2007년 3월 한 총리에게 정치자금을 주겠다고 직접 전화를 건 후에도 계속 전화로
돈을 건넬
날짜를 정하고, 돈을 건넬 장소와 방법을 정했던 것이 한 사장이 아니라면
아마도 허깨비였을
수는 있겠다. 그렇다면 이 대명천지에 대한민국 검찰은 몽당
빗자루를 부둥켜안은 채 용을
쓰고 있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