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思任堂:師妊堂)·시임당(媤妊堂)·임사재(任師齋)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침공(針工)·자수(刺繡)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山水)·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작품으로 시(詩)에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사친(思親)》 등이 있고, 그림에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등이 있다.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시정(時政)을 논의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일을 없애주는 일 등을 맡아보았다.♣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중국의 어사대부(御史大夫)·어사대(御史臺)에서 유래하였다.통일신라에서 사정부(司正府 또는 肅正臺), 발해에서 중정대(中正臺)라 하던 것을 고려 초기에는 사헌대(司憲臺)라 하였다가 어사대(995)·금오대(金吾臺:1014)·감찰사(監察司:1275)로 개칭되어 1298년(충렬왕 24) 사헌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뒤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으나 1369년(공민왕 18) 사헌부로 굳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문종 때의 관원을 보면 판사(判事:정3품)·대부(大夫:정3품)·지사(知事:종4품)·중승(中丞:종4품)·잡단(雜端:종5품)·시어사(侍御史:종5품) 각 1명,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정6품) 2명, 감찰어사(監察御史:종6품) 10명, 그 밖에 문리(文吏) 5명, 녹사 3명, 영사(令史) 41명, 서령사(書令史) 6명, 계사(計史) 1명, 지반(知班) 2명, 기관(記官) 6명, 산사(算士) 1명, 기사(記事) 10명, 소유(所由) 50명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부터 고려의 제도를 이어 사헌부를 설치, 고려와 같이 감찰행정을 맡게 하였다. 사헌부는 헌부·백부(柏府)·상대(霜臺)·오대(烏臺)라는 별칭이 있었으며, 감찰을 각사(各司)나 지방에 파견하여 부정을 적발하고 그에 대한 법적 조치를 취하는 등 사법권이 있다 하여 형조(刑曹)·한성부와 더불어 삼법사(三法司), 또는 출금삼아문(出禁三衙門)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사헌부와 사간원(司諫院)을 병칭하여 그 관원을 모두 대간(臺諫)이라 불렀다.
사헌부는 관원의 인사에도 관여하여 임금이 결정 임명한 관원의 자격을 심사하여 이에 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서경(署經) 기관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시정·풍속·관원에 대한 감찰, 인사 행정에서 엄정을 위주로 하는 사헌부는 직원간에도 상하의 구별이 엄하여 하위자는 반드시 상위자를 예로서 맞이하고, 최상위자인 대사헌(大司憲)이 대청에 앉은 다음 도리(都吏)가 제좌(齊坐)를 네 번 부른 다음에 모두 자리에 앉는 등 자체 내의 규율부터 엄격하였다.
인사관계·시정탄핵(時政彈劾) 등의 일이 있으면 일동이 당상원의석(堂上圓議席)에 둘러앉아 가부를 숙의한 다음 결정하였으며, 일을 끝내고 퇴청할 때까지 모든 것을 정한 절차에 의하여 일사불란하게 진행하는 전통을 지녔다.
직제는 국초 이후 여러 번 변경되었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고정화되어 《경국대전》에 대사헌(大司憲:종2품) 1명, 집의(執義:종3품) 1명, 장령(掌令:정4품) 2명, 지평(持平:정5품) 2명, 감찰(監察:정6품) 13명으로 규정하고 서리(書吏) 39명을 두도록 하였다. 연산군 때는 지평을 없애고 장령 2명을 증원하였으나 중종이 즉위한 후 환원하였다.
합격자는 진사(進士)로 뽑혔으므로 진사시라고도 하였으며, 이 밖에 감시(監試)·사마시(司馬試)·남성시(南省試) 등으로도 불렸다.
1031년(덕종 즉위)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응시신분은 양인(良人) 출신 중 상층 향리(鄕吏)의 자손, 문무관 자제 이상의 신분이었으며, 응시자격은 중앙의 국자감생을 비롯하여 지방의 계수관시(界首官試)에서 선발된 향공(鄕貢),♣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사학(私學) 십이도생(十二徒生)에게 주어졌다.
시험과목은 제술(製述)·명경과(明經科)로 이루어지고 급제하면 진사가 되어 예부시에 응시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 합격되어 진사가 되면 고려사회의 상층신분으로 신역(身役)과 군역(軍役)을 면제받는 특전이 있었다.
