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원글님에게 하고싶은 말은 //
신앙은 누가 주입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이 원숭이가 아닌다음에야 훈련으로 흉내는 낼 수 있어도 그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물론 신앙을 위한 어느정도의 지식적 훈련은 필요합니다. 그 부분을 어릴적부터 교회를 통해 머리에 주입할 수는 있겠지요. 물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이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한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만 커지지요.
그것보다는, 아이들에게 신앙을 위한 자양분을 쌓게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여행도 다니고, 책도 많이 읽혀서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을 자기것으로 소화하는것이 결국 ‘인생의 문제’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이야기 했다는 것으로 기독교인들이 공격하는 철학자가 되었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는 철저히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선언한 하나님은, 착한일하면 복주고/ 나쁜일하면 벌준다는 것과 같은 바알이요 아세라일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하면서 헌금하는 것, 교회에 봉사하는 것, 그런것들이 바로 ‘착한일’입니다. 그런일들을 모두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각자 신앙인들은 자기 신앙의 민낯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세월호와 같은 참담한 일들이 벌어졌을때, 하나님은 어디계신가란 질문에 마주하게 됩니다.
전 아이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 아인, 저와 같이 교회에 가긴하지만, 교회에선 별다른 특별한 활동을 하진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로서 삶에 대해 진지해지고, 나름대로 고민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아이가 커서 스스로 인생의 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겠지요. 그것을 준비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것을 용인해주는 하나님을 전 신앙합니다. 로마서의 내용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되어있지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거기에 핵심이 “아직 죄인” 입니다. 교회에 먼저 가고 뭔가를 한다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을 /내 의지/로 받아들이는 가의 문제인데 그것 역시 좀 더 깊이 나가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전 어떤 형태의 파쇼도 반대합니다. 그것이 신앙이 됐던, 이데올로기가 됐던. 파쇼는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인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독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