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 아내의 독백

  • #84593
    강태공아내 66.***.145.198 4189

    11년전 이맘때 우리가 만났었나. 대학가 어느 숯불갈비 집에서.
    정확히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몇달 후엔가, 당신이 건네준 그 야생장미…너무도 활짝 핀 나머지 못난이가 되어버린 야생장미가 내 가슴에 확 박혀버렸다는 것.
    꽃은 너무 못났는데, 그 속에서, 자전거 열심히 타고 달려가 가위로 야생장미를 뚝뚝 잘라선 신문지에 둘둘말아 들고 왔다는 당신 모습, 그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그때문에 못난이 야생장미가 여느 꽃집의 고상하고 앙증맞은 장미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고귀해보였다는 것…
    그렇게 당신이 내게 다가왔었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맑은 냇물에서 맨발로 뛰어노는 소년 같았던 당신.

    사람은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고,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고
    여러번의 실패뒤에 만난 당신을, 나는 도저히 잡고 싶지만은 않아서
    먼곳으로 떠나야만 하는 당신에게, 좋은 사람 만나라고, 행복하라고, 좋은 추억이 되어줘 고맙다는 내게
    말없이 고개만 젓던 당신.
    정말 정말 서로 사랑하면 기적이라는 게 생길까?
    우리 사랑이 기적이었던 걸까.
    떨어진지 4년여의 시간, 장거리 연애끝에
    우리는 결혼했다.
    당신같은 사람이라면 고생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어떤 것도 행복할것이란 생각에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고 한국을 떠났지.
    1년간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려 애쓰는 동안,
    당신이 내게 물어왔다. 알래스카 가서 사는건 어때.  
    두차례 여름을 보낸 경험이 있는 당신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지.
    그래, 가지 뭐. 우린 젊으니까.
    안정적인 직장 관두고 모든 짐들 처분하고,
    텐트와 옷가지들 차에 가득 싣고는 그 위엔 당신 애인 카약 얹고 꽁무니엔 자전거 두대 달고서,
    캘리포니아 도로 101번 타고 위로위로 올라가며, 한달간 낚시하며 캠핑하며
    그렇게 도착한 알래스카 땅에선…
    봄은 커녕 아직 겨울도 가시지 않아, 온통 눈밭 얼음밭…
    통나무집 하나 빌려 살면서, 4월에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창밖으론 소도 아닌 말도 아닌 이상한 것들이 뛰어다니는걸 보면서, 과연 잘 한걸까? 당신의 지나친 모험심은 아니었나 하는 원망도 살짝 했었고, 그래도 어쨌건 살아야지 싶어, 나도 일을 구하기 시작했고…관광지니까 웨이터리스 하우스키퍼 뭐든 잡히는대로 해내리라 열심히 어플리케이션을 모았었지.
    그러다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도전해본 파트타임 소셔 워커… 내가 정말 운은 억수로 좋았나봐. 쓰잘데기없이 심리학을 나왔다고 혀를 찼었드랬는데, 인구 3천명인 작은 관광 마을에서 시즌 잡이 아니라 1년내내 하는 일을 구했으니. 내 이름 걸고 당신까지 건강보험 커버된다는 말에 어깨가 우쭐하기도 했었다.  나도 맹탕은 아니다 그지, 히죽거리며.
    그저 인턴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임금님귀는 당나귀 귀 외칠수 있는 대나무 숲으로 자라나고… 인종도 말도 달라서였을까, 오히려 사람들은 내가 편했나부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클라이언트들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그때의 클라이언트들이, 그들의 이야기가, 나를 성장시켜준 것만 같다. 지금 이렇게 당신 뒷바라지 하며 아이 둘 키우며 살수 있도록.

    본격적인 여름 시즌이 시작되고 당신은 배를 타기 시작하면서,  
    새벽일찍 나가 9시가 넘어서야 생선비린내 풍기며 들어와선, 샤워도 하기 전에
    지친 육체 이끌고 정신은 반쯤 나가 스토브 앞에 서서는 닥치는대로 뭐든 한두 숟갈 떠먹는 당신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장시간의 막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와 허기는,
    아무리 정성스레 싼 도시락으로도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겐가.