이 시험제도는 고려 말까지 존속되어 조선 건국 후 폐지되었다가 문종 때 진사시라는 이름으로 부활되었다.
동서길이 약 40km, 남북길이 약 60km, 면적은 약 530㎢이다. 최고봉인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오봉산·옥녀봉·상등봉·선창산·금수봉, 서쪽에는 영랑봉·용허봉(룡허봉), 남쪽에는 월출봉·일출봉·차일봉·백마봉, 동쪽에는 세존봉 등이 솟아 있다. 19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회양(淮陽)·통천(通川)·고성(高城)·인제(麟蹄)의 4개군에 걸쳐 있었다.신생대 제3기 중신세 이후에 진행된 경동성 요곡운동으로 형성되었으며, 화강편마암이 노출된 신금강(新金剛)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조립질(粗粒質)의 흑운모 화강암과 반상(斑狀) 화강암으로 형성되어 있어 절리가 발달되고 풍화침식이 쉽다.
남북으로 뻗은 대단층선을 따라 지층이 단락(斷落)하여 기복이 천수백m에 달하는 단층지괴를 형성함으로써 경관의 골격이 구성되었다. 화강암체가 식어서 굳어질 때 생긴 무수한 수직·경사·판상·궁융상 틈결이 오랜 세월 풍화·삭박 작용으로 다종다양한 절리가 조밀하게 진행되어, 1만 2000봉이라 일컫는 기묘한 봉우리를 비롯한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을 이루고, 거대한 암괴(岩塊)·암판(岩板) 등이 변화무쌍한 계곡을 이룬다. 수많은 계곡 곳곳에는 폭포·소·여울을 이루는 맑은 물이 흐른다.
눈·비가 많은 지역으로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7월, 동쪽은 8월에 비가 집중적으로 오며, 겨울에는 눈이 2~3m씩 내린다. 따라서 여행은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4~5월이나, 우기가 끝나는 9월 중순이나 10월이 적기이다. 동해안에 근접해 있어 짙은 안개가 자주 끼며, 산악기후로 일기가 고르지 못해 갑자기 바람이 불거나 순간적으로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단풍은 설악산보다 빠른 9월 하순부터 시작된다.
금강산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남강·온정천·천불천·선창천과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천·동금강천 등의 하천이 있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은데 그중 4대 폭포로 이름난 구룡연계곡의 구룡폭포와 비봉폭포,♣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구성계곡의 옥영폭포, 석문동계곡의 십이폭포 등이 있다. 또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난 삼일포를 비롯하여 영랑호·감호 등 자연호수들이 있다.
식물분포는 해발고도 300~400m 아래에는 소나무림, 해발 300~800m에는 소나무·참나무의 혼성림, 800m 위로는 활엽수림을 이룬다. 940여 종의 식물이 있고 그중 880여 종은 꽃피는 식물이며, 세계적으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1속 1종인 금강국수나무·금강초롱꽃과 한국 특산식물인 금강봄맞이꽃·만리화 등이 있다. 또한 칼새목·딱따구리목·도요새목 등 20여 목의 새와 금강모치·열목어·어름치 등 희귀보호어종이 산다.
곳곳에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를 보이는 유서 깊은 사찰과 석탑·불상·불당(佛堂)·암자 등이 많다. 금강군 일대에는 고인돌 16기, 만폭동·옥류동에는 바위글씨가 있다. 계절에 따른 아름다움이 각각 달라,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한다.
내금강·외금강·신금강·해금강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최고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는 중앙 연봉을 경계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 외금강의 남쪽 계곡은 신금강, 동단의 해안부는 해금강이다.
1998년 9월부터 남북 분단 50여 년 만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동해항에서 북한의 장전항까지는 배로 분단선을 넘고 외금강 온정리에서 관광이 시작된다. 구룡연코스와 만물상코스, 삼일포·해금강코스가 개방되어 있다.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본관 곡산(谷山). 자 인보(仁甫). 호 사인당(四印堂).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에 진급하였으나 사감(私感)을 품은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파천되었다.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서원을 세워 유학(儒學)을 크게 장려하였으며, 1557년(명종 12)에는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그 뒤 숙천부사(肅川府使)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1564년에 가자(加資)되었다.대간제도는 중국에서 비롯하였으며 한국은 신라 진흥왕 때 사정을 담당하는 관리를 처음 두었고, 659년(무열왕 6) 사정부(司正府), 673년(문무왕 13)에 외사정(外司正), 746년(경덕왕 5)에 내사정전(內司正典)을 설치하였다. 발해에서 비로소 대관과 간관을 분리하여 감찰기관인 중정대(中正臺)와 언론기관인 선조성(宣詔省)을 두었다.
