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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article/article_frame.asp?go=content§ion=정치사회&id=15106盧武鉉씨의 정신건강 검증자료
부인 권양숙씨에 대해 상습적으로 폭행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또 한 명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 본문 중에서..
『조져야 돼, 그래야 꽉 잡고 살 수 있어』
《△『찍힌 거지요, 제가. 참여정부의 언론 정책이 괘씸죄에 걸린 것 아닙니까?』『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실한 상품이 돌아다니는 영역은 미디어 세계입니다.』 (1.4 과천청사 공무원 격려 오찬 연설)
△『제가 그래도 왜 그래 인기가 없나 말을 막말을 많이 하다 보니 그렇다 하니까, 할 수 없죠』(2006.12.27 부산 북항 재개발보고회 후 오찬간담회)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미국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습니까』『미국 재무부가 BDA 계좌동결조치를 한 것을 국무부가 몰랐던 거 아닌가 이렇게 볼 수도 있고 또 나쁘게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냐 이렇게 볼 수도 있죠』 (2006.12.21 민주평통 상임위 연설)
△『일본에서 국가가 일어나서 통일되면 한국에 와서 짓밟고 중국이 통일되고 또 중국에서 새 왕조가 일어났다 하면 꼭 한국에 와서 분탕질 쳤습니다』(2006년 12.9 뉴질랜드동포간담회)…》
노무현 대통령의 「막말」이 계속되면서 그의 정신 건강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정신과의사 중에는 盧대통령에 대해 「境界線(borderline) 인격장애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思考와 가치관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불안정한 多重인격이란 것이다.
의학서적은 「境界線인격장애」에 대해 『대인관계와 정체성 혼란 및 불안정한 정서 그리고 심한 충동성을 광범위하게 나타내는 인격 장애』로 정의한다. 이들 환자는 『자신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과 맞는 사람과의 인간관계에만 집착한다』고 정의된다. 혹자는 대통령의 소위 「코드人事」가 그런 심리상태를 투영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 증상의 가장 큰 특징은 『정체성 혼란과 불안정한 정서』이다. 의학서적을 좀 더 인용해 보자.
『이들 환자의 약한 自我는 좌절(挫折)에 부딪혀 혼란(混亂)을 느끼면 퇴행(退行)하여 정신병적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정체성이 분열돼 있어서 모순적(矛盾的) 행동을 잘한다. 어떤 대상을 좋아할 때는 우상화하다가, 돌연 악평을 하며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盧대통령 언동의 가장 큰 특징은 모순적(矛盾的)이라는 것이다. 2006년 12월 민주평통 연설에서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 『피를 흘려도 우리가 흘려야지요』라고 말한 뒤엔 69만 명인 국군병력은 『50만으로 줄입니다. 더 줄여야 됩니다』고 했다. 美軍은 나가게 하고 國軍이 피로써 지켜야 한다더니, 같은 연설 끝 무렵엔 20만에 가까운 국군을 감축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2002년 9월 대통령후보 시절 『反美주의면 또 어떠냐』고 말한 盧대통령은 2003년 5월 訪美 중엔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盧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 발언 중 이른바 「정치범수용소」 발언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주변에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9월24일 오마이뉴스는 정부의 핵심고위관계자가 이 같은 말을 전했으며, 청와대의 前現職 고위 관계자들로부터도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反美에서 親美, 다시 反美로 번복되는 모순된 언동의 전형인 것 이었다.
<부잣집 친구 가방 면도칼로 찢어>
심리적 특이증상은 대개 어린 시절의 성장환경에서 형성된다고 알려졌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盧대통령의 유년시절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94년 출판된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유년시절 가난과 열등감, 그로 인한 반항적 태도로 거짓말·도둑질 등 엉뚱한 사건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자신을 오늘날까지 몰고 온 지칠 줄 모르는 마음속의 풍차였다고 덧붙혔다. 가난, 열등감으로 인한 상처가 「무슨 말」이든 마다않는 자신의 에너지원이 됐다는 고백이다.
