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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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oica 69.***.144.179 4012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중에서

    ….

    조성훈은 또다시 일자리를 얻었다 이번에는 우유배달이었고
    역시나 벼룩시장을 통해서였다 하루 3시간만 일하고 굶어죽지 않고
    나머지 21시간은 내 것이다 – 가 신문 배달 때와 하나 다름없는
    놈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나는 퇴직금을 까먹으며 그냥 놀기로 했다 4년 내내
    미친노ㅁ처럼 일을 했고 그 퇴직금으로 밥을 먹지만 하루 24시간이
    내 것이다 – 가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의 자랑이었다

    빙하기가 왔다는 그 말도 실은 모두가 거짓이었다
    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회사를 그만두면 죽을 줄 알았던
    과거의 나 뿐이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 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야구
    아 아 삼미

    그저 달리기만 하기엔 우리의 삶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의 숙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비로소 그 숙제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남아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 지를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지구상의 어떤 양서류보다도 돈 욕심이 없어진 나는 – 늘
    조금이라도 더 나의 시간 나의 삶을 확보할 수 있는 직장을 찾고
    또 찾았다 결국 나는 작은 종합병원의 후생관리 직원이 되었다
    균등하고 변함없는 하루 6시간의 업무 그리고 그 6시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나의 시간이다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가진 게 간단하면 인생은 간단해진다

    1할 2푼 5리의 승율로 나는 살아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라고도 나는 말할 수 있다
    함정에 빠져 비교만 않는다면 꽤나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뭐 어때 늘 언제나 맴맴맴

    관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 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

    ==

    Poor Man’s Moody Blues – Barclay James Harvest

    • Block 24.***.123.33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

      직장이라는게 삶을 살아기기 위한 수단이지만 가끔은 주객이 전도되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경우도 있고 삶자체를 송두리체 갖다 바치는 경우도 있다 생각되네요.

    • Lighthill 68.***.5.185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 자신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 시간이 일을 하는 시간보다 더 의미있어야만 하는건가…또는 일을 하는 시간이 내가 돈을 대가로 팔았던 시간이 아니라 내 시간을 올바로 사용한 보람찬 생활로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가…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네요.

    • nysky 67.***.20.50

      이 책 읽어봤었어요.
      잼나게 읽었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