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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슬픔은 언 강물 같은 것, 따스한 봄햇살 한 줌에도 장강이 풀리어 큰 바다로 흘러가듯 누구나 그렇게 잊혀진단다.”
It touche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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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잉크
정일근
아직도 선생님은 녹색잉크로 글을 쓰실까. 처음 시인을 꿈꾸었던 열두 살 시골 국민학교 5학년 문예반 시절, 친구들이 다 돌아간 빈 교실 노을이 유리창을 붉게 적셔 어두워질 때까지 16절지 갱지 위에 연필로 썼다 지웠다 서투르게 시를 썼다. 가끔 눈을 돌리면 운동장 가에 서 있는 키큰 미루나무 그림자가 한뼘 한뼘 길어졌다 달아났다. 수업시간 도망가버린 풍금소리가 무시로 빈 복도를 따라 살금살금 다가왔다 재빠르게 사라지곤 했다. 한 웅큼의 바람에도 미루나무 잎들이 온몸으로 노래하고 그런 모습에도 나는 까닭없이 눈물을 흘려 연습장이 젖었다.
선생님은 녹색 잉크로 글을 쓰셨다. 하얀 원고지 위 푸른 새 잎들마냥 팔랑팔랑 씌어졌다. 엷게 번져가는 선생님의 녹색 글씨가 나는 좋았다. 마치 흰 꽃이 지고 막 눈을 뜨는 진해의 7만 벚꽃 나무들 연초록 건강한 잎맥에서 엽록소란 엽록소는 남김없이 뽑아낸 듯 선생님의 녹색 글씨에 나는 온몸이 푸르게 물들어버렸다. 꽃 지는 그해 4월 아버지를 잃은 내 슬픔의 모세혈관 하나하나 광합성을 일으켜 폭죽으로 터져나가고 언제나 슬픈 유년의 꿈속에까지 따뜻한 녹색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아직도 선생님의 목책상 위에는 녹색 잉크가 놓여 있을까. 소리들이 증발해버린 빈 교실에 앉아 나는 조숙했던 슬픔의 시를 지웠다 다시 쓰고 선생님은 녹색 글씨로 내 어린 시를 다듬어 주셨다. 얘야 슬픔은 언 강물 같은 것, 따스한 봄햇살 한 줌에도 장강이 풀리어 큰 바다로 흘러가듯 누구나 그렇게 잊혀진단다. 선생님은 녹색 글씨로 상처받은 열두 살 내 영혼을 어루만져주셨다. 세월도 슬픔도 강물처럼 흘러가고 그때 무엇이 나를 눈물많게 했던가. 이제는 그날의 슬픔의 이유는 말갛게 지워져버렸지만 선생님의 녹색잉크는 내 오랜 그리움 보다 더욱 짙어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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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in the Life(Beatles Baroque II) – Les Borea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