《국민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의 대부분은 가난과 열등감, 그로 인한 반항적 태도,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자존심과 우월감도 그에 못지않게 강했다. 우월감과 반항심이 가끔 엉뚱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다들 보자기에 책을 싸 들고 다니거나 퍼런 돗베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다. 가끔 고무에 헝겊을 댄 가방도 있었는데 읍내의 부잣집 아이들이나 간혹 가지고 다니는 고급 가방이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당번이 되어 친구와 둘이서 교실을 지키다가 그렇게 생긴 새 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둘이서 가방을 뒤적여 보다가 그만 면도칼로 가방을 죽 찢어 버렸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모르겠다. 체육시간이 끝나자 교실은 곧 발칵 뒤집혔다. 담임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나는 끝내 자백을 않고 버텨 넘어갔다. 그 일을 생각하면 본래 내가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일 말고도 거짓말을 했거나 훔친 일이 몇 번 더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도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하게 여기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상반된 이 두 가지 생각이야말로 지금까지 지칠 줄 모르며 나의 삶을 오늘날까지 몰고 온 내 마음 속의 풍차였는지도 모르지만(「여보, 나 좀 도와줘」 169~172)》
盧대통령은 2002년 8월 사석에서 『나는 욕설이 체질화된 사람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막노동판에 있었는데 그때 배운 게 욕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거친 성격이 성년이 된 후 더욱 굳어져 버렸다는 자기 고백이다.
<이불 개라면 물 젖은 발로 질겅질겅>
盧대통령의 거친 기질은 결혼 생활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부인 권양숙씨에 대해 상습적으로 폭행했었다고 적고 있다. 다만 운동권생활을 시작하면서 과거의 사고방식에 대해 후회하고, 변화됐다고 적고 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해보자.
《나는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기도 했고 고함치기도 했다. 그러니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나는 별 생각을 다 했다. 「아 속았구나」싶기도 했고 나도 잘못하다가는 큰형님처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갓 결혼한 친구들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수유리 뒷산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다. 친구들 중 하나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盧형은 형수님을 그렇게 꽉 잡고 삽니까? 비결이 뭡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인생의 대선배나 되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물론 농담이었지만 전혀 거짓말도 아니었다.(「여보, 나 좀 도와줘」 124~126)》
盧대통령은 이 같은 술회 이후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사회운동」은 나의 다른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바꿔놓은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남학생이 화내는 것 이해 안 돼>
盧대통령은 연이어 운동권변론을 벌이던 85년경의 또 다른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부산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만든 공해문제연구소에 내 사무실의 일부를 내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청년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나는 대뜸 이렇게 농담을 했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또 한 명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청년들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참 난처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학생이 화내고 덤비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남학생이 펄쩍 뛰는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여보, 나 좀 도와줘」 126~127)》
盧대통령은 역시 이 같은 고백 이후 『그 이후 나는 그때까지 나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여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나와 아내 사이도 달라졌다. 나도 아내를 존경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아직 실천은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달라진 것만은 틀림없다』고 적고 있다.
【수세에 몰리면「사퇴」虛言. 취임 후 그만둔다는 말 열네 번】
盧대통령은 정치적 수세에 몰리면 「공직 사퇴」를 공언하는 좌절-혼란-퇴행의 악순환을 반복해왔다. 그는 대통령직 취임 이후 『대통령 못 해 먹겠다』등 「자리걸기 식」발언을 14차례나 한 것은 물론 대통령 후보, 국회의원 시절에도 사퇴와 철회를 반복해왔다.
△『내각 구성권 이양하겠다』
盧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2일 국정연설에서 『내년 총선에서 특정정당이 특정지역에서 3분의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발언은 한나라당이 국회를 주도하는 여소야대 상황이었던 점에서 충격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盧대통령은 2003년 5월21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한총련의 광주 5·18묘지 시위사태 등 사회각층의 기강문란을 빗대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 했다.
△『재신임 묻겠다』
盧대통령은 2003년 10월10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직에 대한)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핵심측근인 최도술 前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자금 수수와 관련,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데 대해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드리고 책임을 지려고 한다』며 『수사결과 무엇이든 간에 이 문제를 포함, 그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는 당시 국민투표 등을 거론하며 『아무리 늦더라도 총선 전후까지는 재신임을 받을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재신임 절차는 이뤄지지 않았다.
△『10분의 1넘으면 정계 은퇴』
盧대통령은 대선 자금 관련 측근 비리가 불거지던 2003년 12월14일 4당 대표 회동에서 『우리가 쓴 불법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틀 후 기자회견에서도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며 『실제로 10분이 1 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넘으면 정계 은퇴 하겠다』고 했다.
당시 盧대통령의 발언은 수사를 진행 중이던 검찰에게 「노무현 캠프의 불법 대선 자금을 한나라당의 10분 1이 넘지 않도록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이라는 여론의 맹공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은 2004년 3월8일 노무현 캠프의 불법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7분의 1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盧대통령은 정계 은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수도이전, 『정부의 진퇴를 걸겠다』
盧대통령은 수도이전 논란이 한창이던 2004년 6월1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 정책(수도이전)은 참여정부의 핵심과제이자 국운이 걸린 문제로 정부의 명운과 진퇴를 걸고 반드시 성사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같은 해 10월 「수도이전특별법」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렸음에도, 盧대통령은 사퇴(辭退) 대신 대체 입법을 만들어 수도이전을 강행했다.
