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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들과 국내언론에서는 군인이 민간인을 죽이고 패서, 무조건 군인만 잘못했다고 하는데, 군인도 국민이며 군인도 광주에서 많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리고 민간인과 군인들이 충돌하게 된 원인은 북한특수군의 광주 침입에 의해서입니다. 다음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5월 18일(일) 전남대에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는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파견돼 있었습니다. 전라도 출신이 그 40%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5월 18일(일요일)에는 아침부터 공수대원 20명이 전남대 정문 앞에 일렬로 서서 휴교령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9:30분경 대학생으로 보이는 250여명의 시위대가 나타나 공수대원들을 향해 도서관에 가겠다며 시비를 걸었고, “안 된다 귀가하라”하자 책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던져, 8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한 후, 공수대원들이 추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금남로 번화가로 도망을 갔습니다.
5월 17일 자정부터 전국에는 청년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예비검속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쥐죽은 듯 숨어 있었고, 광주의 운동권 학생들도 다 도망가 숨었습니다. 이 살벌하고 무서운 순간, 혹시라도 경찰이 오해하여 자기를 잡아갈까 꼭꼭 숨어 있었던 그 시각에 어떻게 광주학생들이 250여 명씩이나 집단을 만들어 가지고 그 무섭다는 계엄군을 감히 제 발로 찾아가 돌을 던지고, 계엄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금남로로 뛰어가 거기에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수백 명의 “장정”들과 합세하여 파출소들을 불태우고, 경찰을 인질로 잡고, 경찰의 시위진압용 차량인 페퍼포그 차량 등에 불을 질러 군중을 모을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한국군의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고 그에 대해 오랜 기간 훈련해온 배포 큰 특수집단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증언집들에 의하면 광주 대학생들은 “항쟁기간 내내” 꼭 꼭 숨어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라는 말은 소문으로 퍼진 단어일 뿐, 광주의 대학생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대한민국에 그렇게 용감무쌍한 대학생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이런 용감한 대학생들이 수백 명씩이나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감히 계엄군을 조롱하고, 예비검속을 집행하는 그 무시무시한 경찰병력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광주 5.18사태 사망자 154명 중 80% 이상이 계엄군 없는 데서 사망했고, 총상 사망자의 75% 이상이 계엄군이 가진 M16이 아니라 폭도의 총(칼빈소총)에 사망했습니다. 행군중인 정규사단(20사단)을 습격하여 지프차와 장갑차를 탈취한 행위, 교도소를 공격한 행위, 불과 4시간 만에 전남 곳곳에 숨겨져 있던 44개 무기고를 털어 계엄군에게 총질한 행위, TNT로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광주시를 제2의 히로시마 핵폭발 규모로 날리려 했던 행위 이러한 행위들 모두 일반 광주시민이 했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특히 저 폭발물 해체는 군인들도 하기 어렵고 위험해서, 국군에 단 한명밖에 없는 폭발물 전문가가 내려와서 해체했다고 합니다. 즉, 북한 특수게릴라군이 광주에 침투하여 저지른 행위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일부에서는 포위된 광주에 어떻게 북한특수부대가 침투하느냐? 그리고 우리나라 군은 무엇을 했는가? 라고 하는데, 광주와 전남지역이 정권에 불만이 많은 지역이라는 것을 파악한 간첩들이 이미 광주로 침투하고, 민간인으로 위장한 특수부대가 무기 없이 광주로 몰래 침투하여,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상황을 종합하여 질문과 답변을 정리하였다.
(1) 계엄령 하에서 군인과 민간인중 누가 먼저 공격했습니까?
답변: 민간인입니다. 민간인이 돌을 던져 먼저 공수부대를 공격하였습니다.
(2) 정상적인 민간인이 공수부대(특수부대)를 먼저 공격할 수 있습니까?
답변: 불가능합니다.
(3) 민간인이 행군중인 정규사단을 습격하여 지프차와 장갑차를 탈취하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교도서를 공격하고, 불과 4시간 만에 전남 곳곳에 숨겨져 있던 44개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하고, TNT로 2,100발(도시전체를 날릴만한 폭발력)의 폭탄을 조립할 수 있습니까?
답변: 불가능합니다.
(4) 당시 우리나라는 안보상황이 어땠습니까?
답변: 남북 분단상황이었고, 소련과 중공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북한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북한 김일성이 남침하여 적화통일하려고 하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5) 그러면 남북 분단상황에 남침우려까지 있는데, 당시 정부가 광주사태를 진압하지 않고 가만놔두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답변: 이 소요사태가 전국도시로 확산되어, 북한군 남침이 우려되었습니다.
(6) 북한에서는 매년 5.18 행사를 거대하게 치룬다고 합니다. 북한은 전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인데, 왜 민주화운동이라는 5.18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까?
답변: 북한에서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키운 맥가이버 같은 수백명의 특수군이 전멸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북한특수군을 보내 민간인과 군인들의 충돌을 유도하고 혼란을 일으키고 이러한 혼란을 남한 전역에 퍼뜨려 전국을 혼란상태로 만든다음에 북한군을 남침시켜 적화통일 하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내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던 여러 기회 중 5.18 광주사태가 가장 아쉽다”고 밝혔다.<참고자료: 북한특수군이 변산반도로 상륙하여 광주로 침투했다는 증언>
(7) 전두환 정부는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고, 두자릿수에 육박하던 물가상승률을 5% 미만으로 낯췄으며, 박정희 정권시절 경제개발로 인해 지게 된 많은 국가빚을 굳건한 한미일 동맹을 통해 탕감받거나 갚아서 국가부채를 줄였다. 이러한 경제성과를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거둘 수 있었습니까?
