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경

  • #83969
    eroica 69.***.144.179 4329

    오늘 큰딸아이가 드디어 꽃물을 만들었네요. wife가 회사로 전화를걸어서 알려줬는데 퇴근길에 딸아이에게 선물로 줄려고 빨간꽃을 사들고 가는길에 아이가 자궁에서 막나온 모습에서 부터 여태껏 성장해온 지난 세월이 하나하나 단막극처럼 지나가더군요. 그러면서 표현하기어려운 무슨 느낌이 드는게 분만실에서 딸아이의 검은머리카락이 살짝보이기 시작할때 느꼈던 느낌과 비슷하더군요… 잘커준 딸아이에게 그리고 앞으로 여자로 살아갈 딸아이에게 감사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하는맘에 몇글자 끄적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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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경

    손세실리아

    포도 두 근 샀더니
    맛이나 보라며 덤으로 준 천도복숭아를
    단숨에 먹어치운 딸아이가
    화살나무 종아리처럼 붉은 깡치를 들고
    버릴 데를 찾아 두리번거리기에
    아파트 화단에 던지라 했더니
    길가에 침 뱉는 무식한 사람쯤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씨앗은 생명이라고
    집안에 들이면 귀신 내ㅉㅗㅈ는다는
    키 작은 개복숭아나무도 거기 살고
    모시나비의 집도 바람자락도
    거기서 함께 키를 키운다고
    저 혼자 헉헉 숨 몰아쉬다가
    어떤 놈은 말라 죽고
    어떤 놈은 썩어 나자빠지고
    또 어떤 놈은 흙에 뒤섞여
    꼼지락꼼지락 發芽하는 거라고
    최후까지 기를 쓴 놈들이 살아남아
    참외도 되고 호박도 되고
    사과나무 한그루 그늘이 되는 거라고
    엄마의 몸이라고

    그제서야 안심하고
    낙엽 수북한 화단 기름진 흙에
    천도복숭아 씨를 내려놓고 돌아오던 날 밤
    열세살 딸아이 홑청에 꽃물이 배었다

    ==

    어린 물고기 – 나윤선

    • md 165.***.161.152

      이런 자상한 아빠가 다 있으시네요… 복많은 따님이세요 :)

    • Cat 98.***.180.115

      그냥 아빠는 모른척 하심이…

    • Y 75.***.56.226

      왜요? 아빠가 알아주는 것이 더 좋은 듯 싶은데… 왜 모른 척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 CP 24.***.209.146

      세대차이인것 같습니다.. 저희도 딸이 초경을 하면 이제 소녀에서 여성으로서 축하해주고 선물해주고 할것이라 저희 딸한데 말해주곤 합니다..이런 말들이 성교육에서 좋을것 같고..그러나 그런 말을 저희 손위 사람한테 하면 축하보다는 쉬쉬 하는 분위기더라구요.. 저희가 40대초반 부모인데..50 대 부모들은 축하보다는 쉬쉬 하는 분위기이더라구요.. 세대차이 인것 같습니다..

    • h1b 24.***.80.11

      가끔(?) 커플방 기웃거리는 나이찬 싱글입장에서..
      아버지께서 이런 생각을 하셨겠구나.. 알게해주는 글들을 아주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제 친구들은 자식 키우면서 하나씩 깨달아 가겠지만 전 아직.. ㅠㅠ

    • 00 24.***.171.162

      너무 아름다운 아버지시네요. 음악이, 너무 멋진 아빠의 마음이, 제 눈가를 적시네요. 저도 딸인데, 부모님 생각나요. 이렇게 애틋하게 저를 키우셨을텐데… 미래의 남편이 님처럼 멋진 아빠였음 좋겠네요.

    • Cat 98.***.180.115

      저는 30대 아빠인데요, 짐짓 모른척 하는것도 자녀에 대한 존중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 비자 98.***.53.133

      저는 cp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 eroica 69.***.144.179

      전 아직 많이 부족한 아빠입니다. 과찬의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어쩔줄 모르겠네요.

    • eb3 nsc 76.***.33.228

      멋진 아빠이시네요..저희 남편도 첫아이 초경때 참 사랑스럽게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때만 해도 창피하던일이..이젠 가족 모두 축하해주며 기뻐하는 일이 되었네요… 딸아이도 그렇게 받아 들이구요… 감동적인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