△『권력 절반 이상 내놓을 용의』
盧대통령은 2005년 6월 소위 연정(聯政)을 제안하면서 『권력을 통째로 내 놓겠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2005년 7월6일 인터넷을 통한 대통령 서신을 통해 『취임 후 첫 국회연설에서 국회가 지역구도 문제의 해결에 동의한다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의 절반 이상을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지금도 될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것이라도 내놓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튿날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도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한다면 대통령 권력을 내놓겠다. 내각제 수준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할 용의가 있다. 선거를 다시 하기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같은 달 28일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도 『당장 총선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합의만 이뤄지면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大聯政을 구성하고, 그 聯政에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하고 그리고 선거법은 여야가 힘을 합하여 만들면 된다』고 했다.
△『권력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할 것』
聯政을 위한 「권력포기」발언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盧대통령은 8월24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독일 슈뢰더,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자리를 걸고 승부수를 던진다는 예를 들며 『참 부럽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뭐냐? 이것, 당을 걸고 승부할 수도 없고 자기 자리를 걸고 함부로 승부할 수 있는 것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고, 그렇다고 명색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사표만 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는 이튿날 KBS에 출연, 『(한나라당이) 聯政 그 정도 갖고는 얽혀서 골치 아프니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해보겠다』며 한나라당에 대해 『형식 논리가지고 게임하고 그러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으로부터) 나한테 더 큰 요구가 있으면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는 8월30일 열린우리당 의원 130여 명을 초청한 청와대 만찬에서 聯政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며 『노무현 시대가 새 시대의 출발이 아니고 구시대의 마감이 돼야 한다. 새로운 정치문화와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수 있다고 전제된다면 「2선 후퇴」나 「임기 단축」을 통해서라도 노무현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시작할 수도 있다는 의지와 결단도 생각해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이튿날 중앙언론사 논설·해설 책임자들과 간담회에서도 「2선 후퇴」「임기 단축」와 관련 『나도 구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몇 가지의 과오에 대해 그간 짊어지고 (노무현) 시대를 마감해 버리는 것이 좋지 않냐, 솔직히 그런 생각도 가지고 있다』며 『지역주의 극복이 聯政 제기의 근본 취지』라고 말했다.
△『내 임기는 이제 거의 끝났다』
盧대통령은 2006년 8월13일 4개 신문사(경향신문·서울신문·한겨레신문·한국일보)의 외교·안보 담당 논설위원들과 비공개 오찬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20%대 지지도 못 받는 대통령으로서의 심정을 토로하며 『내 임기가 거의 끝났다』는 자포자기 성 발언을 했다.
△『임기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11월28일 국무회의에서 『임기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전효숙 헌재소장표결과 관련, 『국회가 표결을 거부하고 방해 하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고 불법 행위』라며 『대통령 인사권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의원직 사퇴 두 번 ·대선 땐 再신임 번복】
盧대통령은 대통령후보, 국회의원 시절에도 사퇴와 철회를 반복해온 인물이다.「자리걸기」식 발언은 그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주요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盧대통령은 1988년 4월26일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같은 해 11월7일부터 사흘 간 열린 5공 특위 청문회에서 일약「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3월17일 『의회 기능의 無力에 대한 회의감과 민중생존의 노동운동에 대한 불법탄압에 항의하기 위해』라는 이유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가, 17일 만에 철회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그는 『돌아오게 된 당당한 논리는 없다. 마음이 흔들리던 중 주위에서 여러 사람이 얘기한 게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은 이기택 의원을 총재로 하는 소위「꼬마 민주당」 활동 당시인 1990년 7월13일 다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제51회 정기국회 개원을 앞 둔 같은 해 9월7일 이를 철회했다.
「정치판이 체질에 안 맞는다」는 첫 번째 사퇴와 달리 두 번째는 특별한 이슈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2002년 노무현 캠프가 펴 낸「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이라는 책자는 『7월11일 당시 민자당이 국방위에서 일체의 토론 없이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한 데 대한 항의였다』고 적고 있다.
2002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이후에도 盧대통령의「자리걸기」식 허언(虛言)은 계속됐다.
