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다음은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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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건이 아웃됐다. 충격, 당혹, 놀람 등의 단어가 난무하는 모양이다. 모두가 언론의 장삿속이 낳은 준비된, 그리고 각색된 반응들일 따름이다. 지나가는 정치부 기자 붙잡고, 하다 못해 여의도의 평범한 가방모찌 붙들고 솔직한 속내를 떠보시라. 고건 전국무총리의 대통령 선거 포기는 충분히 예상된 사태전개였다고 실토할 터이니.

    선수들은 고건의 낙마를 진작부터 예견해왔다. 나는 고건의 암울한 운명을 작년 여름에 인지했다. 희망한국연대의 출범식에 다녀온 이후 주저 없이 그에게 가위표를 그었다. 혹시 하는 기대감과 미련을 아예 접어버린 것이다. 사실상의 신당창당행사에서마저 극구 정치를 할 의사가 없다고 우기는 인물에게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정치활동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연애만 잘하면 뭐하나? 프로포즈가 젬병인데.

    심 증을 물증으로 굳힌 계기는 또 있었다. 지인들과 점심식사를 하다가 고건캠프의 핵심참모 두 명에 관한 얘기가 흘러가듯이 언급되었다. 둘 다 정통 내무관료 출신이라는 전언이었다. 즉 평생 동안 책상머리에서 결재도장만 찍던 공무원 아저씨들 데리고 대권에 도전했다는 뜻이다. 무슨 동사무소 꾸릴 일 있냐? 차트만 말쑥하게 만드는 양반들과 함께 용꿈을 꾸게. 가족들의 만류가 정계은퇴의 결정적 이유였다는 관련보도를 접하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행이다. 저 정도 그릇과 깜냥의 인사가 진짜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성군으로 느껴질 지경으로 나라를 말아먹었을 것이 틀림없다.

    다 시금 못박아두는 바이다. 3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분들께서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망상과 욕심을 어서 빨리 거두시기 바란다. 행정은 대기업이고, 정치는 벤처회사다. 쪽박 아니면 대박이다. 제 손해는 쥐꼬리만큼도 보지 않으면서 정권을 재창출 내지 탈환하겠다는 생각은 도덕적 해이의 발로이자 도둑놈 심보의 극치다. 콕 집어 얘기하겠다. 정운찬 전서울대총장 같은 샌님 부류 말이다. 남들이 공들여 잔칫상 차려놓으면 얌체처럼 숟가락만 달랑 들고 나타날 궁리만 해대는.

    역설적으로 이회창 전한나라당 총재가 지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두 번의 대선에서는 이미지 구길까 하는 걱정에 부자 몸조심하기 바빴으나, 이제 昌에게는 더는 잃을 게 없다. 친아들부터 사돈의 팔촌까지 가문 전체가 망신살이 뻗칠 대로 뻗친 처지다. 이판사판 대권 3수생 이회창이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다. 배짱과 투지 방면에서 몰라보게 업그레이드되었으리라.

    체 면 중시하고, 스타일에 목매는 사람들을 행운은 여신은 몹시 혐오하기 마련이다. 원아웃은 고건이 기록했다. 그렇다면 투아웃은 누구 차지일까. 김근태 열린우리당 당의장이 두 번째 중도탈락자로 자리할 확률이 높다. 세 번째 희생양은 확실히 단언하기 어렵다. 왜냐? 노무현 대통령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대선후보는 고건과 김근태뿐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입김에 취약하다는 건, 곧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주저앉힐 수 있는 한심한 대권주자라는 의미다. 노무현한테도 쩔쩔 매는 주제에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니니 국민들의 냉소와 경멸을 자초할밖에. 김근태도 고건도 결국은 노무현에게 단호하고 박력 있게 맞서지 못한 게 몰락의 단초였다. 노무현의 졸개나 노리개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고건이 사퇴한 마당이니 김근태를 보낼 순서다. 대통령에게 맞짱을 뜨라는 게 반드시 반노가 되라는 주문은 아니었다. 청와대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고 독자적 의제와 고유의 비전을 갖추라는 요구였다. 고건과 김근태의 공통점은 거울이라는 데 있다. 한결같이 수동태다. 거울은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주인이 앞에서 어른거려야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고건의 재산이 세라면 김근태의 자산은 명분이었다. 전반적 조건은 오히려 김근태가 고건보다 훨씬 유리했다. 김근태 또한 나름의 지지세가 존재하였으므로. 허나 김근태는 주어진 기회들을 전부 날렸다. 노무현이 국면전환 카드로 개헌을 꺼내들었을 때 분연히 “No!”라고 외쳐야 옳았다. 한데 되레 거꾸로 처신했다. 계급장 떼고 토론하자고 큰소리를 치다가 대통령의 서슬에 이내 꼬리를 내렸던 분양원가공개 논쟁 당시의 추태를 되풀이했다.

    주요 대권주자 중에서 대통령 4년 연임제로의 헌법개정에 요란스럽게 찬동한 경우는 김근태가 유일하다. 노무현이 드리운 낚싯대를 사뿐하게 분지르고 넘어감으로써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격이다. 역시나 김근태는 노무현의 영원한 밥이었다. 영남친노로 분류되는 김두관, 김혁규, 유시민조차 말을 아끼며 관망자세에 들어갔건만, 어떤 동기와 연유에서 근태형은 노짱의 개헌제안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걸까?

    김근태 의장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정신을 차렸음에도 헛발질의 연속이라면 이는 전적으로 GT가 무능한 탓이다. 김근태는 노무현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싶었으리라. 개헌정국의 총대를 메는 대가로 청와대가 통합신당 추진작업을 암묵적으로 양해해 주리라고 계산했을 게다. 세상에! 노무현에게 그리 뒤통수를 맞고도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니. 노무현을 신용하느니 차라리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행인을 믿어라. 여론조사에서 확인된 민심이다.

    김근태 의장이 노대통령을 믿는 만큼의 단 10분의 1만이라도 국민과 유권자를 신뢰했다면 내가 감히 고건 다음은 김근태가 불출마 선언할 차례라는 전망을 확신을 가지고 내놓지는 못했으리라. 하지만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개혁세력과 진보진영 입장에서 고건과 김근태는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X차 1호와 2호였으니. 2007년의 화두는 ‘진취적 기상’이다.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일을 이룩하는 창발적 문제해결능력과 거리가 먼 정치인들은 경쟁에서 도중하차하는 구도다. 있으나마나 고건이나, 구시렁구시렁 김근태나 진취와는 담을 쌓고 지내온 성격이기에 억울해할 까닭은 없다.

    노무현의 영향력에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새가슴들의 잇따른 퇴출과 더불어 참여정부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일용할 양식이 떨어진 대통령으로서는 현실정치에 개입할 동력과 지렛대가 모조리 사라지는 셈이다. 이왕 컷오프 통과에 실패해 예선탈락할 팔자라면 김근태 의장은 고건 전총리와 다르게 눈치 재지 말고 시원하게 소신껏 스윙이라도 해봤으면 한다. 종전대로 구시렁거리며 무대에서 퇴장한다면 그야말로 한국정치와 민주화운동의 총체적 비극이 될 테니까. 분명 시나리오는 슬픈데 등장한 배우들의 연기력이 워낙 수준미달이라 구경하는 관객들이 차마 대놓고 웃기도 힘든 희비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