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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적에 운동권들의 거창한 구호보며 킥킥거리곤 했었다.
집에 가면 제 부모 형제 설득할 능력도 없는 것들이 실천할 대의와 변혁은 어찌나 많은지.그리고 이 운동권이란 것들 혹시 상처받지 않은 놈들이 아닐까도 의심스러웠다.
운 동권에 있으면 종자가 보인다. 상처받고 그 상처를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제발로 학습하고 찾아온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말하니까 같이 대화하기는 짜증나도 항상 건강하다. 그리고 뭔가 잘못되었다면, 그 운동권 교리가 자신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떠나는 친구들이다. 이런 애들이 건전하다.꼭 이렇게 예쁘지 만은 않다. 이론이 자신의 경험을 빗겨갔음에도, 그 사실을 고의적으로 망각하고 몸을 더 깊이 담그는 친구들도 있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 경우다.
최 악의 경우는 따로 있다. 본인의 존재와 무관한 학습된 적에게 분노하는 것이다. 거꾸로 매달린 한국현대사 속의 미제와 Das Kapital안의 자본에게 분노하는 경우다. 하는 얘기의 톤이 다르다. 허상과 싸우는 인간들. 사실 이 넘들에게 사회 모순이란 배우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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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의 신선놀음? 솔직히 내 인상은 그랬다. 온통 거창한 말을 걸친 벌거숭이 임금같은, 전혀 실속없는 저 사회적 논쟁들과 실천들이 의미하는 바는, 말하자면 보들리야르가 말한 유한계급들만의 비생산적인 오락의 형태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우리는 학벌이 뛰어났으니까.
운동권들의 언어의 기반이 되었던 사회과학과 철학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몹시 흥미로웠다. 그러나 운동권들은 그 사회과학이나 철학을 사실상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들은 단지 대의와 적이 필요했을 따름이다. 그래 우리 남자들은 어릴 적 꼭 한번씩 로보트를 타고 지구를 구해보지 않았는가.
참여정부. 스스로 평가한다는 그 무리들은 어떠한 투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하였던 한총련과 꼭 닮았다. 이들이 “평화 민주 원칙 상식의 대의를 걸고 소신 뚜렷하게 실천하여 역사에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었다”고 자평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아는 가장 유치한 종류의 운동권 인간들의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