    당신은 그렇게 주6일 미친듯이 일하고,
    나역시 매일같이 당신이 사준 슈퍼울트라 자전거 씽씽 달려
    파트타임에서 풀타임으로, 그리고 오버타임으로…
    우리 둘 참 열심히 살았다. 그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으니 그래서 우린 늘 상을 받나보다.
    우리 힘으로 자그마한 집도 사고 첫 아이도 생기고,
    어느정도의 안정과 여유를 찾았으니.
    둘째가 생기면서 그나마 하던 파트타임도 그만두고, 완전 전업주부로 들어선 나…
    젊음 믿고 들어간 알래스카 땅에서, 그곳에서 정착하기엔 깜깜한 겨울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져
    알래스카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갑자기 닥친 경기침체로 그나마 진행되던 페더럴 직장 마저도 중간에서 멈춰버리고
    처음에 그렇게  알래스카로 갔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살림을 처리하고
    식구 둘 더 늘어 본토로 들어온게 작년 이맘때구나.
    지금의 당신을 바라보며 한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경기침체로 구직 활동이 길어지면서
    혹여나 지쳐서, 자신을 포기하고 그저 희생할 양으로, 아무 직장이나 골라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처자식때문에 떠밀려 들어가듯 그렇게 가는건 아닌가 하고.  
    함께 살며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진 우리는
    알래스카에서 함께 고생하며 힘든일 기쁜일 행복한일 겪으면서
    여전히 서로 아끼고 믿고 사랑하니, 그걸로 된거 아닌가?
    좋은 집, 예쁜 옷, 그게 당장 없더라도 우린 매끼니 배부르게 먹고, 밝게 자라나는 두 아이 재롱보며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으니,
    우린 행복한거 아닌가?

    임시 직장을 잡고서 살고 있는 지금,
    몇몇 직장의 최후 통보를 기다리는 지금 이 시점,
    그 어떤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당신이 너무 자랑스럽고 고맙다.
    시냇물에 뛰어노는 소년 같던 당신이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맘속으론 온갖 고민과 책임감으로 복잡할터인데,
    눈가의 자글자글 주름지으며 웃음을 잃지 않는,
    여전히 한결 같은 당신, 혹 내가 걱정할까 모든걸 혼자 품으려 하는 당신,
    한번도 불평불만 한적 없고, 늘 내가 최고의 아내 최고의 엄마라 말해주는 당신,
    그런 당신이기에 내가 행복한데…
    나는 정말이지 행복한데 그걸 알까.

    내가 당신에게서 정말 원하는 건 말이지,
    어떤 직장이건 간에, 당신이 진정 원하고
    당신이란 사람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에서 인정받고 당신이 노력한만큼 성취감도 느끼고,
    꼭 처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이 만족하고 그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혹 많은 돈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 여러번 이야기했듯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까,
    우리 둘다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지금처럼만 아기자기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이 좀만 더 크면 나 역시도 일을 시작할 수 있을테고,
    지금까지 잘해온것처럼 앞으로도 잘할테니까.
    당신이 언젠가 최고의 선택이 나라고 말한것처럼,
    내 인생 역시도 최고의 선택은 당신이야.
    힘내자 우리.
    강태공 화이팅.
    ,,,
    지금도 열심히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애쓰는 세상 모든 가장들과
    그들의 아내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 그대는아직젊음 192.***.253.129

      서로를 의지하면 지나온 시간들이 아름답네요. 앞으로도 지금같은 마음으로 사시길…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면 마음속 행복은 멀리 있지 않으니…

    • 5312 71.***.235.191

      돈만 아는 여자들만 많은줄 알았는데…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성분도 있군요.

      아름다우시네요. 남편분도요. 애들도 정말 이쁠거 같네요.

      항상 행복하세요.

    • z 24.***.201.177

      판춘문예 출품작인가?

    • 밥팬 99.***.165.142

      그대들에게 노래 한곡 드릴께요…..마음이 따뜻해 졌어요…감사해요

      http://www.youtube.com/watch?v=Q31AzCz8tjg

      우리는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

      기나긴 한 세월을 기다리어 우리는 만났다

      천둥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

      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만났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우리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은 우리는

      마주잡은 손끝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기나긴 겨울밤에도 춥지 않은 우리는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도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연인

      수없이 많은 날들을 우리는 함께 지냈다

      생명처럼 소중한 빛을 함께 지녔다

      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이렇게

    • 76.***.13.78

      진심 감동입니다.
      이런글이 커플의 이야기지요.
      어려워도 꿋꿋이 헤쳐나가는 모습 정말 본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부인이 계시니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건조하고 메마른 가슴에 따듯한 불을 지펴주는 따듯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

    • 12352 71.***.235.191

      “이런글이 커플의 이야기지요.”

      바램은 이해가 가지만, 실제로는….대부분 아니거덩요? ㅎㅎ
      모든 커플이 이글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 ISP 38.***.181.5

        많은 커플들이 이러구 살아요.

        그러니 희망을 갖으시길.

