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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작동 안 되는 곳에서 국민 굶어 죽어간다
오늘 우리가 내린 결정, 北 동포 오래오래 기억할 것어제 새벽 신문 1면 머리에 실린 사진 한 장이 내 등을 아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떠밀었다. 압록강변에서 북한 인부들이 중국산 밀가루가 담긴 포대를 트럭에 싣는 사진이다. 인부라면 분명 장성한 어른일 텐데, 얼굴이 밀가루 범벅이 된 그들은 밀가루 한 포대를 가누지 못하고 끙끙대는 듯했다. 90년대의 대기근(大饑饉)에 꺾여 자라다 만 것일까. 아무튼 그 사진은 50여년 전 시골 동네 성당(聖堂) 마당에 줄을 서 있던 소학교 3학년 무렵으로 나를 끌고 갔다. 성당 마당에 바글대던 내 또래 아이들과 노인네들이 너나없이 앞쪽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제대로 줄을 만드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러고 얼마를 기다렸을까. 사람들은 자루 하나엔 밀가루를, 다른 자루엔 탈지(脫脂)분유를 한두 양푼씩 받아 돌아갔다. 내 몸과 혀는 그날 저녁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수제비의 힘과 찐 분유의 쫀득쫀득한 맛을 여태 잊지 못하고 있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은 1998년 아시아 사람으론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다. 아홉 살 때인 1943년에 300만명이 굶어 죽은 벵골 대기근을 겪었던 그는 제3세계에선 왜 수십만명·수백만명이 굶어 죽는 일이 되풀이되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 생애를 바쳤다.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 센도 거짓말로 도배질한 북한 통계 앞에선 두 손을 들고 말았지만, 그의 논문과 저서 곳곳에 김정일의 북한이 민얼굴을 내민다. 아프리카의 보츠와나는 1979~1981년 사이 식량 생산이 전년(前年) 대비 17%, 짐바브웨는 38% 감소했다. 같은 기간 수단과 에티오피아는 11~12% 식량 생산이 줄었다. 이상한 건 보츠와나와 짐바브웨에선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보다 사정이 나았던 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만 수십만명이 아사(餓死)했다는 사실이다. 센은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은 식량 생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국민이 굶어 죽는 사태에 부딪혀 정부 정책과 예산 배정의 우선순위를 기아(饑餓) 대책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느냐의 여부라고 했다. 보츠와나와 짐바브웨에는 기아 대책을 다그치는 야당이 있었던 데 반해 수단과 에티오피아에는 아예 야당 자체가 없었다. 센은 “이 원리(原理)는 지금 북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했다.
유럽인들은 대기근 하면 1845~1849년 사이 당시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를 덮친 감자 흉년을 떠올린다. 이 흉년으로 아일랜드 인구 800만명 중 100만명이 굶어 죽었고, 100만명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미국과 남미행(行) 이민선에 올랐다. 그런데도 그 시절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밀을 가득 싣고 영국으로 향하는 무역선이 끊이질 않았다. 식량은 필요한 곳이 아니라 가격이 높은 곳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150년이 흐른 지금도 아일랜드 사람들 가슴에는 조상(祖上)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영국을 향한 앙금이 남아있다고 한다. 센은 ‘한 국민이 흉년을 만나 굶어죽느냐 살아남느냐는 당시의 통치자가 국민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감정적 일체감(一體感)을 갖고 있느냐에 달렸다. 북한 사태도 같은 눈으로 봐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김정일은 작년 5월의 2차 핵실험과 6월의 중·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에 7억달러 안팎의 비용을 쏟아부었다. 그는 함흥·흥남·원산 등 주요 도시 거리에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던 90년대의 대기근 때도 최소 15억달러 이상이 들어간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세계는 이제 김정일의 핵 포기 가능성에 대해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북한에는 김정일에게 기아대책을 세우라고 대들 야당도 없고, 김정일에게 배 곯는 아이들과 노인네를 껴안는 국민과의 일체감을 기대할 수도 없다. 남아도는 남쪽의 쌀은 그런 김정일에 막혀 창고에 쌓여가고 있고 물난리를 겹쳐 당한 북한 동포의 고통은 깊어만 간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선택과 행동을 재촉받고 있다.
김정일을 한 번 더 옥죄어 그가 핵무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천안함 폭침을 사과하게 만든 다음 쌀을 실어 보낼까,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아니면 남쪽에서 김정은의 3대 세습 경사(慶事)를 축하하기 위해 쌀을 올려 보냈다는 생짜 거짓말과 보낸 쌀의 상당 부분이 굶주린 북한 동포의 부엌을 건너뛰어 조선인민군 부대 주방으로 흘러갈 위험이 빤히 내다보이는데도 지금 쌀을 보내야 할까. 북한 동포들은 우리가 오늘 어떤 결정을 내리든 아일랜드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생생하게 우리 결정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