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순간 3 – 빨개진 얼굴

  • #83574
    PEs 75.***.141.157 5497

    미국으로 유학와서 받았던 가장 큰 충격중 하나는 역시 영어라는 언어에 있었습니다.

    공학을 전공하고 최적화를 연구주제로 공부를 하고 또 성격도 굉장히 정확한 것을 좋아하다 보니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그 순간 순간들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어쩔때에는 아주 기초적인 표현도 미국사람들 특유의 빨리 옹알거리는 듯한 어투에 못알아 듣고 당황하고 방황했던 일은 얼마나 많았었는지…

    지금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화끈해질 만한 실수는 또 얼마나 많이 했는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화중 하나.
    제 전공분야에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실용화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교수의 수업을 들었었습니다.
    문제는 이분도 젊은시절에 유럽에서 유학을 온 분이라 영어는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액센트가 좀 강해서 유난히 저는 그 분의 수업을 쫓아가기 힘들었습니다.
    사실 영어보다는 그 분의 수업이 힘들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항상 영어라는 컴플렉스가 있어서 인지 무의식 중에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보다는 교수의 영어때문이라는 책임회피성 마음이 있었습니다.

    기말고사 성적표를 본 저는….교수를 찾아가 따지리라는(?) 순진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이미 저의 관심과는 멀었고 오직 열심히 공부한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없다는 그 자존심 상함에 따른 오기였는지…

    물론 유명한 교수라고 학생의 면담은 거절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이분도 더 저의 의견을 겸손히 들어주려 노력했습니다.

    문제는…대화중에 그만 저의 무의식의 불만이(?) 입술로 나와 버렸습니다.
    노교수는 잔잔히 웃으면서 다 들어줬고 이런 이런 이유로 성적을 올리기는 곤란하다(워낙 성적에 짠 분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만 수업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표현을 썼고 이는 교수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누구도 그런 말을 교수에게 한 적이 없었을테니…

    그러자 “과연 그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말에 저는 두 눈 똑바로 보며 당당히 “당신의 영어 즉 당신의 액센트에…”

    희한한 것은 그 교수의 얼굴과 저의 얼굴이 모두 새빨갛게 달아오랐고 한참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오기와 자존심의 폭발은 아니었는지…

    어떻게 그 상황에서 벗어났는지 기억은 안납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유명한 노교수도 컴플렉스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그 상황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이 교훈을 토대로 자신감이 생겼고 그 이후로 정말 치열하게 영어를 위한 피눈물나는 노력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른새벽 영어연설클럽에 가입해서, 되지도 않는 영어로 수년간 짤리지 않고 (미국사람들의 응근한 압박이 많았지만) 끈덕지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해 왔습니다.

    이제는 Senior Manager로 Government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제는 영어문서 등을 작성했을때 다른 사람들로 부터, 서류오류나 표현의 문제 등을 지적받는 일은 거의 사라졌고 그럴때마다 뒤로 돌아 찡한 가슴을 쓸어내릴때가 많아졌습니다. (사실 너무 기초적인 부분입니다만 저같이 유난히 영어에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것도 감동이 되나 봅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 정말 영어 잘 합니다. 저는 이제서야 남들하는 기초(!)를 쫓아가면서 감격해 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동안 영어로 인해 받았던 그 수많은 낯뜨거운 상황들, 난감한 사건들, 미팅에서 주눅든 나를 발견하고 괴로워하던 순간들…

    이제 겨우 기초적인 수준에 달했는데도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항상 저의 뇌리에 한국사람, 동양사람들이 없는 환경에서“나는 한국을 대표한다”라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지난 수 많은 시간이 이제는 아주 조금이나마 결실로 나타난다는 그 보람 때문이 아닐런지요.

    아직도 가끔 그 노교수의 새빨개진 얼굴과 그 상황을 생각해보면서 혼자 싱겁게 하지만 행복하게 미소짓곤 합니다.

    그리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때에 나의 컴플렉스를 깰 수 있었던, 주눅들지 않았던 그 한 순간의 당당했던 용기(?)가 결국은, 나를 오랬동안 쥐고 틀고 있던 깊은 우물에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한국인이라는 자존심과 연결하여 사고하는 것을 보면…결국 나는 이민 1세대라는 그 사실을 발견합니다.

    • eb3 nsc 69.***.51.202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계신 애국자 이시군요..
      한국에서 살때는 몰랐는데, 외국에 나와서 한국인임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고, 그런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스스로 한국인임으로 자존심을 세우고, 기죽지 않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 하고 살고 있지만, 그 벽은 대단히 높더라구요…
      님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정말 대단하십니다.. 참고로 저는 기초적인 수준도 미달 입니다..ㅋㅋ

    • Jeremy 72.***.205.226

      원글님 킹왕짱! ^^
      여기 기초 수준 미달 일인 추가요~ -_-;;

    • 소심한인턴 98.***.231.219

      원글님 너무 감동적인 글이네요.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괜찮다면 퍼가도 될까요?

    • 건들면 도망간다 71.***.107.70

      용기있는 자만이 얻을 수있는 희열 !!!
      듣기만해도 기분좋습니다.

      열심히 사는 모습도 참 아름답습니다.

      용기와 배짱 바이러스 얻어갑니다.