그는 2002년 6월10일 비서실 회의에서 『6·13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후보 再신임을 받겠다』고 밝혔고, 6월12일 기자간담회에서도 『再신임을 받겠다는 약속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6·13지방선거가 영남권 광역단체장은 물론 全지역에서 민주당 대패로 귀결됐음에도, 盧대통령은 6월17일 『8·8 국회의원 재·보선 후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을 재실시할 용의가 있다.
재·보선 후 누구든지 입당시켜 원점에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을 다시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再신임」을「모든 기득권을 버린 再경선」으로 표현 강도를 높이면서 8·8 재·보선 이후로 쟁점을 빗겨간 것이다.
盧대통령은 이후 8·8 재·보선 역시 민주당이 대패했음에도(한나라당이 13개 지역 중 11곳에서 승리함), 국민경선을 다시 실시하지는 않았다.
盧대통령과「꼬마 민주당」을 같이 했던 동향 출신의 정치 선배인 박찬종(朴燦鍾) 前 의원은 2002년 6월호 월간조선에서 盧대통령의 의원직 사퇴 등 돌출행동과 관련, 이렇게 지적했다.
『대통령은 국민의 삶과 나라의 운명에 직접적, 충격적으로 파문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이다…나이가 들고 수양을 하면 성격이 고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동지로서 경험하고 그 후로도 10년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盧의원은 그의 말과 행동의 불가측성(不可測性)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엔 적절치 않은 사람이다…대통령 자리는 순간적 감정이나 충동으로 권한 행사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盧후보는 전혀 안심이 안 된다.』
아래는 당시 朴 前 의원의 월간조선 인터뷰 全文이다.
《『꼬마 민주당 여섯 명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식상한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기대를 모으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盧의원이 돌출행동으로 「이 ×판에 너희는 남아 있고, 나는 바이바이(bye-bye)다」 이거예요. 盧의원의 부산상고 선배인 李基澤 창당 준비위원장은 화가 나서 「나타나면 이 ×× 때려 죽인다」고 그러고…. 우리는 기분이 좋았겠나? 하루 종일 회의한 결과 나머지 다섯 명도 보조를 맞추기로 했어요. 모두 사퇴서를 내고, 의원 회관 사무실도 폐쇄했어. 결국 어찌 됐노? 다 돌아오는 거야. 돌아온 후, 두 달 치 歲費(세비)를 東京 YMCA 건물 매입비용으로 기탁했어요』
朴 前 의원은 『꼬마 민주당 하면서 盧武鉉 의원이 말한 거라든지, 그 후에 말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국회의원·장관·총리는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야. 그러나 5년 임기의 대한민국─국제정치 역학 관계 속에서도 대단히 불안정한 관계 속에 있고, 경제적으로도 성장 엔진이 나가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대통령, 헌법상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대통령 자리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국민의 삶과 나라의 운명에 직접적, 충격적으로 파문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가 아는 현재까지의 盧의원은…(여기까지 말한 朴燦鍾 前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Character is fate(성격은 운명이다)」고 썼다.)』
『나이가 들고 수양을 하면 성격이 고쳐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동지로서 경험하고 그 후로도 10년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盧의원은 그의 말과 행동의 不可測性(불가측성)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엔 적절치 않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실험이나 연습으로 시킬 수 있는 자리라면 몰라도, 또 우리나라가 태평성대이고, 대통령 임기가 6개월 정도라면 이 사람도 해 보고 저 사람도 해 보는 가운데 盧武鉉 같은 독특한 사람도 해 볼 수 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남북한 관계·경제·국제 정세 등 이 엄혹한 현실에서 말과 행동에 不可測性을 가진 盧武鉉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적절하지 않다, 이거요. 이런 불안정한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
『뭐가 위험한가 하면 그의 不可測性이 위험한 거지요. 대통령이란 누가 제어할 수도 없는 자리 아니요? 지금은 후보니까 불쑥불쑥 한 마디 해도 되지만,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거나,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나 정상회담을 하다가 기분이 나쁘다고 막 해 버리면 어떻게 되나?YS가 중국 江澤民(강택민)과 얘길 하다가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했다가 韓日관계에 어떤 문제가 생겼소? 전혀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해서 그것 때문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오지 않았소?
재벌 해체나 韓美관계 등에 대해 불쑥 불쑥 한 마디씩 한다고, 실제로 그렇게 하진 못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고. 뒷수습도 못 하고….지금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우리도 盧武鉉을 잘 모르겠다」고 한 말이 不可測性을 얘기한 거 아니오?』
…
―(기자) 그렇다면 盧武鉉 후보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청문회에서 보인 순발력이지. 머리 회전이 아주 빨라요』―옛날 13代 국회나 꼬마 민주당 시절, 盧武鉉 후보의 언론관 등을 엿보실 기회는 있었습니까?