대간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와 조선에서이다. 고려에서는 이를 위해 어사대(御史臺)를 설치하고 판사 1명, 정3품 대부 1명, 지사 1명, 종4품의 중승 1명, 종5품의 잡단(雜端) 1명, 종5품의 시어사 2명, 정6품의 전중시어사 2명, 종6품의 감찰어사 10명을 두었는데, 특히 장관인 대부 위에 재상이 겸직하는 판사를 두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서경과 양계에도 분대(分臺)를 설치하고 분대어사(分臺御事)를 두었다.
간관은 성랑(省郞) ·낭사(郎舍)라고도 하는데, 중서문하성의 중 ·하급관료로서 정3품의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 종3품의 직문하(直門下), 정4품의 좌우간의대부(左右諫議大夫), 종4품의 급사중(給事中) ·중서사인(中書舍人), 종5품의 기거랑(起居郞) ·기거주(起居注) ·기거사인(起居舍人), 정6품의 좌 ·우보궐(左右補闕), 종6품의 좌 ·우습유(左右拾遺) 등이 있었다.
고려의 대관은 신료에 대한 시정논집(時政論執) ·풍속교정(風俗矯正) ·탄핵규찰(彈劾糾察)을 담당하고, 간관은 주로 국왕을 대상으로 간쟁 봉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관리 임명이나 법제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가지고 함께 활동하였으며, 또한 일종의 불체포 특권과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될 수 있는 권한 및 승지방(承旨房)을 거치지 않고 국왕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청요직으로 인식되어 선발의 자격도 매우 엄격하여 대체로 과거출신의 문신관료들이 충원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대관은 사헌부(司憲府)에 대사헌 1명, 집의 1명, 장령 2명, 지평 2명, 감찰 24명 등을 두었고, 지평 이상은 탄핵 ·서경을 위한 합좌회의에 참여한 데 비해, 감찰은 관료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만을 담당하였다.
간관은 고려와는 달리 사간원(司諫院)을 따로 설치하고 대사간 1명, 사간 1명, 헌납 1명, 정언 2명을 두었는데, 고려에 비해 기능이 위축되어 풍문(風聞)에 의한 탄핵이 금지되었고 서경권도 5품 이하로 한정되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을 통틀어 언관(言官)이라고도 하였다. 결국 조선의 대간은 왕권에 대한 견제 기능보다 신료에 대한 견제 기능이 중시되었다.
필사본. 이이가 34세 되던 해 홍문관 교리로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면서 지은 글이다. 이 글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논군도(論君道)>, <논신도(論臣道)>, <논군신상득지난(論君臣相得之難)>, <논동방도학불행(論東方道學不行)>, <논아조고도불복(論我朝古道不復)>, <논당금지시세(論當今之時勢)>, <논무실위수기지요(論務實爲修己之要)>, <논변간위용현지요(論辨姦爲用賢之要)>, <논안민지술(論安民之術)>, <논교인지술(論敎人之術)>, <논정명위치도지본(論正名爲治道之本)> 등 11개 편으로 나누어 논하고, 마지막에 1575년 이이가 쓴 〈송조여식설(送趙汝式說)〉이 붙어 있다. 〈송조여식설〉은 조여식이 읍재(邑宰)가 되어 조언을 요청한 것에 대해 답한 것이다.각 편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먼저 제1 <논군도>편에서는 임금이 어떻게 통치하는 것이 바른 도리인가를 역사 속에서 사례를 들어가며 논하였다. 제2 <논신도>편에서는 신하로서 나아감과 물러남의 도를 설명했는데, 즉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나아가 겸선천하(兼善天下)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물러나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것이 도리임을 설명하였다.
