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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노빠들은 베네쥬엘라에는 조선일보가 없어서 그렇다고 찌질거릴듯.
지난 3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대해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회는 75%의 투표율에 차베스가 62.89%의 득표율로 승리를 확정지었다고 공식 발표했다.세 번의 대선을 치르는 동안 차베스의 지지율은 계속 상승해 왔다. 차베스가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1998년 12월 선거 득표율은 56.2%였고 개헌 후 새 헌법 아래 치른 2000년 7월 선거의 득표율은 59.76%였다. 매 선거마다 차베스는 지지율을 3% 이상씩 꾸준히 끌어올린 것이다.
이는 지난 16대 대선에서 48.9%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불과 4년 만에 지지율 11%(2006년 11월 14일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헤럴드경제> 12월 6일 설문조사에서는 5.7%)로 곤두박질친 것과 명백히 대조된다.
비슷한 출발, 서로 다른 길 걸은 노무현과 차베스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에서 차베스와 노무현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고등학교 학력을 지닌 사람이 대통령 한 번 하는 게 정말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고 토로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베네수엘라의 하층을 형성하는 메스티소 출신의 차베스 대통령은 둘 다 사회 기득권층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 구정치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지닌 국민들의 개혁 열망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점, 기존 정치권 내에 기반이 강하지 않았던 것, 미국에 대해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낸 후보였다는 점도 유사하다.
무엇보다 정부 출범 초기 국민의 ‘참여’를 강조한 대목이 일치한다. 어쩌면 이 점에서는 정부 명칭을 아예 ‘참여 정부’로 지칭한 노무현 대통령의 센스가 한 발 앞섰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대통령의 센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유사점에도 차베스의 지속적인 지지율 우상향 곡선과 노무현의 우하향 추세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를 발생시킨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이행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된 차베스는 취임 두 달 만에 제헌의회 소집에 대한 국민의 찬반 의견을 구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제헌의회 소집은 차베스의 주요 대선 공약이었다.
차베스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만든 선거 운동 조직의 명칭은 “제5공화국운동”으로 이는 당선되면 곧바로 제헌의회를 소집해서 헌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썩어빠진 나라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꾼 새로운 공화국, 제5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차베스의 선거 구호는 매우 간단명료했다. 구체제를 청산하고 남미 독립의 영웅인 볼리바르의 정신을 계승한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 구호는 단순한 듯하지만 당시의 베네수엘라 상황과 국민 정서를 집약적으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민의 목표 담은 볼리바리안 헌법
남미 경제 일반이 그렇듯이 베네수엘라도 80년대 들어오면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든다. 유가가 하락하고 석유 담보의 무분별한 외채도입이 급팽창하면서 82, 83년도의 이른바 남미 ‘외채위기’가 폭발한 것이다.
남미의 경제침체가 장기화 국면에 돌입하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레이건 정부의 미국 재무부가 나서 구제금융 조건으로 남미 국가들에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핵심 내용은 긴축재정, 사회보장의 축소, 외채 상환시기 조정, 부채 주식 전환, 통신, 항만, 석유, 철강, 항공 등 기간 국유기업의 민영화, 미국식의 남미 무역 자유화 등으로 1997년 IMF가 한국에 내린 처방과 닮은꼴이다. 이 기반 아래에서 80년대 말부터 남미 국가들은 전반적인 신자유주의 경제기조로 선회한다.
베네수엘라는 1989년 페레즈 정권, 1993년 칼데라 정권이 연속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국민의 3분의 2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석유를 비롯한 주요 기간산업의 민영화도 IMF 프로그램대로 진행되어 우리나라 KT에 해당하는 국영전화공사가 민영화되고 1997년에 이르면 외국 자본이 베네수엘라 은행의 지분 41%를 쥐고 흔드는 등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겪는 모든 과정을 이미 10년 전에 경험하고 있는 상태였다.
