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포(歌浦)에서 보낸 며칠

  • #84007
    eroica 69.***.144.179 4928

    가포(歌浦)에서 보낸 며칠

    최갑수

    한동안
    가포에 있는 낡은 집에 가 있었다
    늙은 내외만이 한 쌍의 말간 사기 그릇처럼
    바람에 씻기며 살아가고 있는
    바닷가 외딴집
    바다 소리와 함께 그럭저럭
    할 일 없이
    보고 싶은 이 없이 참을 만했던 며칠
    저녁이면 바람이
    창문에 걸린 유리구슬 주렴 사이로
    빨강 노랑 초록의 노을 몇 줌을
    슬며시 뿌려주고 가기도 했다
    손톱만한 내 작은 방에는 구름처럼 가벼운
    추억 몇 편이 일렁이며 떠 있기도 했다
    그 집에 머물던 며칠 동안
    내 가슴속 아슴하게 오색 물무늬가 지던
    그러한 며칠 동안
    나는 사랑이라든가
    사랑이 주는 괴로움이라든가 하는
    마음의 허둥댐에 대하여 평온했고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그런 허둥댐의 덧없음에 대하여
    다 돌아간 저녁의 해변처럼 심심해지면,
    평상에 모로 누워 아슴아슴 귀를 팠다
    오랫동안 곰곰이 내 지나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을 생각했다
    가끔, 아주 가끔
    아픈 듯이 별들이 반짝였고 그때마다
    감나무 잎사귀들은 바다와 함께 적막했다

    ==

    Walking Away From Rainbows – Steve Hackett

    • 0xd055 64.***.211.64

      #define EPOEM 0xd055 /* Unable to read poems */

      건너뛰며 빨리 핵심 파악 또는 내가 원하는 부분 찾기. 그리고서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다시 찾아 읽기.

      이런 읽기 방법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으니 시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거라지 세일에서 산 오래된 두꺼운 단편선집을 가끔 읽는데, 구식 영어에 표현이다보니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점점 이야기에 말려들어가다보면, 마치 뛰어가던 사람이 천천히 산책하며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듯 차분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EPOEM이 창궐한 삶에 가끔 브레이크를 걸어줄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가포에서 며칠 보내는 것은 못하니, 대신 책을 읽거나 가드닝을 하는가 봅니다.

    • eroica 69.***.144.179

      #define HTTP_Error_404 0xdead // File not found
      #define HTTP_OK_200 0xfeed // Action was successful

      EPOEM으로 인한 감성의 404 error들이 복구되어 많은 사람들이 200 OK code를 갖게 되었으면 합니다.

    • ajpp 141.***.137.10

      가포.. 어렸을 적 부모님과의 추억이 참 많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오래 전에는 이은상씨가 “내 고향 남쪽바다”라며 아름다움을 노래한 마산만,
      가포는 그 마산만에 있는 작은 유원지입니다.

      제가 그 곳을 알았을 때는 이미 오염에 찌든 바다만이 남아있고,
      늘 비어있다시피한 탁구장 사격장.. 보트 얼마..
      화려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겠지만,
      제게는 어린날의 부모님의 포근함, 따뜻함을 간직한 곳이랍니다..^^

      시와 음악이 그 때 일을 새록새록..^^

    • . 70.***.3.176

      적막함…멍하니 촛점없이 바다를 그냥 바라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바다를…남해의 여름의 쪽빛 바다를…언제 다 벗어버리고 떠날수 있을까.

      시와 음악이 참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 Dreamin 63.***.211.5

      가포가 마산옆에 있는 곳인가?

      예비고사 치고 하숙집 친구들과 밤늦게 차를 타고 종점인 가포에 갔다.
      가게에서 친구들이 소주을 사고 바닷가를 걸어서 한참을 가다가 바위가 많은 바닷가에서 놀기로 했다.

      술을 한잔씩하고 소나무를 꺽어서 불을 붙이는데 불이 안 붙었다.
      한 30분 정도 불을 붙이다가 졸려서 그냥 연기만 나는 모닥불옆에서 잠을 잤다. 한참 자다가 보니까 불이 붙어서 따뜻했는데 아침에 보니 안경이 휘어져 있었다.
      나중에 고향에 가니 어머님이 아시고 걱정을 했지만 젊은날…..

      그러하고 4년뒤에 연모하던 분과 가포를 다시 갔는데 달빛아래 그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던것같다.

      가슴이 아리는 추억의 장소, 가포!
      지금은 바다 건너 만큼이나 먼 곳이 되었다.

    • NetBeans 74.***.199.194

      참 잘 읽었어요. 한국이 그리워지고, 추억에 잠겨도 봅니다.

    • . 70.***.3.176

      Steve Hackett, 예전에 필콜린스와 제네시스에서 같이 연주했었군요. 위의 곡은 제네시스를 떠나 독립하면서 그 내면의 고민을 표현한 곡이라고 설명이 되어있군요. 이사람이 연주한 시네마천국도 유튜브에 올라있네요.
      http://www.youtube.com/watch?v=nshzNzm8K8E

      최갑수, 1973년 경남 김해 출생. 인터넷에서 석양리, 신포동, … 몇편의 시들을 더 읽어보았는데, 시들이 참 서정적이고 좋습니다. 시들에서 어떤 아련한 일관성이 느껴지는데, 어렸을때의 하늘거리는 미류나무를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딱 한번 가본 남해바다의 기억을 많이 떠오르게 합니다. 나이가 많은 시인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시에서 깊이도 느껴지고 시각적인 묘사들이 상당히 뛰어난것 같습니다.

      이 두사람을 소개시켜주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eroica 69.***.144.179

      많은분들이 가포에 대한 사연들이 있군요. 모두들 감사합니다.

      .님, 정보공유해 주셔서 고맙고요, Genesis….. 쟁쟁한 musician들을 배출하고, 가지고 있는 group이죠. 나중에 기회닿는데로 최갑수의 다른 시와 아울러서 Genesis의 음악도 더 올려보지요.

      모두들 좋은 주말되십시요…

    • 까탈김 24.***.41.204

      음악이랑 시랑 진짜 죽이네요.
      순간 멍해 졌다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