제3 <논군신상득지난>편에서는 현군(賢君)이 현상(賢相)을 만나기가 어려웠던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면서 도학을 존숭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4 〈논동방도학불행〉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도학이 행해지지 못했던 예를 서술하고? 제5 〈논아조고도불복〉편에서는 당시까지 우리나라에 고도(古道)가 행해지지 못했음을 논하였다. 제6 〈논당금지세〉편에서는 당시 우리나라의 형세에 대해 논하고 삼대(三代)의 지치(至治)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논술하였다. 제7 〈논무실위수기지요〉편에서는 무실(務實)하여 모든 폐해를 혁신할 것을 논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입지(立志)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제8 〈논변간위용현지요〉편에서는 간신과 충신을 가리어 간신을 멀리하고 현인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9 〈논안민지술〉편에서는 당시 우리나라의 가장 큰 폐법(弊法) 다섯 가지를 지적하였는데 이족절린(一族切隣)? 진상번중(進上煩重)? 공물방납(貢物防納)? 역사불균(役事不均)? 이서주구(吏胥誅求) 등 모두 민생과 관계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신들을 등용하여 이러한 폐법을 혁신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언로를 넓히어 누구의 말이든지 좋은 말은 항상 받아들여야 한다는 등의 부국과 안민의 방법을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며 논하였다. 제10 〈논교인지술〉편에서는 이미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평화롭게 된 후에 윤리·도덕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면서 그 방법을 논하였다. 제11 〈논정명위치도지본〉편에서는 당시의 급선무는 안민(安民)인데 안민은 정명(正名)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정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됨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본서는 16세기 당시의 시대상과 노출된 문제점을 해결하고 왕도지치(王道之治)를 구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이이(李珥)가 어떠한 방법을 제시하였는가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8편으로 구성되었으며 《율곡전서》에 실려 있다. 16세기에 사회와 정부를 주도하게 된 사림파는 개인의 수양과 학문이 사회 운영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신유학의 이념을 매우 강조하였으며, 최고 권력자인 군주의 수양과 학문에 대해서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반인 교육을 위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함께, 16세기 후반 사림파의 학문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이이의 교육에 대한 대표적 저술이다.1편은 임금에게 이 책을 올리는 의미를 밝힌 ‘진차(進箚)’와 서문, 통설 등을 실었고, 2~4편은 ‘수기편(修己篇)’으로서 자기 몸의 수양에 대한 내용을, 5편은 ‘정가편(正家篇)’으로 가문을 바로하는 법을, 6~7편은 ‘위정편(爲政篇)’으로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8편은 학문과 위정의 바른 줄기를 밝힌 성현도통(聖賢道統)을 담았다. 저자는 사서와 육경에 담긴 도를 개략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수기 ·정가 ·위정편은 각기 총론과 여러 개의 각론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본 구도는 《대학》을 따른 것으로서 수기편은 《대학》의 수신(修身)에, 정가편은 제가(齊家)에, 위정편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해당한다. 마지막의 성현도통은 《대학》의 이념이 구현되어온 맥락을 설명하였다. 이후 경연의 교재로 실제 국왕의 학문에 많이 이용되었지만, 일반 사족(士族)들의 학문에도 매우 중요한 저술이었다. 홍대용(洪大用)이 사회를 운영하는 학문으로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과 함께 이 책을 중시한 예에서도 나타나듯이, 개혁의 방향을 탐색하는 데도 오랫동안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을 말하며,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오는 말로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았다.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자신의 옳지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사단은 위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칠정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
기쁨(희 喜)
노여움(노 怒)
슬픔(애 哀)
두려움(구 懼)
사랑(애 愛)
미움(악 惡)
욕망(욕 欲)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가리킨다. 원래 사단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과 관련된 윤리적 범주에, 칠정은 인간의 감정을 총칭하는 인성론의 범주에 각각 속하여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던 말이었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성리학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두 개념은 인간 심성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도덕적 성격을 띠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각각 나타내는 상반된 의미로 인식되어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곧 성리학에서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심성(心性)이 일치한다고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명제 아래, 우주 자연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바탕으로 이기론(理氣論)을 발달시켰고 다시 이를 근거로 하여 인간 심성의 발생 과정과 그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해명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단 칠정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중국에서 사단 칠정의 