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생각과 안맞으면 ‘헌법도 NO’…취임선서 무색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7-06-09 01:51 기사원문보기

2003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은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되는 취임 선서를 했다.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지금 노대통령은 헌법을 ‘천덕꾸러기’ 로 취급하고 있다. 독립적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7일 자신에 대해 내린 ‘선거중립의무 위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8일 원광대 특강에서, 선관위 결정의 근거가 된 선거법 9조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 조항’에 대해 “위헌” “위선적 제도” 등 헌법을 부정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선관위가 전날 ‘자제’를 요청하며 보낸 전자공문을 간단히 무시한 것이다.

노대통령은 앞서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지난 2일 참여정부평가포럼 특강에서는 “토론 한번 하고 싶은데 ‘그놈의 헌법’이 못하게 한다”며 현행 헌법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번만이 아니다. “헌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치문화”(2006년 2월), “지금은 헌법논리가 좀 과잉돼 있는 상황”(2005년 8월)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이번 선관위 결정에 대해 단 한번도 ‘수용’ ‘존중’ ‘이해’ 같은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대신 ‘법적 대응’ 방침만 밝힐 뿐이다.

2004년 3월 선관위가 “국민이 압도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노대통령 발언에 대해 선거법 위반 결정을 했을 때 청와대는 “일단 존중하지만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히 한다”고 논평한 것과 대비된다. 법률가인 노대통령의 법철학이 3년만에 바뀐 것인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법학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노대통령이 ‘권한’과 ‘권리’의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김상겸 동국대 교수는 “권리는 국민에게만 있고, 대통령의 권한은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노대통령과 청와대가 선관위 결정에 대해 법적 대응 수순에 들어갈 경우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지’도 문제될 공산이 크다. 현직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상대로 위헌 소송을 제기한 적은 전무하다. 그러나 청와대는 권한쟁의심판 청구나 헌법소원 제기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김상겸 교수는 “대통령이 법적 소송을 하거나 국가기관에 법적 대응을 지시할 경우 대통령이 헌법 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는 “(법적 대응을 할 경우) 이는 법이 아니라 법의 이름을 빌은 권력남용”이라고 비판했다. 한교수는 율사 출신 노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의 법인식에 대해 “법의 이념이나 정신에 대해선 전혀 인식이 없고, 조악한 법률실증주의에 빠져있는 것 같다”며 “이전부터 우려해왔지만 지금은 그 수준을 넘어서서 국가의 권위 자체에 도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대통령이 1987년 6월항쟁 당시 국민들이 피흘려 쟁취한 현행 헌법의 가치를 경시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다. 한상희 교수는 “노대통령이 예전 권위주의 정권에서 법이 수단과 도구로 사용되던 그 사고틀을 넘어서지 못한 것 같다”며 “87년 헌법에 대해 정서적 애착이나 이념적 동일시가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87년 당시 6월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을 지냈다.

〈안홍욱·김재중기자 ah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