    • 산들 74.***.171.216

      남모를 저만의 고민인 영작 컴플렉스…말만 하면 어찌저찌 기죽지 않을 자신있게 살아왔건만, 영어로 글만 쓸라치면 미국 초등학생 수준도 나오지 않는듯 한 저의 실력에 어찌나 기가 죽는지 영어로 이메일만 써도 긴장 백배에 스트레스 만빵인 저…PEs 님의 글을 보고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른답니다..
      나름대로 노력한다…하면서 실은 아직 노력하려면 멀었다..싶어 부끄럽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시고 당당히 서계시는 PEs 님이 멋집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해요.

    • PEs 75.***.141.157

      두서없이 쓴 글에 좋은 답글을 받으니 송구합니다.
      소심한 인턴님 부족한 글이지만 퍼가셔도 괜찮습니다.

      산들님, 저도 영작을 끊임없이 해야하는 상황이지만, 가장 좋은 것은 경험을 되살리는 것 같습니다.
      영작문 책 아무리 봐도 느낌이 오지 않고 곧 잊어버리죠.

      저의 경우는, 이메일이나 영어서류를 받았을때에 좋은 표현들이 있으면 미리 만들어놓은 워드화일에 저장을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구절이나 표현들은 파란색, 빨간색, 밑줄 등으로 표시해 Highlight 해 놓습니다.

      나중에 영작할 일이 있으면 그 미국사람들의 좋은 표현을 토대로 시작하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그런 표현들을 한 번, 두 번, 세 번,….스무번 이상은 써야 진짜 내것으로 되는 것을 보면…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참 힘듭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느린것이기도 합니다.)

      표현을 외우는 것보다는 나중에 그 요약워드 화일을 열었을때 색깔과 위치 그리고 그 표현들을 저장했던 상황(!)별로 기억해야 진짜 머리에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무식하게 외웠던 표현들 거의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런지… (상황은 기억치 않고 표현만 외웠으니…)

      오늘 날씨 정말 좋은 주말입니다. 모두들 건강하고 즐거운 주말 그리고 여름 되시길 바랍니다.

    • 209.***.126.201

      교수로서의 전공지식 부족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영어 자체에 대한 불만을 학생에게서 듣는다면, 그 상황을 외국인 교수로서 어떻게 극복하면 될까요?

      프랑스계 미국인 교수의 발음이 외국인인 저한테는 가장 알아듣기 힘들더군요. 그래도 미국인 반친구들이 교수 영어에 대해 불만 표현하는 걸 본 적 없습니다. 미국인 귀에는 이해에 문제없지만, 영어가 익숙치 않은 제 귀에만 유독 알아듣기 힘든 프랑스식 영어인거지요.

      이민자로 이루어진 미국에서 대학/대학원을 다니다 보면 각국의 액센트로 말하는 영어를 듣습니다. 각국 액센트의 영어를 겸손하게 이해하는 매너를 갖추는 것도 배워야 할 점인 것 같습니다.

    • 꿀꿀 24.***.40.142

      전 미국온지 5년 됬지만 영어 거의 안늘은거 같아요,,다른분들은 ESL이다 동네 도서관 자원봉사등,또한 파트타임엠비에이다 그런거 하느라 틈틈히 영어공부 하는데,,전 다 귀찮아서 따로 영어공부 한적이 없네요,, 지금도 거의 미국인들하고 일하는데도,,큰일이죵,,ㅋㅋ

    • NetBeans 76.***.131.53

      지난주에선 회사에서 동료가 border를 자꾸 order로 알아듣고, 난 Place order를 Place holder로 알아듣고, 참…미국에서 일하는 제 못습이 말이 아닙니다. 얼굴후끈거릴건 말할것도 없죠. 잘 읽었습니다.

    • 산들 74.***.171.216

      오…정말 좋은 어드바이스이십니다. PEs 님. 요즘같이 출산후 아이큐 3-40은 거뜬 떨어진듯 보여지는 처지에선 무조건 반복에 또 반복이 중요할듯 하네요. 밑줄에 색색깔 화려하게 도구 사용하는건 기본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Jeremy 72.***.205.226

      아놔… 아기는 마나님이 다 나으시고 머리는 제가 나빠지니…
      출산도 한번 안한 주제에 전 왜 이렇죠 그럼??? T.T

    • 왜냐면 76.***.155.252

      원어민 아이들이 다른 나라 엑센트있는 말을 이민자들보다 더 잘알아 듣는 이유는요. 원어민들이 영어를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상대방의 말을 하나 하나 다 듣거나 보는건 아니거든요. 대충 문맥상으로 머리속에서 이미 유추해서 알아듣죠. 그런데 외국인인 저희는 영어가 짧다보니 하나 하나를 다 들어야 하므로 다른 나라 엑센트가 있으면 듣기 힘들어 하는겁니다. 그리고 발음보다는 영어는 강세라고 해야 하나요? 상대방에 알아듣는데 그게 더 중요해요. 발음이 좀 틀려도 엑센트만 제대로 주면 의사소통이 잘됩니다.

      물론 원어민들도 엑센트가 있는 사람의 영어를 알아듣기 힘들어 하긴 하지만 외국인인 저희들보다는 더 잘 알아듣죠.
      그리고… 저는 교수의 조건에는 발음보다는 강의라고 살짝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듣던 수업의 선생님도 정말 엑센트가 너무 심해서 거의 독학을 해야 했지만 정말 사람의 됨됨이나 풍부한 상식과 지식.. 유머까지…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 교수님이 좀 불쌍해 질려고 해요.ㅠㅠ (이상 엑센트 있는 사람이..)

    • done that 66.***.161.110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