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조선일보] 월북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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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여기자 구출 보면서 가슴 울렁거렸다”
    <이 기사는 월간조선 9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지난달 5일. 북한 억류 142일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유나 리와 로라 링 기자가 비행기에서 내려 가족과 포옹하던 순간 TV로 이를 지켜보던 오길남(67)씨는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분명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마음이 결코 편하지 못했다. 북한에 두고 와 23년째 얼굴을 보지 못한 아내와 두 딸 생각이 나서다.

    월간조선이 오길남씨를 만나 가족이 3·8선을 두고 갈라져 사는 사연을 들어봤다.

    1942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부산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한 오길남씨는 1985년 독일 브레멘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적지 않은 나이(43세) 였기 때문에 대학 강단에 서기 힘들어 방황하고 있을 때 작곡가 윤이상, 재독학자 송두율, 김종한 등이 찾아와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 없느냐”는 제의를 했다.

    간호사였던 부인 신숙자씨는 월북하자는 오씨의 말에 “당신은 언젠가 월북 때문에 자신의 눈을 찌르며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1985년 12월 두 딸과 부인을 데리고 북한으로 갔다.

    오씨 일가족은 3개월간 외부와 차단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오씨는 1986년 6월부터 11월까지 북한이 남한 내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한민전 산하 칠보산연락소에서 근무했다. 경제학자로서의 역할은 전혀 없었다.

    1986년 11월 초, 오씨는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유인해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부인 신숙자씨는 “당신 자식과 마누라의 생명만 소중하냐. 유망한 젊은 부부를 데려와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며 오씨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사진]
    ▲ 큰딸 혜원, 아내 신숙자, 그리고 작은딸 규원의 모습. 1991년 1월 20일, 윤이상이 가족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한 개와 함께 전달한 가족사진 여섯 장 가운데 하나다. 그곳에는 큰딸 혜원과 둘째 딸 규원의 짤막한 편지도 들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빠! 나 혜원이야요. 며칠 전에 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즐겁게 보내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 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 아빠! 나는 규원이야요!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보고 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1991년 1월 11일 평양에서’
    신씨는 또 “우리는 죽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내 딸들이 남을 속여 지옥에 빠뜨리는 파렴치범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다”고 외쳤다. 오씨는 “내 뺨을 때리던 아내의 손길과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1986년 11월 10일. 오씨는 간염에다 심근경색, 동맥경화증으로 초췌해진 아내 신숙자와 열감기를 앓고 있던 두 딸을 북한에 남기고 평양을 출발했다. 김정일과 허담의 심복인 백치완 등 북한 공작원 두 명도 따라붙었다. 11월21일, 오씨는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공항 직원에게 구조요청 메모를 전달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오씨는 그 후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윤이상을 만나 북한에 있는 가족을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다. 윤이상은 1987년 10월과 1988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있는 부인이 쓴 편지를 건네주었다. 1991년 1월엔 아내와 아이들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 한 개와 가족사진 여섯 장을 주며 “다시 월북하라”고 협박했다. 오씨는 결국 혼자 힘으로는 가족을 송환할 수 없다고 판단해 1992년 4월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했다.

    오씨는 1992년 10월 북한의 요덕수용소를 탈출한 안혁, 강철환으로부터 북에 있는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됐다. 이들은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은 요덕수용소 대숙지구에 수용돼 있고, 신씨는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는 등 산나물을 뜯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씨의 가족은 최근 앰네스티가 북한의 요덕수용소를 비롯한 정치범 수용소 수감자, 행방불명자들의 명단을 파악할 때 포함 됐다. 오씨는 “솔직히 미국의 여기자 구출을 보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며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혹시 아이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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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답답한 이야기네요. 오박사의 잘못된 결정을 탓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북한이 얼마나 evil한 나라인지를 인식하게 되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 오마이 24.***.147.135

      전, 가족을 남기고 혼자 탈출을 한 아버지가 더 밉습니다. 남편, 아버지의 잘못된 판단을 알면서도 가족이니, 따라갔는데, 결국 본인 자신만 빠져나왔군요. 가족들의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제가 오씨면, 다시 월북해서 가족들과 같이 수용소에서 죽어도 같이 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