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재단 편집위원장 강기석
판사와 검사가 친구라면 사석에서 얼마든지 “이 놈, 저 놈” 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 사이가 아니더라도 어려운 법조문 해석과 법리에 다툼이 생기면 얼마든지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것이 법정에서의 판사와 검사 사이일 것이다. 그러나 검사가 법전을 들고,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기본적인 법조문을 새삼스럽게, 큰 소리로 낭독해 가며, 종주먹 들이대듯 재판장에게 “아느냐, 모르느냐” 식으로 몰아 부칠 때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그런, 해석이 곤란한 민망한 사태가 지난 17일의 5차 공판에서 벌어졌다. 이날 증언대에 선 ‘검찰측 증인’ 한신건영 전 경리팀장 정 아무개씨를 다시 한 번 불러 한만호 전 사장과 대질신문을 벌여야겠다는 변호인측 요청을 재판장이 받아들이려 하자 젊은 검사가 벌컥 하는 마음에 그만 금도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벌떡 일어선 검사가 낭독한 법조문의 요지는 “부패에 관련된 재판은 가급적 신속하게 진행해야 하는 게 재판장의 의무”라는 것이다. 그동안 검찰에게 휘둘려 너무 유약하게 재판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을 살 만큼 점잖은 재판장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얼굴이 굳어진 채 “지금 법원에는 부패 관련 사건들이 수없이 많이 계류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이번 사건은 오히려 너무 빠르게 진행된다는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증인 재소환을 강제했다.
이 젊은 검사의 도발은 돌출행동이 아니었다. 이날 예정된 정 아무개 증인에 대한 변호인단의 반대신문 일정(이 증인에 대한 검찰측 신문은 1차 공판 때 이미 이루어졌음)이 밤 10시 20분쯤 모두 마무리되고, 변호인단에서 ‘상호 약속대로’ 이 증인과 한만호 전 사장과의 대질신문을 위해 한 번 더 소환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키자마자 주임검사가 일어나 “약속한 적이 없다” “증인이 죄를 졌는가” “검찰청에 와서 수사 협조한 사람을 범죄인 취급해야 하는 것인가”라며 큰 목소리로 증인 재소환을 반대했다.
한 번 흥분하기 시작한 검사들은 그동안 재판과정에서 한만호 증인의 양심선언, 변호인단의 의외의 반대신문 등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가졌던 모든 울분을 이 기회에 다 쏟아내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했다. 번갈아 자리에서 일어나 변호인들에게 “쓸데 없는 질문을 해서 시간을 끌기나 하고…” “민주당 인사들이 한만호 증인에게 접근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등등 좌충우돌의 발언을 쏟아냈다.
변호인단, 피고인, 방청객, 결국 재판장까지 향한 분노의 화살
변호인들이 재판정에서 거론되지 않은 사실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을 지적하며 검찰의 ‘언론플레이’를 탓한 것에 대해서도 검사들은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은 오히려 변호인단이 아니냐”며 변호인단이 하는 행동은 전형적인 (검찰) 흠집내기라고 되받았다. ‘흠집내기’라는 단어라면 한명숙 전 총리 흠집내기로만 쓰이는 줄 알았고, ‘언론플레이’는 수구언론들을 좌우에 거느린 정치검찰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방청객들이 검사의 적반하장식 언급에 기가 막혀 실소를 터뜨리자 검사들의 ‘분노의 화살’이 이번에는 방청석으로 날아온다.
법정을 모독하는 방청객의 웃음은 제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광희 변호인이 “자연스런 반응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한 것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이번에는 “저런 (조롱의) 웃음을 어떻게 자연스런 반응이라 할 수 있느냐”며 더 흥분한다. 영락없는 누워서 침뱉기다.
이 난장판 속에 한 전 총리의 비서였던 김문숙 피고가 코피를 쏟으며 잠깐 자리를 비키고 변호인이 재판장에게 그녀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자 또 한 검사가 벌떡 일어난다. “김문숙 피고는 검찰 조사나 곤란한 일을 당하면 상습적으로 쓰러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며 그녀가 ‘꾀병’ 부리는 것임을 암시하면서 진단서를 떼와야만 선처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김 피고는 최근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고 기관지 확장증을 앓고 있음에도 증인이 아니라 피고라는 이유로 계속 검찰의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되어야 할 것 같다.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또 한 사람의 피고인 한명숙 전 총리는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이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허리를 깊이 구부려 무릎에 괸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뒷모습이, 한 전 총리 역시 이미 이날치 체력이 이미 고갈된 것 같아 안쓰럽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간다.