        • DSN 216.***.67.102

          맞는 말씀!

    • 행복 74.***.34.1

      남편 걱정 마세요 당신 남편은 세상에 살아가는 몇안되는 행복한, 복받은 사람입니다.
      행복하세요..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휴~~~~~~~~~~~~

    • 감사 208.***.53.66

      며칠사이로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추위로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 주시네요.
      따뜻한 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리고 더 많이 행복하세요.

    • Mohegan 20.***.64.141

      강태공이라고 해서 나처럼 낚시에 미쳤던 사람 얘기인줄 뜨끔했었는데, 완전 다른 얘기네요. 얼마전 고등학교 동창 하나를 40년만에 만났습니다.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며 사는데 그친구의 부인은 그게 좋다네요. 그런데 내 처는 그렇게 사는게 별로라고 합디다. 그러니 님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 따뜻해 69.***.112.138

      집니다 마음이..

      감사합니다. 오늘 생일인데 옆에있는 아내에게 다시한번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왠지 말하면서 울컥도 할듯한..ㅎ

      항상 행복하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 감사 65.***.210.59

      사업이 완전히 망해도 가족만 있으면 망한게 아니라고 하던데 진리인 것 같습니다.

    • 강태공아내 66.***.158.251

      많은 분들의 격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댓글을 보면서 좀 부끄럽네요. 감히 이런 말들을 들을 자격이나 있나 하구요.
      남편과 저와 우리 가족에게 화이팅, 하는 마음으로 쓴 일기인데요 초심을 잃지 말자는 제 다짐이기도 했구요. 세상에 저희같이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부부가 주위에 많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게시판에 올려보았습니다.

      일본으로 미국 알래스카로 버지니아로 그리고 텍사스로 장거리 이사를 좀 했어요.그러다 보니 결혼7년째, 딱히 살림이라고 할게 없네요. 그중 가장 오래 산 곳이 4년정도 살았던 알래스카였구요, 차 한대 그리고 60파운드정도의 박스 열셋, 자전거 둘, 알루미늄 조그만 배 하나, 이렇게 해서 작년에 텍사스로 왔어요.
      임시직이라 넷으로 한달 2500정도 받는데, 이걸로도 네식구 생활은 되더라구요. 렌트/유틸비 1000불 빠지고도 500불은 저금합니다. 빚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고, 빚이 없기 위해 분수에 맞게만 살아왔구요. 좀 초라하면 어때요.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래도 우리의 미래는 늘 플러스라고…….여긴 알래스카에 비해 물가도 너무 싸구요. 값싸고 싱싱한 야채 과일에 얼마나 탄복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런 것도 정말이지, 알래스카에서 살아봤기에 소중함을 깨닫게 되나봐요.

      열심히 살아서 늘 우리는 상을 받아왔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다 건강하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아들 딸이 있고요, 경제적으로도 저흰 넉넉하다고 생각하고(먹고 자고 입고 부족함도 없고, 노후 연금도 꼬박 넣구요) 정신적으로도 저흰 풍요롭다 생각합니다. 돈으로는 감히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가진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원하는 1순위 직장에서 오퍼가 왔거든요. 대도시로 가야할 것 같은데 시골에서만 늘 살아와서 약간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남편이 원하는 직장에 인정받고 들어가는 것 같아 참 기쁩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어떨지, 지금보다 더 바쁘고 복잡한 삶이 될지… 그래도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죠.
      남편이 낚시를 좋아합니다. 그게 그에겐 평화를 주는듯 해요. 저도 그런 여유를 배우고자 하는데 쉽진 않네요.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모두 행복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done that 208.***.32.235

      축하 드립니다.
      식구 모도가 용감하게 사셔서 부럽습니다. 그용기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있었는 데 요새는 그런 도전이 없어서인 지 용기가 슬슬 도망치고 있네요.

      살림살이 얘기를 해서 어머니가 하시던 말이 생각납니다.
      결혼해서 살림장만하는 것이 결혼의 한 생활이고 낙인데, 넌 바리바리 해놓고 앞으로 무슨 낙으로 사니? 전 나이 들어서 결혼해서 다 해놓으면 어머니께서 안심할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말이 정답입니다. 두분이 같이 사시면서 하나씩 사들이는 재미가 더 좋은 것같아요.

    • 영원한엔지니어 146.***.68.43

      텍사스에 오셨다가 대도시로 오신다고 하니 혹 휴스턴으로 오신다면 한번 만나보고픈 생각이 듭니다. 글의 내용도 그렇고 살아가시는 자세를 들으니 기회가 된다면 두분을 만나 식사를 한번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