80년대 ‘잃어버린 10년’의 경제 침체와 90년대 신자유주의 10년으로 피폐해진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근본적인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광주 민중항쟁에 비견되는 1989년 카라카스 봉기가 발생하여 수천의 민중이 희생된다.
육군 전자통신학교 출신의 애국적 군인 차베스 중령이 군내에 조직한 지하 정치조직 MBR-200을 주축으로 반미 반신자유주의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투옥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92년이었다.
차베스의 쿠데타는 과두 지배세력과의 결탁 또는 사주에 의해 발생하는 남미 일반의 쿠데타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쿠데타가 실패했음에도 차베스는 국민적 영웅으로 인식되었고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들이 차베스의 석방을 공약으로 내걸어야 했을 정도였다.
차베스의 구체제 청산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반영한 것이었다. 40여 년간 베네수엘라를 장악해온 지배체제는 정부와 관료조직, 입법부와 사법부, 주요 국영기업, 언론, 자본의 요소요소에 퍼져 있었다.
제헌의회 소집을 묻는 국민투표는 88%의 찬성을 얻었고 두 달 뒤 제헌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총 131명의 제헌의원 중 친차베스 진영은 119명을 당선시키는 압도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차베스는 1999년 12월 다시 국민투표를 거쳐 마침내 새로운 헌법인 볼리바리안 헌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어설픈 개혁정권은 신자유주의의 ‘트로이 목마’
제헌의회 소집과 신헌법 제정은 베네수엘라 혁명이 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신헌법은 무엇보다 기존 체제와 절연한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국민의 뜻을 집약하는 강령과 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 혁명정당이나 통일전선의 강령이 해당 정당이나 통일전선 참여세력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베네수엘라 신헌법은 국민 전체가 추구하는 목표를 제시하고 그 방법과 기본 정신을 350조나 되는 장문의 헌법 조항에 일일이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헌법은 이후 차베스가 하위 법안 특히 49개 개혁입법을 통과시켜 석유산업의 실질적 국유화를 단행하고 유휴 토지를 국민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막강한 담보가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정치조직인 볼리바리안 서클의 주요 학습교재도 신헌법이었고 2002년 4월 쿠데타가 발발해 차베스가 감금되어 있을 때 대통령궁으로 몰려든 국민들의 손에도 신헌법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이처럼 신헌법은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새로운 사회의 목표, 구성원리, 방법론이자 베네수엘라 혁명의 상징이었다.
제헌의회 소집과 신헌법 제정은 또한 정치권과 입법기관의 구체제에 대한 확실한 인적 청산 효과를 가져왔다. 대통령 선거 한해 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 다수를 점유하고 있던 보수정당의 인적 토대가 이로써 완전히 허물어져 기득권세력이 입법기관을 통해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다든가 개혁 입법을 거부하는 사태가 예방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선거혁명은 혁명세력이나 개혁세력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집권 그 자체로는 혁명은커녕 개혁조차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정권을 장악해도 그것은 상층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수면하의 거대한 관료조직은 여전히 구체제에 익숙하다.
또한 결정적인 국면마다 정권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입법권과 사법권이 여전히 보수적 세력에 장악되어 있고 나아가 사회 각 분야에 퍼져 있는 기득권층의 물적, 인적 지배 토대는 견실하다. 이런 조건에서 개혁은 지지부진 더디기만 하고 개혁 추진세력은 결국 기존 세력과 타협하거나 심하게는 의존하는 길을 걷게 된다.
80년대를 거치며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군부 통치가 종식되고 민선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아르헨티나 메넴(89년), 브라질의 코요르(89년), 페루의 후지모리(90년), 멕시코의 살리나스(88년), 베네수엘라의 페레즈(89년) 그리고 칠레 아일윈(89년) 민선 정부는 이전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비해 개혁성을 지닐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실상 이들 정부는 구 기득권층의 지배를 대체할 개혁을 추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미에 미국식 스탠다드를 추종한 신자유주의를 심어놓는 장본인들이 된다.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기능의 약화를 동반하며 이는 정치적으로 남미에서 군부의 퇴진 및 민간 정부의 출현과 조응하여 수행된 것이다. 민간 개혁정부의 이름 아래 민중을 고통에 몰아넣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남미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들 민간 개혁정부는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단단히 해준 것이다. 한나라당은 뒷전에 있는데 오히려 고집스레 한미FTA를 추진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는 이 점에서 한 치의 예외도 아니다.
