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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독이라 불리는 이유
한국기독교는 유신을 거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에 가장 앞장섰었다.
비교하기가 뭣하지만 결코 천주교나 불교에 뒤질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한국기독교의 거대한축은 이른바 ‘삼박자 축복’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유신과 군사독재체제에 투항하여 경제발전과 부는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라는
세계 역사에 없는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장로인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한국기독교는 한국사회의 주류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 또다른 장로였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적이 있었지만
그는 친일과 부패를 통해 기독교에 이미 험한 유산을 남겨준 허울뿐인 부끄러움이었다.
현 국회의원의 절반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중 4-5개가 한국에 있다.
현 대통령 이명박 역시 교회 장로출신이다. 그의 내각과 주변에는 이른바 소망교회 인맥으로
화려하게 둘러쳐저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한국을 기독교국가라도 불릴 만 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있다. 한국교회는 이른바 한국사회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지도층은 기독교인으로 되어있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서거를 보면서…
목사님 혹은 기독교인이라고 할만한 인물중에 아무도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답의 해답에 접근한 것 같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개인주의와 개인화된 복음때문이다.
예수님의 복음의 본질은 한 인간의 구원에 있지 아니했다. 예수님은 지체로 공동체로의 복음을 강조하셨고
초대교회 이후로 늘 교회는 모이는 곳이었고 믿는 사람들의 모여 공동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교회의 역사였다. 개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복음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방점을 찍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한사람의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개인이 일대일로 마주하는 종교이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믿는 사람들(교회)가 모여
공동체가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경험하는 역사를 가지는 공동체의 종교였다.
하/지/만
유신과 군사독재시대를 지내면서 교회의 사회책임과 공동체의 믿음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두갈래로 갈리게 되었다. 한쪽은 참담한 현실을 외면하고 그저 개인의 구원과 축복을 강조하는 쪽으로
한쪽은 격렬한 사회참여의 방향으로… 하지만 유신군사독재가 끝나고 이른바 문민시대가 맞이하게 되어도
이 두 갈래는 하나로 만나지 못하였다. 전자는 한국사회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이른바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하여는 목소리를 내지않는 불문율(?)을 이상으로 여전히 개인의 축복과 구원만을 강조한다. 주일날 교회에서는
거룩한 장로, 집사, 목사였지만 월요일이 시작되면 그들은 부패하고 위선의 장로, 탈법과 거짓의 집사, 돈과 권력에
빠진 목사로 둔갑하게 되었다. 이 흐름은 교회안에서 어떤 특정한 사회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관점을 제기하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잣대로 문자적으로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에만 목소리를 내면서, 각종 비리와 부패,
위선과 거짓, 불법적인 재산증식과 세금탈루등으로 무장을 하게되면서 결국에는 교인이 아닌 국민들에게는
개독이라는 말로 불려지게 된다.
다른 한편에 있던 교회의 사회적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오랜 투쟁을 통해 국민참여의 동력을 잃고
교회자체의 색깔로 더이상의 입장참여를 할 역량을 잃게된다. 그래서 교회로서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환경운동으로
시민사회운동으로 다른 종교와의 제휴를 통해서 그 동력을 이어가게 된다. 그 결과 많은 일반 기독교인들과는 유리되면서
교회 특유의 색깔을 차음 잃어버리게 되고 그 활동들을 교회의 움직임이라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개인의 구원은 중요하다.
개인의 축복과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도 정말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교회가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와 공동체에서 유리된다면
그것을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이라 할수 있을까? 예수님이 단 한번이라도 이스라엘 공동체와 유리되어
사역한 적이 있었던가? 성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처해진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그 정치적 사회적 문맥을 무사한채 개인의 복음만을 강조했던 적이 있었는가?
내가 현재 다니는 교회는 교회안에서도 아주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이다.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인격은 훌륭하신 분이지만, 박정희를 아직도 근대화의 주역, 우리 민족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분이시고
설교를 통해 사실관계가 확인되지도 않은 일부 언론의 보도를 토대로 노무현 전대통령님을 잘못된 아버지 상으로 묘사를 한다.
결국 다음 주 노무현 전대통령님이 서거하시자 교회의 설교를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수 없다는 차원의 말을 반복하셨다.
비단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은 노무현 전대통령님의 서거에 대하여 어쩌면 그렇게도 한목소리로
‘자살은 죄악이다.’ ‘자살은 용납될수 없다.’ ‘자살을 힘들었다는 말로 동정의 대상이 될수는 없다’ 심지어 ‘자살으르 하면 지옥간다’
라는 너무나도 일차원적인 설교를 예수님의 말씀인 아닌 본인들의 정치적 소견을 설교로 제시하신다.
자살은 죄악일 것이다. 하지만 왜 다른 범죄에 대하여는 침묵할까? 위선과 거짓, 부패와 불법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왜 자살에 대해서만 그렇게 구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과연 예수님께서는 노전대통령님의 서거에
대하여 왜 자살했냐고 다그치면서 추궁하셨을까? 내가 아는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리가 없다. 예수님은 그저 손잡아 주시고
안아주시면 등 두드려 주셨을 것이다. 간음한 여인에게 ‘죄있는 자가 와서 돌로 치라라고 변호해 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 간음은 십계명을 어긴 죄가 아니던가?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서거에 대하여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노전대통령님이 좋은 곳에서 편히 쉴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우리 하나님이 자살하면 지옥간다라는 그렇게 단순하게 치환하는 분이 아니심을 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하고, 거짓증언하고, 네 이웃을 것을 탐내고, 간음한 수많은 성도와 집사와 장로와 목사가
모조리 다 지옥에 갈까?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안다.
이번 서거를 보면서 나는 참으로 깨어있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게되었다.
불교계와 천주교계의 많은 어른들이 이 사회적 책임을 등한하지 않고 각각의 가르침으로 목소리를 용기있게 내는 모습을 보며
내가 기독교인이것이 참으로 부끄러웠고, 지금의 상황에서 깨어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목소리를 내는 목사님이 기독교인이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금할수가 없다.
예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는 늘 힘없고 돈없고 빽없는 사람들의 교회였다. 교회가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사회적 책임의 목소리를
저버렸을때 각 시대는 멸망당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저 옛날에 로마가 그랬고 중세의 천주교가 그러했다.
개독교… 나는 이 비난과 힐난의 목소리가 그냥 귀로 흘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임을 안다.
개독교가 다시 기독교가 되는 날이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님의 그리워했던 사람사는 세상,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반칙과 특권이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한 사회가 되는 날이 될것이다.
한국교회여… 노무현 전대통령님의 서거에 대하여 감히 자살이라고 손가락을 정죄하기 전에
너 스스로가 너를 돌아보고 이 서거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슬피울라.
그리고 뼈속까지 회개하라. 그 회개가 개인에서 나와서 공동체로 나아가지 않는 한
목사출신의 대통령이 나온들 그것이 기독교이겠는가? 그것은 개독이다.