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대 졸업한지 20년 정도 된 선배로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글이네요.
윗 분들이 많이 말씀해주셔서 어떤 조언을 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감정일지 알 것 같아서 제 얘기를 해드릴게요.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서울대의 많은 학생들이 겪는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일반고를 나오고 초중고 전교 1등 하면서 전교 회장에 동네에서 잘나가는 아이였는데 서울대를 들어가고 비슷한 걸 느꼈었죠. 그때는 지금처럼 과학고, 영재고 출신들이 많이 오는건 아니었지만 대학교 과목까지 선행을 한 애들이나 선행을 안해도 제가 따라가기 힘들만큼 출중한 애들이 많은건 마찬가지였죠. 대부분 오로지 시험만으로 전교 1등 아니면 손가락 안에 들 애들을 전국에서 모아놨는데 거기서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지어지니 하위권에 있는 학생들의 (저 포함) 박탈감은 말할 수 없죠.
특히 글쓴분 얘기처럼 서울대는 교수님이나 조교들에게 케어받을 시간이나 시스템도 지극히 부족하니 고등학교 때 주어진 내신/수능 공부만 충실히 하다가 아무런 대비없이 대학에 들어온 저는 너무도 따라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꾸역꾸역 했어요. 글쓴분은 미국대학에 간 친구들, 미국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본인에 대한 자책감, 후회 등으로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런걸 몰랐으니 그냥 저의 모자람에 대해서만 자책했죠.
그래서 수능 때 선택하지 않아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과학2 과목을 인터넷 강의로 다시 리뷰하고, 낮은 학점 재수강하고, 다른 과에 가서 필요한 과목 찾아듣고 그랬죠. 지금처럼 인터넷에 수 많은 좋은 강의들이 있었으면 너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MIT, 하버드, 스탠포드 엄청난 강의들이 다 공짜로 올라와있잖아요? 어쨌든 학부공부를 정말 꾸역꾸역 하면서 시험도 한과목에 한학기에 세번 네번씩 보니까 계속 시험 준비만 해도 벅찬데 다른 애들은 어떻게 동아리도 하고 그러는지. 저는 그래도 하고 싶은 분야가 있어서 대학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서울대의 장점이자 단점인게 학점은 바닥을 깔아도 자대생은 또 잘 받아줘요.
그렇게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이게 또 밖에서 볼 때랑 다른 겁니다. 학부 때는 내가 이렇게 학점이 안 좋아도 저 분야를 해보고 싶다해서 대학원에 들어가면 정말 좋겠다 하고 원하는 랩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은 야 지금이라도 의대가라 지금이라도 군대가라 이런 소리만 해대고 교수님은 지도하는거 아무것도 없고. 하… 저는 이 타이밍에 우울증이 왔었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개고생하면서 학부를 다녔나. 그래서 진짜 대학원 때려치고 군대가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어떤 일을 계기로 휴학을 먼저 하고 뭔가 깨달음을 얻어서 남이 어떻게 얘기하든 내 갈길 가자 생각하고 박사까지 마쳤습니다. 아 참, 대학원때 공동연구를 계기로 미국 대학 교수님에게 한과목 수업을 들은적이 있었는데 ㅅㅂ 내가 대학교 헛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서울대 교수들 강의 개판이구나 ㅋㅋㅋ 이게 진정한 대학 수업이 아닐까 큰 깨달음을 얻었죠. 그리고 대학원 다니면서 타대에서 온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들어보니 아무리 서울대에서 바닥을 깔았어도 웬만한 타대 과탑하고 온 애들은 상대가 안되는구나. 진작 알았으면 너무 자괴감 갖지 말걸 하는 생각도 했었네요 ㅋㅋ
어쨌든 그 후로 미국으로 포닥 나와서 현지 취업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네요.
글쓴분의 진로에 조언을 드리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해드리고 싶은 말은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잘나갔는데, 내가 쟤보다 잘했었는데 하는 본인의 과거나 남과의 비교를 일단 자제하라고 해주고 싶네요. 미칠 노릇이겠지만 앞으로의 선택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애요. 서울대에 들어간 대부분의 학생들이 실패를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가 무참히 깨집니다.
본인도 뭔가가 있으니까 서울대에 뽑혀서 왔을거에요. 거기서 따라가기 힘들다고 본인이 못났다고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어요. 영어는 웬만한 동기들 보다 더 잘하지 않나요? 전 영어 때문에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리고 재정문제가 됐든 비자문제가 됐든 서울대를 선택한 이유도 있고 그에 따른 장단점도 있지 않을까요?
윗 분들 말처럼 그래서 본인이 뭘 하고 싶은지가 글에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은게 꿈인가요? 그럼 저처럼 국내박사하고 나와서도 살 수 있습니다. 가성비 최고예요. 결혼도 하고 나왔고.
질 좋은 대학교육을 받는게 꿈인가요? 그럼 미국 가야죠. 그럼 포기해야되는 게 또 있겠죠. 학비 퍼붓고 비자 없어서 돌아가는거 많이 봤구요.
목적지가 분명하면 조금 돌아가는 것 같아도 더 힘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목적지는 중간에 바꿔도 돼요. 처음 결정하는 목적지가 꼭 맞는게 아니에요. 자기가 가던 길 앞에 목적지를 새로 설정해도 돼요.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