선거혁명의 키워드는 국민
베네수엘라 혁명에서는 20세기 혁명 일반이 보여준 모습을 뛰어넘는 매우 소중한 특징들이 발견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차베스에 의해 선거혁명의 진정한 의미가 새로이 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차베스의 선거혁명에서 대통령 당선은 출발점에 불과했다. 당선 후 기존 국회 해산, 제헌의회 소집, 신헌법 제정, 신헌법에 의한 새 국회의원 선거와 주지사 선거, 대통령 선거 등 불과 1년여 사이에 숨 가쁘고도 철저하게 진행된 전체 과정이 합해져 진정한 선거혁명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차베스는 국민투표를 세 차례나 실시해 매번 국민의 뜻을 묻고 투표 결과에 실린 국민의 힘을 동력으로 일관되게 혁명을 추진했다. 제도와 헌법이 정비된 상태에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일터와 거주 지역에서부터 자치와 참여로 자신들의 삶을 전환해 나가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차베스로부터 시작된 혁명이 연속적으로 국민들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과정이다.
20세기 후반부 세계는 정보기술혁명을 겪는다. 세계가 더욱 좁아지고 하나로 묶여갔다. 현재 전세계 인터넷 인구는 11억으로 추산되며 이들에게 정보의 제한과 권위적 통치라는 과거의 기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좁아진 세계를 자본과 상품 이동이 자유로운 단일 시장으로 만들어 나갔으나 그 과정에서 형식적 민주화라는 피치 못할 부메랑을 만들었다.
각 국민국가에서 진행된 민주화는 정치적 차원 일부에 국한된 형식적 민주화였지만 한 번 민주화 길에 들어선 민중들은 그 추세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국민 대다수의 자각과 자존, 자주적 성향이 높아지고 민주적 절차와 형식이 제도로 굳어진 21세기에 선거 혁명은 이제 단순한 전술의 차원 이상의 것임을 베네수엘라는 시사해준다.
베네수엘라 선거 혁명의 모델은 남미 각국으로 퍼져 나가는 중이다. 최근에는 2005년 당선된 볼리비아의 에반 모랄레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 사례를 거의 그대로 도입하여 2006년 8월 제헌의회를 개원하여 신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지난 11월 26일 당선된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도 제헌의회 소집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다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가위처럼 벌어진 차베스와 노무현의 지지율 차이, 그것은 개혁을 추진하는 정권과 국민의 함수관계에서 나온다. 여기에서 상수는 국민들의 개혁의지다.
베네수엘라에서도 한국에서도 국민들은 제대로 된 개혁을 원했다. 우리 국민이 노무현을 선출한 것은 개인 노무현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지난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 가운데 가장 개혁적이라 판단되는 후보에 대한 지지였다. 국회의 탄핵 가결시에도 이를 원천무효화한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변수는 정권과 대통령이다. 노무현 정권은 국민이 내민 손을 외면했다. 경제는 관료조직과 삼성 등 글로벌화한 재벌기업들에 의존했다. 정치는 ‘권력을 통째로 넘길 수 있다’는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으로 대표되듯이 보수 세력과의 타협에 급급했다. 미국과 보수층을 의식하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돕는 파병을 ‘국익’을 이유로 단독 결정했다. 한미FTA처럼 국가의 장래가 달린 문제는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의견에 코웃음을 쳤다.
반면 차베스는 매번 국민을 신뢰했고 국민에게서 힘을 구했다. 누구처럼 ‘힘들어서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짜증스런 투정을 부리는 대신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힘든 삶에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맞잡은 손이 진정한 선거혁명의 근원 동력이라는 점을 베네수엘라 대선 결과는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