『13代 국회 때는 의원직을 두 차례 사퇴했고, 마지막 청문회 때는 全斗煥 前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돌출적 행동 외에 盧武鉉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 특별히 다른 걸로 주목받거나 한 기록은 없어요. 그래서 14代 때 낙선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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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前 의원은 盧武鉉 후보가 「노동운동의 代父, 민주화 투쟁의 化身, 젊은이들의 친구, 규격화·부패무능한 舊정치인 집단에서 신선한 충격과 바람을 일으키는 샛별」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나는 盧후보가 여기 있으면 反問하겠어요. 「과연 당신은 노동자의 代父답게 치열하게 그들의 삶에 다가갔는가?」, 「1980년대 그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民推協 멤버도 아니었고, 6·29 이전 주요 시국 사건에 변론을 맡아 온몸을 던져 인권변호사로 일한 기록이 있느냐?」라고…』
朴 前 의원은 『그럼 그가 왜 그렇게 보여지느냐?』고 自問하더니, 바로 답을 내놓았다.
『13代 국회에서 그가 보여준 의원직 사퇴 소동이나 청문회 등을 통해 뭔가 조금 특별해 보이는 점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레토릭(修辭)이 특별해. DJ, YS, 李會昌, 朴燦鍾 類의 인간들과는 다른 레토릭을 쓰고 있어요.
가령 韓美관계 같은 경우 「전통적인 우호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 상호방위조약도 존중되어야 하고, SOFA는 독일·일본 수준으로 전향적으로 개정되어야 하고, 북한의 안보위협이 상존하는 한 駐韓 美軍 철수는 안 된다」고 얘기하게 마련이에요. DJ라도 그렇게 얘기한다고요.
그런데 盧武鉉 후보는 「韓美관계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얘기한다고. 얼른 들으니까 독립선언하는 것처럼 들려요.
미국에 대한 감정은 朴대통령도, YS도, DJ도, 李會昌도, 朴燦鍾이도 가졌을 감정이에요. 盧후보가 韓美관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얼핏 들으면 미국의 영향권에서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이요. 그러다가 미국 자본이 단숨에 빠져나가고, 주가가 폭락하고, 미국이 시장을 막아 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겁니다.
李承晩 대통령 때 1950년대 중반 미국과 마찰을 빚다가 미국이 두 달 동안 기름을 끊는 바람에 두 달 만에 李대통령이 손을 든 적이 있어요.
대통령 자리는 순간적 감정이나 충동으로 권한 행사를 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盧후보는 전혀 안심이 안 돼요』 》
【대통령 정신감정은 의무사항 되어야】
《(2006년 8월11일. 趙甲濟) : 오늘 필자가 8.11 서울역 국민대회에서 『노무현씨의 정신감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 대회 직후 자리를 함께 한 전직 국정원 간부와 사단장 출신 예비역 장성은 『정말 그게 중요하다. 조종사의 정신감정은 거의 매년 하는데 安保의 열쇠를 쥔 대통령 이하 핵심 고위공직자에 대한 정심감정은 의무사항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 간부 출신은 『노무현씨의 행태는 정말 아슬아슬하다.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을 향해서 명패를 던질 때부터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해야 했었다. 대통령이 된 뒤 보여준 행태는 그런 비정상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여객기 기장도 정신감정을 받는데 4800만의 안전을 책임진 대한민국호의 조종사는 반드시 정심감정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아침 만난 한 서울法大 교수도 『우리 헌법엔 대통령이 치매, 조울증 같은 질병을 앓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없어 자칫하면 국가변란을 부를 소지가 있다』고 걱정했다. 그도 대통령의 정신감정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新入사원을 뽑을 때도 신체검사, 정신감정을 하는데 대통령을 뽑을 때 그런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크나큰 헛점이다. 선거에서 뽑히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안이한 태도이다. 선동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정신질환자를 뽑을 위험성이 있다. 특히 한국인처럼 뭔가 돌출적인 행동이나 奇行을 하는 이들을 좋아하는 국민성이 있는 나라에선 선거가 정상인을 뽑는다는 보증장치가 될 수 없다.
늦지 않았으니 노무현씨의 정신감정을 공식으로 요구할 때이다. 그의 최근 행태는 분명히 비정상이다. 정상적인 직무가 불가능한 정도라면 有故로 판정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어야 한다. 盧씨의 최근 행태로 미뤄 그는 남은 재임기간 중 대한민국에 대해서 품었던 앙심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상을 안기고 물러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성욱 객원기자
김성욱기자 2007-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