문제는, 성리학의 ‘이기 심성론'(理氣心性論)의 탐구에 있어 하나의 과제로 다루어지기는 했어도 태극론(太極論)과 같은 우주론에 비해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단과 칠정의 발생 과정을 이기론적으로 해명하는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이것은 대규모 논쟁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서 처음 발생하였고 나중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사이에서 다시 논의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사단이 이(理)에 속하는가 아니면 기(氣)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와, 이(理)가 과연 발동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두가지 문제였다. 16세기 말에 발생하였던 이 논쟁은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학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리학자가 이 문제를 다루었을 정도로 한국 유교의 전개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사람의 마음이란 매우 오묘한 것이어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마음에 대한 관심은 오랜 것으로 보이며 인심도심설의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중국 철학사에서 인심도심설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 것은 중국의 고전인 《서경》의 기록에 따르면 요순시대라고 본다. 그뒤 《논어》나 《순자》와 같은 책에서 인심도심에 관련된 구절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해석은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고, 11세기 송나라의 주자(朱子)에 이르러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그는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의 머릿글에서 인심도심의 문제에 의의를 부여하고 그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인심이란 대체로 인간의 신체적 기운에서 나타나는 것이요, 도심이란 선천적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볼 때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은 도심이요, 그 자체로서는 부도덕한 것은 아니나 신체적인 기운에 따라 부도덕으로 흐를 위험성이 높은 것은 인심이다. 사람의 마음이 원래는 한마음이지만 그것이 작용할 때 의리를 따라서 나타나면 도심이요, 신체상의 어떤 욕구를 따라서 나타나면 인심인 것이다.
따라서 도심에 대해서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인심에 대해서는 선한 경우와 악한 경우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심이란 곧 도덕적인 마음이다. 이것이 순수하게 착한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고날 때부터 착하다고 보는 것(性善說)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인간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그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도심은 이러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심은 성질상 매우 미묘한 것이어서, 마음의 깊은 곳을 잘 살피지 않으면 도심을 깨달을 수가 없고, 그러한 점에서 욕심에 흐르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도심에 비하여 인심이란 그 자체를 가리켜 부도덕한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항상 부도덕으로 흘러갈 위험성이 있는 마음이다. 즉, 인심의 성질은 위태로운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 감각적인 욕구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며, 그런 만큼 맹목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경》에서는 ‘도심은 희미하다(道心惟微)’라 하고 ‘인심은 위태하다(人心惟危)’라 하였다.
한국철학에서 인심도심설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이다. 이황은 ‘인심은 칠정(七情)이 되고 도심은 사단(四端)이 된다’라고 말함으로써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인심을 인욕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인심을 나쁜 측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이는 47세 되던 1582년 <인심도심도설>이라는 글과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올리면서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논리적이고 명석하게 정리하였다. 이이는 사람의 기질이란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이는 인심과 도심은 서로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는 이른바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을 주장하고 있다.
즉 인심과 도심은 서로 쌍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인심이던 것이 나중에 도심이 되고 처음에 도심이던 것이 나중에 인심이 된다는 것으로, 인심과 도심의 상호작용을 밝혀주는 의미가 된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인심은 감성적인 것이고 도심은 이성적인 것이다.
북쪽은 대령리(大領里), 남쪽은 청산리(靑山里), 서쪽은 신평리(新坪里)와 접하며 동쪽은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남도 안주시와 마주한다. 박천군 덕안면 남오동·동사동이 1949년 10월 리로 개편되었고 남오동은 남오리와 서호리로 분할되었다. 1952년 12월 면이 폐지되고 남오리·서호리·동사리가 박천군 율곡리(률곡리)로 통합되었다.
박천평야에 있어 대부분 지역이 청천강과 대령강의 퇴적작용으로 이루어진 충적지이다.♣선불폰파는곳,♣0*I*o=3*9+8*2=4*4+2*9♣선불폰팝니다.♣ 일부 지역에 해발고도 50m 정도의 구릉이 있어 과수원으로 이용된다. 동쪽 기슭으로 청천강이 흐르며 리 영역에서 그 길이는 2.5km이다.
산림은 없고 리 면적의 90% 이상이 경작지이다. 그중 논이 60%, 밭이 29%, 과수원이 6.7%를 차지하며, 예로부터 벼농사지대로 알려졌다. 고등중학교·인민학교·병원이 있다. 북서쪽으로 단산리∼박천읍 간 도로가 지나며, 박천읍까지는 16km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