검찰의 적반하장, ‘변호인단의 언론플레이와 검찰 흠집내기’?
검찰이 자제심을 잃었다. 초조해진 것이다. 결정적인 핵심증인 한만호 전 사장의 양심선언으로 뒤틀리기 시작한 페이스가 점점 더 뒤죽박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정 아무개 경리부장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이 증인은 첫 공판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자신이 구입한 여행가방에 한 전 사장과 함께 현금과 달러 3억원 어치를 꾸겨 집어넣던 범죄적 장면을 신나게 묘사했던 인물이다.
감옥에 있는 한 전 사장 지시로 채권회수 목록을 작성해 검찰에 제출했는데 그 목록에 있는 ‘의원, 3억원 지출’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3억원을 전달했다는 유력한 증거로 채택되어 있는 상황이다. ‘의원’이란 말도 한 전 사장이 그렇게 기입하라 해서 기입한 것이고 자신은 그 ‘의원’이 한명숙 총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한 사장이 양심선언만 하지 않았다면 모두 유력한 정황증거로 채택될 만한 증언들이다.
그런데 2차 공판에서 한 사장이 자신의 진술을 완전히 뒤집은 판이다. 채권회수목록도 자신이 지시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검찰에 제보한 남 아무개씨 등이 중심으로 만든 것이서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라 했다.
반면 검찰측 신문 때 한 전 사장 지시로 만들었다고 확언했던 정 아무개 증인은 이날 뒤늦게 “남 아무개씨와 허 아무개씨가 만들라 하기에 한 사장의 지시가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나마 이날 신문과정에서 목록 군데군데 직접 손으로 기입한 숫자들에 대한 증인의 설명이 충분치 못한 가운데 심지어 몇 개의 수치메모는 수사검사 자신들이 적어 넣은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채권회수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데이터베이스 엑셀파일 원본은 잃어 버렸다고 한다.
엑셀파일 원본은 비자금을 관리하는 B장부에서 옮겨온 것인데 B장부에 없는 것들도 적혀 있다. 이 대목에서 계속 헛갈리는 증인의 진술은 결국 재판장으로부터 “B장부에 있는 것이 엑셀파일에 없다면 누락이라 할 수 있겠지만, B장부에 없는 것이 엑셀파일에 있다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까지 받을 정도였다. 직전에 총리를 역임한 분을 의원으로 부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일관되게 자신은 ‘의원’이 한 전 총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았노라고 답변했다.
계속 흔들리는 검찰측 증인들의 증언
이 모든 의문점들을 시원하게 해소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을 다 했다는 공판절차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한만호 전 사장과 정 아무개 증인과의 대질신문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검찰이 반대하는 이유를 떠나 궁극적으로 그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검찰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완강하게 재소환을 거부하던 정 아무개 증인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난 정말 이런 자리에 또 나오기가 싫어요. 내가 돈 주는 걸 본 것도 아니고 그냥 만들기만 한 건데….”
그렇다. 한 사장이 양심선언과 더불어 돈 준 대상을 김 아무개 장로와 건설브로커 박 아무개씨로 특정한 이상 이제 어떤 증인이 증언대에 서더라도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엇갈리는 증언과 불분명한 정황과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추론뿐이다.
“한 사장이 차명폰을 사용해 한 총리와 통화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한 사장이 자기 전화로 통화를 했다가 뒤늦게 이름만 바꿔서 입력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2007년 3월 한 전 총리의 전화번호를 입수한 후 이 번호로 수시로 통화하면서 정치자금 제공 의사를 밝혔고 전달 일시와 장소를 상의했다”는 검찰조서의 핵심내용이 3차 공판 변호인단의 반대신문을 통해 허구로 밝혀지자 5차 공판에서 허겁지겁 검찰이 내놓은 ‘휴대전화 관련 검찰의견’에 들어있는 내용들이다. 원래의 기소내용이 옳았음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해명이라고 내놓은 것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서로 부딪히면서 더욱 조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검찰의 속이 곪아 갈수록 신경질만 점점 늘어가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