답변: 김영삼과 김대중은 불가능합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확실하게 이룩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들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터져나오는 사회불만을 통제하지 못하였을 겁니다. 대규모 노조 결성으로 임금인상에 대한 압박이 커졌을 것이고, 스테그플레이션하에서 급격한 임금인상과 화폐발행을 단행하여, 오늘날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처럼 하이퍼인플레이션 국가가 되어 자멸했을 겁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보수쪽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반일성향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이 되자마자 반일정책을 펼쳐서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한일관계 파멸은 미국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음에도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한푼의 외환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IMF체제로 들어가 많은 국민들이 실직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많은 우량 기업들이 외국에 헐값으로 팔려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본이 외환을 공급해주었다면 이러한 비참한 상황 없이 경제위기를 극복했을 겁니다). 만약 김영삼대통령이 1980년대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의 경제감각 및 반일성향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는 재정위기 및 외환위기로 주저앉았을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친북성향이 강한 대통령입니다. 또한 민주화 운동시기에 재야인사들과 많이 접촉하여 좌경화된 기반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김대중 정부는 집권 후 햇볕정책으로 북한 핵무기 개발 초기단계(핵개발을 저지할 수 있던 골든타임)에 막대한 달러와 물자를 북한에 지원하여 북한 핵개발 및 미사일 개발에 일조하였습니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1980년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경제성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친북성향으로 안보위기를 초래했을 겁니다.즉, 당시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경제와 안보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이 무조건 대통령이 되어야 했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당시 정황 상 북한특수군이 분명히 광주사태에 개입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문재인 정부치하 에서는 이것이 객관적으로 검증이 안됩니다. 미국, 이스라엘 등 객관적이고 정밀하게 검증할 수 있는 나라에서 지원과 감독을 받아 검증해서, 억울한 광주시민,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주어야 합니다.<추가자료> 북한 탈북자가 밝힌 북한의 5.18 기념
너무 긴 답변이 될것 같아서,,, 답글을 아니쓰려 했던 것인데….park5286 이라는 분이 너무나도 무식한 댓글을 달았기에…. 제가 알고 있는 범위안에서 사실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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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광주 5,18 기념절>이란 것은 없습니다.
– 그러나 광주사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해마다 5월18일 전날인 5월17일 오후에는 평양 <인민문화궁전>6천석 극장에 중앙의 큰 간부들과 시민들을 모아놓고 < 5,18 광주민주화투쟁 기념보고대회>라는 것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것을 TV, 각 신문들에 광고,보도하며 국민들과 간부들이 잊지않도록 각성시키고 있죠.
– 뿐만아니라 1979년도부터 북한철도운수부문 에서 진행하여 오던 생산 대중 운동인 <무사고,정시. 견인초과 운동>을 1980년 광주사태후 즉시 <5,18 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으로 고쳐부르도록 김일성이 지시 함으로서 ……
30년이 지난 아직 까지도 북한의 수천개의 철도 역전들 과 기관차마다에 <5,18무사고정시 견인초과운동을 힘있게벌이자!>라는 구호를 써붙이고 진행중인 상태이죠.
– 다음은 <5,18청년돌격대> 요,,뭐요하면서 시기별,,분야별로 진행하는 사회운동들마다에 5,18이라는 이름들을 명명하고 후대들에게까지 그정신을 이어 나가도록 노동당에서 꾸준하게 지도,통제를 를 하여 오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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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생시에 항상 <나는 작은 기관차가 많은짐을 실은 화차들을 수많이 끌고 힘차게 달리는 모습이 제일 보기좋다> 라고 하면서,,,
<모든간부들도 기관차와 같이 혁명의 앞장에서서 대중을 힘있게 이끌어 나아가야한다> 라고 말하군 했었죠.
그래서 원래는 <평양 전기관차 생산공장>이었던 공장 이름을 <남조선 통일혁명당> 당수였던 김종태의 이름을 명명하여<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이라고 부르게했죠.
또한 철도분야의 생산대중운동인 <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에도 5,18을 붙이게하여 <5,18 무사고정시 견인초과운동>이라고 부르게한데도 그런 사연들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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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변때에 북한군 특수부대가,,600명이 정말 내려왔는가???
아니면 599명이 내려왔었는가하는 것은 후에 밝혀지게될 숫자적인 문제일뿐,,
,북한특수부대,,- 련락소전투원들이 광주사건에 직접 간섭했다는 것은 천하가 다아는 사실입니다. 광주사건이 남조선해방으로 이루어지지못한것 때문에 김정일이 얼마나 원통해 했는지는 남한사람들이 안다면,,,, 아마도 전두환을 하늘이 보낸 구세주로 모시자고 들겁니다. 남한국민들 아무리그래도 국가의 무기고를 부수고 자기 국민의 자식들 가슴에 총탄을 퍼부울 사람들이 아니라고 저는 장담해요.
관주사병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1) 정말로 어리석은 자이든가…
2) 아니면 김대중의 졸개인 친북분자이든가….
3) 아니면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든가….
이 세부류 중에 하나라고 보면 틀림 없죠.
너무 긴 답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