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라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무의미한 경우가 있거나, 많다. 그래서 어떤 철학적 입장에서는 비유라는 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무현에 대한 비유도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본의에 의해서나 본의 아니게나 논리적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비유를 동원해서 굳이 우리는 노무현을 옹호하고 자기 조소에 빠져야 할 것인가?
노 무현을 내가 결혼하고 싶어 안달하던 화장빨 좋고 섹시하던 여인으로 보아서, 이제 와서 연애 때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비난하는 나를 단순한 못난이로 볼 수도 있나보다. 그러나 노무현을 고용주인 내 마음에 들고 싶어서 안달하던 입사 지원자였던 사람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저는 귀사에 꼭 필요한 인재이며, 귀사의 경영 방침을 가장 열렬히 존중하는 인물이며, 귀사의 통합과 번영을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여 회사를 위해 노력하겠노라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입사지원자가 일단 입사하고 나니까 회사의 방침, 분위기, 의사결정과정 등이 잘못되었다면서 고용주들을 무시하고 자기만 옳다고 한다면, 당혹스럽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고용주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실하고 겸손한 것 같더니 알고 보니까 오만한 종파주의자로서 회사의 단결을 깨고 개인 추종자들을 조종 혹은 조장하여 자기만의 세력으로 자기 멋대로 회사를 운영하려 한다면, 비난 받아야 할 것은 그의 본성을 모른채 속아서 그를 뽑았던 고용주인가, 아니면 표리부동한 인품의 그 사원인가?
노 무현을 뽑을 때 사람들은 그가 민족의 영도자나 조국의 수령이 되어 주리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를 뽑은 것이 아니었다. 때 묻지 않은 듯 보이는 젊은이–미국의 미디어는 그를 young man 이라고 기술했었다–가 “바보”같은 순결함과 겸손으로 통합 (지역주의의 청산 혹은 개선)과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들의 충실한 하인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노무현을 영도자나 수령처럼 섬기는 자들이 그를 ‘단군이래의 성군’, ‘태종’, ‘무서운 (무서울 정도로 영리하거나 현명한) 사람’이라는 괴상한 수사를 사용하며 숭배하고, 노무현은 오로지 그들만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은 찾아왔다. 노무현은 탈권위의 피해를 보고 있는가? 그는 권위있는 (authoritative) 사람은 되지 못하면서 도리어 권위를 내세우기만 하는 (authoritarian) 사람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가? 탈권위를 내세우는 권위주의자의 모습을 노무현과 노무현 개인숭배자들은 초래하고 말았다. 화합과 평화의 전령이고 합의의 도출자가 되어줄 것 같던 그는 많은 불화의 근원이 되었고, 더 치명적으로 (굳이 진보나 개혁이라는 간판을 내세우기를 싫어하면서도 그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자져 주었던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우리편” 내부의 불화와 분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이제 노무현과 그의 개인숭배자들에게 상처 받고 결국 “못난이”임을 스스로 인정하기를 종용당하는 순진한 사람들, 순진해서 편리한 대로 이랬다 저랬다 자기 원칙이나 염원을 배신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전선”이 모호해져버린 가치관의 혼란에서 우리는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노무현이 알고 봤더니 적들이 보낸 트로이의 목마였다고 한탄하게 되는 지금, 우리는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그들이 혈연적으로 혹은 사고 방식에 있어서 유신의 후예라는 연좌제적 이유 말고는 그들을 굳이 반대해야할 이유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들 중의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혹시 아는가, 그 혹은 그녀도 노무현 처럼 훼까닥 해 버려서, 비록 한나라당 출신이면서도 우리 편 노릇을 하게 될런지? 그 혹은 그녀도 우리가 보낸 트로이의 목마로서 권력의 상당 부분을 우리와 공유하게 될지 모를 일이고, 명박 빠나 박빠들은 자신들의 대장을 맹종하여 자기 대장이 하자는 대로 우리 편에게 유리한 발악들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누가 알랴? 유시민처럼 자기내 편 힘 빠지게 만드는 자들이 한나라당의 선봉장들 중에서 속출하게 될런지. 상처받고 혼란에 빠진 마음들을 어떻게 추스릴 수 있을까?
지금 필요한 건 자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똑같이 물어뜯어야 할 것도 아닌 듯 하다. (“증오를 파는 사람들”이 조선일보인지 노무현 개인숭배자들인지 묻고 싶을 정도다 요즘은.) 뼈아픈 반성–반성과 자책은 다르다.–속에서 냉정히 관망하고 모든 것을 기억하기를 제안한다. 지금 당장은 어찌할 바가 없는 듯 하다. 기억했다가 조만간 응징하고 도태시켜 버리자.
배신자들, 변절자들을 숙청해야 한다. 정치가들의 죄악상을 기억하고, 노무현 개인 숭배 교리 구축에 앞장 섰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 다음 칼럼, 대담기사, 세미나 같은 데 나타나서 양식과 비판을 가진 것처럼 말을 바꿔서 매명도 하고 돈도 버는 정치 룸펜들 (박원홍의 ‘정치 룸펜’ 발언은 당시에는 틀렸었지만, 이제는 맞다) 의 기회주의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까지 발악하는 소위 노빠 논객들과 노빠 논객에서 한나라당 진영으로 전향한 자들은 말한 것도 없다.
오십보와 백보는 다르다. 백보 도망간 자들을 도태시킨 후에 오십보 도망 갔던 나도 스스로 도태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